[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 이야기 17] 고려 시대의 도교사상과 그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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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 이야기 17] 고려 시대의 도교사상과 그 추이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06.17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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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 사상 천문·지리·음양·의약 등 자연 과학 영역에 큰 영향 미쳐

천문·역수 등 관장하던 태복감·태사감·서운관 등 도사가 맡아 관리

[목포시민신문] 도교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래 된 것은 고구려 말기(624, 고구려 영류왕 7)이다. 신라와 백제에도 비슷한 시기에 전래 되었으나 도교 신앙은 고구려에서 성행하였다. 그것은 천제(天祭) ·무속(巫俗) ·산악(山岳)신앙 등 지리적 여건으로 종교적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책적으로 국가에서 적극 수용 권장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유학사상은 원시유교의 효제충신의 바탕 위에 한대 경학의 능률적인 전장 제도를 가미하여 발전시킴으로써 국가의 기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입을 막아낼 만큼 강성했던 고구려의 국운은 종교 간의 대립과 반목으로 쇠망하였던 것이다. 연개소문은 유교·불교와 함께 도교를 받아들이고 삼교(三敎)를 정립(鼎立)하도록 하여, 드디어 불교계의 대표 보덕은 국가가 불법을 중히 여기지 않고 도교를 받듦으로써, 남으로 완산 고대산으로 옮겨갔으며, 또한 도사(道士)를 존중하여 유사(儒士)의 위에 두었으므로 유교 쪽의 반발 또한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이 도·불 간의 반목과 정신계의 동요는 마침내 고구려 멸망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7세기 이후 삼국 간의 모순은 더욱 깊어져 이전의 정립 상태는 더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당시 고구려의 신흥귀족들은 지방의 귀족세력 가운데 급진파와 결합하여 대외적으로 확장을 꾀하며 강경노선을 걷는 사회·정치적 세력을 형성하였다. 연개소문은 바로 이러한 강경노선의 대표 인물로서 정치무대에 나선 것이다. 그는 강경한 정치·군사 노선을 펴나가는 데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하여 무장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비롯하여 여러 대신 및 문무 관원 백여 명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보수 봉건 귀족 계급의 강렬한 반대에 부딪혔을 뿐만 아니라, 삼강(三綱)을 천륜(天倫)의 법도라 여기는 유교의 명분사상에서 볼 때도 비난거리가 되었으며 자비(慈悲)를 부르짖는 불교 교의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유교와 불교 사상의 반발을 벗어나기 위해서 연개소문은 특히 도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또한 도가사상은 연개소문을 우두머리로 한 신흥 귀족 계급의 혁신행위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주었다.

상대적으로 백제와 신라에서는 종교적 신앙보다는 노자(老子), 장자(莊子)의 서적을 통한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민족 고유의 사상과 융합하면서 선도(仙道) ·선풍(仙風) 의식을 심화시켜 나가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신라가 통일한 이후에는 당나라 유학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 중에 양생(養生) 보진(葆眞)을 도모하는 사람이 있어 단학(丹學)의 성격을 가지는 수련도교의 양상을 드러내는 현상도 없지 않았다. 나중에 도가사상은 한국 고유의 신선(神仙)’사상과 결합하면서 더욱 신비화되어 그 사상적 의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고려 초엽에 이르는 동안은 불교 세력의 전성시대였으므로 도교가 불교에 눌려서 거의 그 존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명맥이 있는 듯 없는 듯하다가, 문종 때에 노자(老子)를 존숭하자고 청하니 왕이 제가하였다. 국가적으로는 호국연기(護國延基)를 바라는 초제(醮祭) 행사가 크게 행하여졌으며, 특히 예종은 복원궁이라는 도관(道觀)을 건립하는 등 도교를 크게 진작시켰다. 예종은 복원궁을 건립하기 이전에도 연경궁 후원에 있는 옥청정에 도교의 최고신인 원시천존상(元始天尊像)을 모시고 달마다 초제를 지냈고 청연각에서 노자 도덕경을 강론토록 하였다.

조선은 하늘에 국가의 안녕과 왕실의 번성을 바라는 초제를 실시하기 위한 소격서(昭格署)를 설치하였다. 특히 초제는 마니산 참성단에서 천지 산천 일월 성신에 제사 지내는 것으로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 역할도 하였으나, 중종 때에 이르러서 조광조 등 유학 선비들의 상소로 소격서가 혁파되는 등 점차 위축되어 갔으며, 임진왜란 이후에 초제를 행하는 의식 도교의 모습은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한편 풍수지리설과 도참사상은 한양 천도, 묘지 선정(명당 선호)에 영향을 주었으며 산송(山訟) 문제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또한, 무격신앙, 산신신앙, 삼신숭배 등 민간신앙으로 발전해 갔으며, 촌락제 세시풍속 등 유교 이념과 융합되어 조상 숭배 의식과 촌락의 안정을 기원하였다.

서예가 소정(素庭) 김은선(대한민국서예문인화대전 초대작가) 작 '도법자연(道法自然)'

도교의 주안은 생()을 보전(保全)하는데 있는 것이다. 즉 연년익수(延年益壽)함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을 보전하여 불로장수(不老長壽)함에는 안으로 무심무욕(無心無欲)을 힘써 이해득실과 일체영욕을 초월하려 힘쓸 것이나, 밖으로 또한 생명에 방해가 되는 질병과 재액을 제거하기 위하여 노자의 본존(本尊)과 기타 천신(天神)과 성신(星神)에 제사하고 기원하던 것이다. 이처럼 제사하고 기양(祈禳)하는 의식을 초례(醮禮)라고 칭하니, 예를 들면 궁과 전에서 행하면 무슨 궁 무슨 전 초례라 하고, 동지에 행하면 동지 초례, 탄일에 행하면 탄일 초례, 마니산서 행하면 마니산 초례라 하는 것이 그것들이다. 그리고 초례에 고하는 글을 청사(靑詞)라 하는데, 이것은 대개 그 글을 청색지(靑色紙)에 쓰는 까닭이다.

고려 시대의 사상을 유··도 삼교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이 활용되는 측면은 서로 다르게 나타났다. 현종 때의 채충순의 현화사 비문을 보면 불법은 마음을 경건하게 하여 복과의 인연을 이루는 데 있었고, 유교는 뜻을 간직하고 힘써 수행하여 정교를 융성하게 하는 데 있었다. 즉 불교는 종교적인 영역에서 평화 의식을 조장하였으며, 유교는 정치·윤리와 교육의 측면에서 그 질서와 원리를 제공하였다. 도교는 자연무위 사상으로 인위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실재론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인위적 억지나 조작을 탈피하려는 도교 사상은 시문학에 있어서 세속을 초탈한 경지를 개척하여 청아한 예술성을 드러내었으며, 한편 주관성을 배제한 자연관은 있는 그대로 관찰하려는 입장을 취하여, 천문·지리·음양·의약 등의 모든 자연 과학적 영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면, 고려 시대의 태복감·태사감·서운관 등은 고려 초부터 천문·역수·측후·각루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기관인데, 대부분 도사가 이를 맡고 있었다.

이와 같이 불교는 추상적 심학(心學)이요, 도교는 자연적 대상을 문제로 삼는 데 비하여, 유교는 인간과 사회의 현실에서 정치·교육, 그리고 윤리의 영역에서 활용되는 만큼 고려사 전반을 통하여 유교가 융성할 때에는 정교(政敎)도 융성하였고, 유교가 쇠퇴할 때에는 정교가 쇠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가는 도가를 끌어 안으므로써 학문 사상의 깊이를 더하고 지평을 넓혀왔던 것이다. 북송 성리학의 개조라 일컫는 주돈이의 태극도가 이미 도교(道敎)의 사상을 도학(道學)에 끌어들인 것이다. 이후 남송의 주희는 도교 경전인 음부경주역참동계를 주석하였다. 우리 조선에서는 퇴계 이황이 도인(導引) 등 양생술서라 할 수 있는 활인심방을 남겼고, 율곡 이이는 도덕경을 발췌 주해한 순언을 지었으며, 서계 박세당은 노자장자를 주석하였고, 서명응은 도덕지략, 이충익은 담로(談老), 홍석주는 정로(訂老)를 남긴 것으로 보아도 유자들의 도교, 도가에 대한 관심과 유·(儒道) 병용의 정신을 헤아려볼 수 있는 것이다.

신앙으로서의, 불로장생의 신선사상과도 결부되는 도교(道敎)와 노·(老莊)의 학문 사상으로서의 도가(道家)는 구별해서 보야야 한다고 한다. 어쨌든 유가는 현세 간의 학문이라면 불가는 출세 간의 종교이며, 도가는 은일(隱逸)적 무위자연의 도라 할 수 있다.

우리 선인 유자들도 출처(出處)와 진퇴(進退), 때로 산림에 물러나 유오산수(遊娛山水), 청담한묵(淸談翰墨)에 노닐며 독선기신(獨善其身)하던 것 또한 도가의 은일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렇듯 유가의 현실참여 정신과 도가의 속세를 초탈하여 유유자적하는 인생관은 교묘히 조화를 이루어, 우리는 좋은 세상이든 어지러운 세상이든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지혜를 터득해 왔던 것이다.

/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18번째 이야기로, '고려 후기의 유학'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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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06-17 21:57:45
동아시아 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가 성립되어 지금까지 전승. 이와 함께 한국 유교도 살펴봄.한국 국사는 고려는 치국의 도 유교, 수신의 도 불교라고 가르침. 고려시대는 유교 최고대학 국자감을 중심으로, 고구려 태학, 백제 오경박사, 통일신라 국학의 유교교육을 실시함. 유교사관 삼국사기가 정사(正史)이던 나라. http://blog.daum.net/macmaca/3057

역사적 순서로 보면 황하문명에서 은.주시대의 시원유교[始原유교:공자님 이전 하느님(天)과 여러 神明을 숭배]에서, 한국 고조선의 기자조선으로 始原유교유입, 기자조선(始原유교) 마지막왕 기준의 후손이 삼한건설, 삼한(始原유교)의 영토에서 백제(마한).가야(변한).신라(진한)가 성립됨.

윤진한 2021-06-17 21:56:55
한국은 세계사의 정설로,한나라때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에 성립된 세계종교 유교국으로 수천년 이어진 나라임.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때 외래종교 형태로 단순 포교되어, 줄곧 정규교육기관도 없이, 주변부 일부 신앙으로 이어지며 유교 밑에서 도교.불교가 혼합되어 이어짐. 단군신화는 고려 후기 중 일연이 국가에서 편찬한 정사인 삼국사기(유교사관)를 모방하여, 개인적으로 불교설화 형식으로 창작한 야사라는게 정설입니다.

​유교,공자.은,주시대始原유교때 하느님.조상신숭배.세계사로보면 한나라때 공자님도제사,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성립,수천년전승.한국은殷후손 기자조선 기준왕의 서씨,한씨사용,三韓유교祭天의식. 국사에서 고려는 치국의道유교,수신의道불교.

세계사로 보면 한나라때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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