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 유학이야기 23]절의파와 사류들의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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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김형만의 한국 유학이야기 23]절의파와 사류들의 동향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08.08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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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폐위 조선 유림의 분파와 사화의 핏빛 보복 단초가 되다

사상과 처세관 차이나 교분에 따라 훈구파·절의파·청담파·영남파로 분류돼

[목포시민신문] 조선 개국 이래로 역대 왕들의 숭유책(崇儒策)과 문교정책이 실시되었다. 그중 문운(文運)이 융창하기는 세종조가 그 절정을 이루었고, 세조와 성종의 치세에도 문운이 대단히 왕성하였다. 그 전후에 걸친 문인과 학자들의 등장, 그리고 그들의 활약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바로 세조·성종조 사이에 있었던 사류(士類)들의 동향이다. 즉 조정에 벼슬한 이들과 재야에서 활동한 이를 불문하고 당시의 사류들은 사상과 감정·정실·향토·처세의 이동에 따라 그 출처(出處)를 달리한 것이다. 그들의 사상과 처세관의 차이나 교분 관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넷으로 분류해 보았다. 즉 훈구파·절의파·청담파·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일파가 그것이다.

이른바 훈구파란 훈신구가(勳臣舊家)를 지칭한다. 그들 중 두드러진 이들을 열거하면, 정인지·어효첨·최항·김수온·이석형·양성지·권람·신숙주·강희안·서거정·성임·이극배·이극감·한계희·강희맹·노사신·이극증·정난종·이극돈·성현 등이다. 이들의 학문 경향은 대체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인 성격이 강했으며, 특히 전례(典禮)와 사장(詞章)에 능하여 당시에 관찬 사업 등 문운을 일으키는데 기여하였다. 이들 중에는 세조를 섬겨 실절(失節)하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나, 세조·성종대에 이룩했던 치화(治化)의 성세(盛世)는 또한 이들 훈구파 학자들의 공로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육신(六臣)들이 절의(節義)를 표방하여 윤기(倫紀)를 부식(扶植)한 것은 진실로 일월과 같은 의의가 있다고 하겠지만, 훈구 학자들의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도 세상을 크게 보익하였으니 이 점 또한 망각할 수 없다고 하겠다.

조선 초기 사류의 사회참여 중 큰 사건으로는 세종 때에 내불당 건립 반대운동이 있었고, 세조 때는 단종 복위를 꾀하던 사육신(死六臣)의 운동, 그리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품고 일생을 폐인으로 자처한 이른바 생육신(生六臣) 등이 있었다.

절의파는 곧 사육신과 생육신 일파를 말한다. 조선이 건국하여 비록 명절(名節)을 숭상하였으나 이를 창도한 이가 없다가, 비로소 이를 창도한 이들이 바로 육신(六臣)들이었다.

훈구파 제신들의 뜻으로는 태조의 종사가 의구하고 또 구주(단종)가 상왕이 되었으니 사구종신(謝舊從新) 할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하여, 결국 세조의 공신 또는 총신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또는 김문기 등은 나라에는 정사(定嗣)가 있으므로 찬탈하는 자는 나의 군주가 아니라고 하여, 화가 종족에까지 미치는데도 꺼리지 않고 자신의 절의를 밝혔던 것이다. 그리하여 혹독한 참화를 당했으면서도 성명은 더욱 빛났고 그 영향이 무궁히 전해졌으니, 역대의 충렬도 이들 사육신에 따를 사람이 없었다.

또한, 당시의 사류들 가운데 세조의 찬립과 멸륜적인 행위에 분개하여 불사이군의 뜻을 실천한 이들이 있다. 그들은 평생 폐인으로 자처하면서 세상사에 관심 두지 않고 두문자정(杜門自靖방랑일세(放浪一世)하여, 지조를 지키면서 여년을 보냈다. 그들 중 가장 저명한 이들이 바로 생육신이다. 그들의 추상열일(秋霜烈日) 같은 지조는 실로 성삼문 등의 육신과 다를 바 없으나 생사만이 다르기에 생육신이라 불리는 것이다. 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권절 또는 남효원을 일컫는다.

청담파에는 국법에 의해 출세에 제한을 당하는 종실이나 서얼, 그리고 신분상으로 제약을 받는 서리들이 주로 가담하였다. 이들은 중국 진나라 초기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모방하여 노장(老莊)의 허무(虛無)를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시정(時政)의 속사(俗事)를 떠나 은일(隱逸)로 낙()을 삼아 시주(詩酒)로 마음을 달래고, 고담준론으로 소일하며 시사(時事)를 비방하기도 하였다. 청담파 가운데서도 죽림칠현으로 자처한 일곱 학자가 있었다. 곧 남효온·홍유손·이정은·이총·우선언·조자지·한경기 등 7인이 그들이다. 이를테면 탈속적 지식인으로서 시정속사(時政俗事)를 멀리하였으므로 청담파(淸談派)라 일컬어졌다. 이밖에도 안응세·허반·이윤종·신영희·노섭·유방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김종직의 문하에 출입한 학자들로서 사림파 학자들과 교류가 많았다. 이들의 처세는 비록 노장의 고허지론(高虛之論)을 따랐을지라도, 학문의 근본은 유학에 있었다. 이들의 세외적(世外的)인 처세를 선의로 해석하자면, 곧 은일이요 풍월의 애완이요 예술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반면 자기의 안이(安易)만을 구하여 국가 사회의 휴척(休戚)을 도외시하였으니 자기도취 또는 자기위안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훗날 이들 대부분은 사화에 연루되기도 하였다.

그 후 성종의 숭유정책에 따라 신진사림이 관계에 진출하게 되는데 그들은 점필재 김종직을 거두로 하는 영남 중심의 사림 일파이었다.

김종직은 영남(밀양)에서 야은 길재의 문인인 강호 김숙자의 아들로 태어나 경술과 문장으로 사림의 영수가 되었다.

그의 문생들이 매우 성황을 이루었는데 그중에는 영남 출신이 많았다. 점필재의 문도는 한훤당 김굉필·일두 정여창 등의 실천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시문을 위주로 하는 재사들이 많았다. 그들의 기상은 지나치게 높고 언론은 매우 성하여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았다. 또 그 문도들이 모두 조야에서 활약하여 명성이 일세에 떨쳤고 그들끼리 서로 좋아하고 기려서 저절로 한패가 되었는데, 사림의 파당적 경향이 이미 이때 엿보였다. 그들 신진사림파는 훈구파와의 반목, 갈등에 의하여 사화라는 참혹한 화를 빚게 된다.

김종직은 세조 4(1459)에 문과에 합격하여 수찬, 교리를 역임하고 감찰에 전임되었으나, 세조로부터 경박한 자라 하여 내쳐졌다가, 다시 기용되어 영남병마평사를 거쳐 교리로 옮겼으며, 성종이 즉위한 후로는 여러 번 경연시강에 선임되어 왕의 특별한 대우를 받고 때로는 외직에 나아가 함양·선산군수 등에 임명되기도 하였고 뒤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점필재가 함양군수 때에, 유자광의 시가 벽에 걸린 것을 보고 끌어내어 불태우게 하였다. 연산조에 이르러 유자광은 이극돈과 더불어 무오의 사옥을 일으켜서 점필재는 지하에서까지 화를 입으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유자광이 자기의 시를 불태운 원한을 보복한 것이라고 하였다.

대한민국 서예문인화대전 초대작가 여혜(如蕙) 김명리 서예가의 '수기안인 경세제민(修己安人 經世濟民)' 자신을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세상을 경륜하여 백성을 구제한다.

점필재의 학문은 문장을 위주로 하고 시에 더욱 능하였으나 도학(道學) 상의 문자를 남긴 것은 없다. 일찍이 이퇴계가 김점필은 학문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종신 사업이 다만 사화(문예) 상에만 있었으니 그의 문집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과연 점필재는 문호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도학자라고 하기는 어렵다. 또 그 소시의 작품 중에는 왕왕 풍자 비방, 혹은 세상을 가볍게 여기는 문자가 있어서 후일의 화근을 지었으니 예를 들면 조의제문화연명술주시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 문도들 또한 그의 취향과 기상을 계승하여 말과 글과 행동 중에 그와 같은 점을 많이 표현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후일의 참화를 불러일으키기까지 하였다.

혹자는 이들이 이어온 야은 길재의 학통이 정암 조광조로 전해진 것으로 보고, 포은 정몽주에서 정암에 이르는 학맥을 리학(理學) 또는 의리학의 정맥, 도학의 도통으로 여겨왔기 때문에, 김종직을 위시한 당시의 영남사류를 이른바 의리파(또는 절의파)라 칭해온 듯하나, 이것은 야은의 불사이조(不事二朝)의 의리를 무색하게 하고 사육신·생육신의 고결한 절의를 더럽히는 것일 뿐이다. 불사이조의 의리는 야은에서 다하였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는 육신(六臣)에서 지극하였다. 이러한 의리나 절의에 이들이 설 자리는 없다. 이들은 다만 국초 이래 치적을 이루어온 사공파의 독주에 염증을 느끼던 시류에 편승하여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사공파를 낡은 세력으로 몰아붙이며 권력과 지위를 다투던 일단의 신진사류에 불과할 뿐 경세와 민생을 위한 어떠한 공효나, 어떠한 의리도 볼 수가 없다.

당시 영남 일파의 영수라고 하는 점필재에 대한 후인들의 비평 가운데 유성룡과 허균, 장유, 윤증의 상론(尙論)을 살펴보아도 이러한 사정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허균은 종직이 천하의 이록을 차지하고서도 군자라는 명망을 훔쳤다하였고, 장유는 점필재가 세조에게 신하노릇을 하면서도 조의제문을 지어 춘추의 의리를 크게 범했다. 대개 이러한 마음이 있었다면 그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어야 했고, 이미 벼슬했거든 이러한 글을 짓지 않았어야 했을 것이다. 마음과 일이 서로 모순되고 의리와 명분이 다함께 이지러졌다고 혹평하였다.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24번째 이야기로, '사림세력의 등장'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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