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 이야기 20] 조선 전기의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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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 이야기 20] 조선 전기의 유학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07.16 08:59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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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바탕 통치로 새로운 국가 질서 확립...언론과 학문 중시

조선, 숭유배불(崇儒排佛), 농본민생(農本民生), 존명사대(尊明事大) 등 정사대강 삼아

[목포시민신문]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사상적 전환의 현저한 계기를 이룬 것은 배불숭유운동(排佛崇儒運動)이었다. 신라 시대에 융성하였던 불교는 고려에 계승되었으나, 사상적으로 점차 쇠퇴하고 사원 또한 부패하여, 국가 재정의 궁핍과 전제의 문란으로 내부로부터 새로운 이념과 개혁을 요구하게 되었다. 또한, 고려의 불교는 귀족불교로서 민중의 지탄을 받게 되었으며 출세간적(出世間的)인 본래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극도로 타락하였다. 이러한 불교의 배척을 부르짖던, 주자학적인 도덕적 이성주의로 무장한 신진 과거(科擧) 출신의 유자(儒者)들은 조선왕조 건설에 대거 참여함으로써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채택되게 하였다. 고려를 대신하여 새로이 일어난 조선은 이 시대를 바로잡아 구원하고 백성을 가르쳐 인도하기 위해서는 불교 이외의 참신하고 유익한 새로운 지도 사상을 채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조선왕조는 개국과 더불어 친명정책(親明政策전제개혁(田制改革) 등을 불러일으켰던 국내외의 정치적·사회적 요구에 따라, 구제도의 배경을 이루고 있던 불교를 배척하였고, 유교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질서의 근거로 삼았다.

태조에서 태종에 이르는 동안에는 유학 사상에 입각한 시정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고, 성종 시대에는 문물제도가 확립되고 유학 사상이 서민에까지 보급됨으로써 조선왕조 5백년의 기반이 이루어졌다. 유학 사상이 널리 보급되고 학문적인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배경으로는 활자의 주조 및 서적의 인쇄와 보급을 들 수 있다. 유학 경전과 사서(史書), 경서(經書)의 언해, 일반 교과서 등 문··(文史哲)에 관한 서적을 다량으로 인쇄하여 각도에 널리 배포함으로써 교육과 학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세종은 집현전을 궁중에 설치하여 유학을 연마하게 하고, 학자를 우대하여 조선 전기의 유학 사상이 학술적으로 심화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민족 문화에 획기적인 업적을 이루었던 것이다.

유교는 여말 이래 불교와 대립하였으며, 또한 조선 개국 초기로부터는 도교를 억제하여 고려 시대로부터 내려오던 초례소를 폐지하고 소격전만을 남기었다가, 이마저도 후일 조광조의 진언으로 폐지되었다. 조선의 유학은 불교 배척에서 나아가 도교마저 내치고 점차로 주자학적 정통성을 강화하여 갔던 것이다.

여말 이래 유학자 가운데 조선왕조에 협조하지 않고 절의(節義)를 지킨 길재는 정몽주의 의리정신을 계승하여 산림에서 교학에 전념하였다. 의리학(義理學)의 학통을 이은 이러한 사림(士林)의 후계자들은 도학의 의리정신을 내세워 관료 정치인이나 사장학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세조의 찬위 이후, 이를 지지한 훈구세력에 대하여, 단종에게 절의를 지킨 사육신·생육신을 비롯한 재야의 사림은 사상적인 대립을 형성하게 되었다. 성종 이후 관계에 진출한 신진 사림은 훈구세력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취하며 반목하게 되어 사화(士禍)의 발단이 되었다. 무오사화를 시작으로 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로 인한 수많은 사류(士類)의 희생 뒤에 이들 사림파는 도학의 주류를 형성하여 갔다.

유학의 정통적 정신에 투철하고, 공과 사, 의와 불의를 엄격하게 분별하며, 옳은 것을 위하여 생사를 넘어설 수 있는 우국애민(憂國愛民)의 의리사상을 실현하는 것은 도학자(道學者)로서 마땅한 책무인 것이다. 이러한 의리정신은 멀리 고구려의 선비, 신라의 화랑을 위시하여 후기의 조선 사회에서 보는 의리사상 및 의병과도 면면히 이어져 민족정기의 표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대사화(四大士禍) 이후 사류(士類)에게는 정치를 통하여 유교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것보다, 산림에서 학문에 전념하는 풍조가 일어나고, 이론적이고 사색적인 학풍이 조성되었으며, 조선 성리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 가운데서도 이황과 이이는 조선 유학의 쌍벽을 이루었으며,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에 들어온 양명학은 이단시되어 배척당하였으며, 공공연한 연구 활동이 불가능하였다.

조선의 성리학은 자연이나 우주의 문제보다 인간의 내면적 성정과 도덕적 가치의 문제를 추구한 것이 그 특징이다. 정교(政敎)의 이념인 성리학은 16세기 사림의 성장과 더불어 조선사회에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성리학은 예학(禮學)의 발달과 함께 국가 정책의 차원에서 옹호되었고, 사림계에서 정치사상으로 크게 강조되었다.

선조 때 들어와 정치적 불안과 거듭되는 병란으로 인하여 집권층 내부에는 점차 분열과 대립의 현상이 심하게 전개되었으며, 훈구와 사림의 대립뿐만 아니라, 유교 이념 및 정책상의 대립 등이 얽혀 당쟁이 치열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당쟁 속에서도 유학의 정통과 의리를 밝히려는 도학 정신은 면면하게 계승되었다.

필자 작‘동덕천방(同德天放)' : 백성들이 입고 먹는 것을 떳떳한 성으로 삼는 것을 동덕이라 하고, 하나로 보아 편당짖지 않는 것을 천방이라 한다.

조선 초기 유학의 학문 경향은, 위로 고려 말기의 유학을 계승하고 아래로 조선 중기의 주자학 전성시대를 연결하는 중간 시기로, 학문 경향도 두 시대의 중간성을 띠는 색채를 보이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고려 말기 유학의 학문 경향은 실제적인 정치·경제·법률과 문장을 위주로 하는 중국 한·당의 학풍을 가졌었다. 조선 중기의 학문 경향은 주로 이론 방면, 철학 부분인 성리학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중국 송나라 학풍을 가졌던 것이다. 조선 초기 유학계의 경향은 한·당과 송의 학풍이 혼합되었다. 때문에 한편으로 고려 말까지 전래 된 문장·정치 중심의 한·당의 학풍을 답습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뒤에 오는 새 시대의 이론중심인 리학(理學)이라는 송의 학풍에 대하여 그 선구가 되는 점을 보인 것이다.

조선왕조는 명실공히 유교 국가였으니, 유교로써 정교(政敎)의 대본으로 삼고 유신(儒臣)들을 중용하였다. 유교의 통치규범은 덕치주의와 민본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왕도정치의 구현을 이상으로 한다. 따라서 국가가 가지는 기능은 통치기능과 교화기능을 겸해야 하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이러한 유교의 통치규범에 입각하여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확립하였다.

조선왕조는 정사대강(政事大綱)에 있어 숭유배불(崇儒排佛), 농본민생(農本民生), 존명사대(尊明事大)의 세 길을 뚜렷이 제시하였다.

경제면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농업이 왕도정치의 기본이 되고 만사의 근본이 되며, 민생의 근본은 식()에 있고 족식(足食)의 근본은 농업에 있다는 인식 아래 농정을 중시하였다.

국제관계에 있어서는 선진·강대국인 중국에 대해 명분상 사대(事大)의 예를 행하여, 자주 사신을 보내 통교하고 친선을 도모하였는데, 여기에는 존화양이사상(尊華攘夷思想)이 그 바탕에 깔려있었다. 숭명사대(崇明事大)의 예()는 나중에 17세기에 이르러 숭명배청(崇明排淸) 정책으로 전개된다.

또 국가적으로 학교와 선비를 중시하고 교육과 사기(士氣)의 배양에 힘썼다. 학교는 풍속과 교화의 근원이자 모범을 세우는 곳이며, 선비는 나라의 원기(元氣)이기 때문이다. 즉 일대의 정치의 득실이 학교의 흥폐와 선비의 원기의 유무에 달려 있는 것이다.

또한 공의(公議)와 공론(公論)을 존중하며, 언론과 학문이 매우 중시되었다. 그리하여 유교의 정치이념에 입각, 군주의 독재와 관료의 횡포를 견제하고, 민심과 여론을 반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제도가 시행되었다. 특히 인정(仁政)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경연(經筵)을 국초부터 베푸는 한편, 언로(言路)를 열고 상소(上疏)제도 및 구언(求言)제도 등을 통해 상하의 정을 소통시키며 정책 결정에 적극 반영하였다. 또 조정의 실정을 막고 선정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사간원·사헌부 등 간쟁기구와, 임금의 언행을 낱낱이 기록하여 감계로 삼고자 사관제도를 별도로 두는 등, 공의에 입각하여 학술과 언론이 정치를 이끌어 가도록 하였다. 이는 전대의 왕조와 확연히 비교되는 조선왕조의 정치적·사상적 특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로써 보면 조선왕조의 실정은 제도의 미비에서 온 것이 아니라, 사대부 위정자들이 권세와 이욕에 매몰되어 그 운용을 잘못한 결과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21번째 이야기로, '조선의 학제와 과거제도'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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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07-17 22:14:40
석전대제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임.@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 기독교는 주권없음. 강점기에 피어난 신흥종교인 원불교등도 주권없음.

@주권없는 패전국잔재 奴隸.賤民이자, 하느님.창조신을 부정하는 Chimpanzee계열 불교일본서울대Monkey와 추종세력들.@@ Royal성균관대(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교육기관 성균관승계,한국 最古.最高대).Royal서강대(세계사반영,교황윤허,성대다음예우)는 일류,명문.주권,자격,학벌없이 대중언론항거해온 패전국奴隸.賤民불교Monkey서울대.주권,자격,학벌없는 서울대.추종세력 지속청산!

http://blog.daum.net/macmaca/733

http://blog.daum.net/macmaca/2967

윤진한 2021-07-17 22:13:49
삼한(始原유교)의 영토에서 백제(마한).가야(변한).신라(진한)가 성립됨.

일부 지역에서 굿이나 푸닥거리라는 명칭으로 신령숭배 전통이 나타나도, 이를 무속신앙이라 하지는 마십시오. 불교라고도 하지 마십시오. 유교 경전 논어 팔일(八佾)에서는 공자님이전부터 섬겨온 아랫목 신(안방신), 부엌신등을 섬기는 전통도 수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통적인 신명 섬기기에 대해서, 공자님도 오래된 관습으로, 논어 "향당(鄕黨)"편에서, 관습을 존중하는 예를 표하셨습니다. 신명(神明:천지의 신령)모시기 전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최고 교육기구는 성균관대이며,문중별 종친회가 있고, 성

윤진한 2021-07-17 22:12:30
동아시아 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가 성립되어 지금까지 전승. 이와 함께 한국 유교도 살펴봄.한국 국사는 고려는 치국의 도 유교, 수신의 도 불교라고 가르침. 고려시대는 유교 최고대학 국자감을 중심으로, 고구려 태학, 백제 오경박사, 통일신라 국학의 유교교육을 실시함. 유교사관 삼국사기가 정사(正史)이던 나라.
http://blog.daum.net/macmaca/3057

무속은 은.주시대 始原유교의 하늘숭배,산천숭배,조상숭배, 주역(점)등에서 파생된 유교의 지류.

역사적 순서로 보면 황하문명에서 은.주시대의 시원유교[始原유교:공자님 이전 하느님(天)과 여러 神明을 숭배]에서, 한국 고조선의 기자조선으로 始原유교유입, 기자조선(始原유교) 마지막왕 기준의 후손이 삼한건설, 삼한(始原

윤진한 2021-07-17 22:11:38
한국은 세계사의 정설로,한나라때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에 성립된 세계종교 유교국으로 수천년 이어진 나라임.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때 외래종교 형태로 단순 포교되어, 줄곧 정규교육기관도 없이, 주변부 일부 신앙으로 이어지며 유교 밑에서 도교.불교가 혼합되어 이어짐. 단군신화는 고려 후기 중 일연이 국가에서 편찬한 정사인 삼국사기(유교사관)를 모방하여, 개인적으로 불교설화 형식으로 창작한 야사라는게 정설입니다.

​유교,공자.은,주시대始原유교때 하느님.조상신숭배.세계사로보면 한나라때 공자님도제사,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성립,수천년전승.한국은殷후손 기자조선 기준왕의 서씨,한씨사용,三韓유교祭天의식. 국사에서 고려는 치국의道유교,수신의道불교.

세계사로 보면 한나라때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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