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 이야기 21] 조선의 학제와 과거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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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 이야기 21] 조선의 학제와 과거제도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07.22 23:02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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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최고 교육기관…사학 향교와 함께 인재 양성 역할
유생 중심 과거제 통해 관료 선발…17C 과거 거부 유생 중심 ‘산림’세력화

[목포시민신문] 조선왕조는 국가적으로 학교와 선비를 중시하고 교육과 사기(士氣)의 배양에 힘썼다. 학교는 풍속과 교화의 근원이자 모범을 세우는 곳이고, 선비는 예의(禮義)의 근본이며 나라의 원기(元氣)이기 때문이다. 즉 일대(一代)의 정치의 득실이 학교의 흥폐와 선비의 원기 유무에 달려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학교와 과거제도는 고려 말기의 제도를 많이 답습하였다가 세조·성종 때에 이르러 규모가 차츰 완비되었다. 후세에 약간의 변혁이 있었으나 대체로 갑오개혁(1894) 이전까지는 그 골격이 유지되었다.

학교는 태학(太學)인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四部學堂), 향교(鄕校)의 세 종류가 있고, 그밖에 종친학교인 종학(宗學)과 사학(私學)인 서당(書堂)이 있었으며, 뒤에 서원(書院)이 설립되기에 이른다. 성균관과 사학은 모두 경내에 있었고 예조에 속하였다. 향교는 지방의 목····현 등 지방관이 파견되는 지역에 두었으며, 그 운영체제는 요즘의 공립학교와 같다. 여기에서는 우선 관학을 살펴보고 서원은 뒤에 별도로 논하기로 하겠다.

성균관은 태학으로서 국학이라고도 칭했는데 곧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고려 충선왕 때부터 비롯되어 조선에서도 그대로 사용하였다. 태조 3(1394)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동 6년에 성균관을 관읍의 동북우에 건립하였는데, 현재의 성균관 구내가 바로 그 장소이다. 경내에는 공자를 향사하는 문묘와 강학장소인 명륜당을 설치하였다. 명륜당의 좌우에는 동재와 서재가 있어 유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되었다. 문묘의 대성전에는 공자 및 성철(聖哲) 유현(儒賢)을 배향하고, 동무와 서무에는 공자의 제자를 비롯하여 역대 명현을 종향, 춘추로 향사드렸다. 그 외에 공궤(供饋)를 관장하는 양현고가 있었고, 성종 6(1475)에는 존경각을 설치하여 도서를 보관하였는데, 지금의 학교 도서관과 같은 것이었다.

입학자격은 원칙적으로 생원과 진사, 즉 소과에 급제한 유생들이었으며, 정원은 200인이었고, 정원에 미달 될 때는 사학의 유생으로 충원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승학(升學)이라 하였다. 성균관은 문과 준비를 위한 과업교육(科業敎育)을 담당하는 기관이었기에, 입학규정은 엄하면서도 일정한 재학기간이나 졸업일이 없었다. 과거에 합격하는 날이 바로 졸업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성균관과 사학, 지방향교의 유생들은 유적인 청금안에 등록되어, 국가로부터 여러 가지 혜택과 보호를 받았다. 특히 성균관의 유생들은 국가적 차원에서 보호 육성하였으며, 여러 가지 특전을 부여하였다. 관시라 하여 한성시나 향시와는 별도로 문과초시를 생원 진사들에게 보였고, 국왕이 성균관에 나아가 선성현(先聖賢)을 친견하고 난 뒤 알성과를 시행하였다. 또 지식인 계층으로서 상소를 통해 조정의 시정에 간여하였고, 조정에서도 이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학과는 경술과 문장이 주요 내용으로서 정주학 위주였다. 세조 4(1459)에 고려의 제도를 모방하여 구재(九齋)를 설치하였는데, 고려 말기 국학의 사서오경재와 같은 것이었다.

조선 초에는 고려의 제도를 모방하여 오부학당을 경내에 두었다가 세종 만년에 사부학당으로 고쳤다. 이것이 바로 중학·동학·남학·서학의 사학이다. 사학은 성균관에 예속되었으며, 명륜당과 재()만 있고 문묘(文廟)는 없었다. 학생의 정원은 100인이고, 학과는 역시 경술과 문예를 위주로 하였고 대개 중등 정도의 수준이었다.

향교(鄕校)는 각 읍에 하나씩 있었고 이 역시 고려의 향교 제도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향교에도 문묘·명륜당·()를 설치하였다. 정원은 목·부와 같은 대읍의 경우 90인 혹 70인이었고, ·군 같은 중읍은 50, 소읍은 30인이었다. 운영 경비에 충당할 제전(祭田학전(學田)과 노비의 사급(賜給)도 역시 차등이 있었다. 그 교육 정도는 사학의 수준을 넘지 못하였으나, 문묘·동서무·명륜당·동서재 등은 성균관의 체제를 축소한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대체로 유학의 초보적인 지식을 다루는 초등교육은 서당에서, 고등교육은 한성의 사부학당과 지방의 향교에서, 대학교육은 중앙의 성균관에서 각각 이루어졌다.

조선조 인종(仁宗) 어필 '임하(林下)' : 그윽하고 고요한 산림전야에 물러난 은사(隱士)의 한가로운 삶을 동경함.

학교는 본래 교화 육영이 그 목적이고 과거는 관리 자격이 있는 자를 선발하는 시험제도이다. 그러므로 양 제도는 그 성격이 같을 수 없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학교 교육이 과거 중심이 되어 학교와 과거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응시자가 반드시 학교를 거칠 필요는 없었지만, 학교 과정을 이수한 자는 과거 응시에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받았다. 즉 학교는 일종의 과거 예비소의 성격을 띠었던 것이다.

과거는 유학을 숭상하는 정책기조상 숭문주의(崇文主義) 경향이 현저하였으므로, 문과·무과·잡과의 삼대과 중에서도 자연히 문과 중심으로 행해졌다. 그리고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엄격히 제한하여, 상인과 중인은 물론 양반이라도 서얼 출신은 응시할 수 없도록 하였다. 무과는 이와 달리 신분상의 제약을 훨씬 완화시켜 상인(常人)까지 응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 한편, 직업적 기술관을 등용하는 잡과의 경우, 양반들이 응시를 기피하였고 일반 상인 역시 기술훈련이 없어 응시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경향의 각 전문관청에서 양성되는 생도들이 응시하였다. 그러므로 잡과는 일정한 신분계층에 의해 독점, 세습됨으로써 이들에 의해 이른바 중인(中人)’이라는 신분층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과거에는 대과와 소과가 있다. 대과는 무과에 대하여 문과라고 통칭하기도 하며, 소과는 생원과·진사과로 나누어지는데 사마시라고도 하고 감시라고도 한다. 대과에는 초시와 복시(회시라고도 함전시의 규정이 있고, 소과에는 다만 초시와 복시가 있을 뿐이다.

대과·소과를 막론하고 경내에서 실시하는 것은 한성시라 하고, 각 도에서 실시하는 것은 향시라 한다. 대과 초시에 관시가 있는데 성균관의 상재생으로 입학한지 300일이 지난 자 중에서 선발한다. 복시는 2차 시험 격이다. 한양에 모여 예조에서 실시하므로 회시라고도 했던 것이다. 대과 회시에 뽑힌 자를 왕이 전중(궁중)에서 직접 시험하므로 전시라고 하는데 이것이 곧 문과의 최종 시험이다. 전시의 급제자를 삼등으로 나누어 상등은 갑과라고 하여 3인을 뽑고, 중등은 을과라고 하여 7인을 뽑으며, 하등은 병과라고 하여 23인을 뽑는다. 대과의 급제자는 홍패를 지급하고 소과의 입격자는 백패를 지급한다. 즉 합격증이다.

소과의 생원·진사과는 출제 분야가 각기 달랐다. 생원과는 경술(經術), 진사과는 문예(文藝)가 중심이었다. 생원과의 초시는 사서의·오경의 2, 복시는 소학과 가례를 강하였다. 진사과의 초시와 복시는 모두 시부(詩賦)로써 시험하였다.

대체로 조선의 과거제도는 문예를 높이고 경술을 가볍게 여겨, 대과는 시···책을 위주로 하고 소과는 생원보다 진사를 높게 보아 후세에 생원과는 점차 쇠퇴를 면치 못하였다.

과거는 3년마다 실시하는데 뒤에 자···유의 해를 중심으로 그 전해의 가을에 초시를, 그해 초봄에 복시와 전시를 실시하여 식년문과라 하였는데 이는 정기 과거라고 할 수 있다. 또 이외에 필요에 따라 수시로 실시하기도 하였다. 즉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증광시를 실시하는 등 별시문과·알성문과·문과중시 등이 있었고, 후세에는 그 명목이 더욱 많아 과거의 횟수가 더욱 잦아져 삼년대비(三年大比)의 법이 점차 해이해져 그 폐단이 매우 컸다.

조선시대의 문과고시는 제술에 치중되었던 고려시대의 풍조에서 벗어나 명경과 제술이 비교적 대등한 비중을 가지게 되어, 기본적으로 경학과 사장을 겸하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기로 내려올수록 사과(詞科)’가 자주 열림으로써, 어려운 경학보다도 사장을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처럼 사장 편중의 폐풍이 생기고, 과유(科儒)들에게 진정한 인격이나 참다운 학문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자, 뜻있는 선비들은 과거를 단념하고 오직 경학과 성리학을 연구하는 데 전념하기도 하였다. 이들을 산림(山林)’이라 하였는데, 17세기 이후에 이르러 하나의 정치적인 세력으로 등장하였으며, 이후 국가의 대소사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22번째 이야기로, '조선의 양반사회와 농민의 생활'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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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07-24 10:28:18
추가로 법제화. 성대 6백주년 행사때는 대통령.국무총리.교육부 장관 참석하였습니다.

.*성균관대,개교 6백주년 맞아 개최한 학술회의. 볼로냐대(이탈리아), 파리 1대(프랑스), 옥스포드대(영국), 하이델베르크대(교황윤허,독일),야기엘로니안대(폴란드) 총장등 참석.

http://blog.daum.net/macmaca/1467

http://blog.daum.net/macmaca/733

윤진한 2021-07-24 10:27:44
에도 맞지 않는게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임.해방후 미군정부터 국사 성균관(성균관대)교육을 시켜온 나라 대한민국임.

국사 성균관(성균관대)나라. 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 승계 성균관대는 국내외에서 6백년 넘는 역사를 행정법.국제관습법으로 인정받고 있음.Royal성균관대.세계사의 교황반영, 교황윤허 서강대는 국제관습법상 성대 다음 Royal대 예우.패전국 일본 잔재이자, 불교 Monkey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 없어왔음

*성균관대로 정통을 승계하기로 하자, 미군정이 향교재단의 재산으로 성균관대 재정에 기여토록 하는 법을 추가로 만들어 주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때 대통령령으로 시작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발행으로 행정법상 조선 성균관 승계를 추

윤진한 2021-07-24 10:27:12
Royal성균관대는 太學등의 별칭있고,왕립대학이며, 대한제국의 皇대학 전통과 자격을 가지고 있음. 해방후의 주권없는 일제잔재 중심 비신분제 국립대학과는 성격도 다름.@카이로선언이후 프랑스.소련.폴란드등이 승인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법.국내법적 위상을 상기하고, 패전국 일본잔재로 한국영토에 주권이 없어온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패전국 일본잔재로 적산재산 형태)를 국립대로 강행할때, 전국적인 반대와 서울대생들의 등록거부.자퇴등이 있었던 상황도 인식해야합니다.

국제법상 일본이 항복후, 포츠담선언(카이로선언 포함)에 따라, 한국영토에서 일본의 모든 주권은 없어왔음.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는 한국영토에 주권.자격.학벌이 없어왔음. 현행헌법 임시정부 구절(한일병합 무효, 을사조약등 불평등 조약 무효, 대일선전포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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