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 유학이야기 25]지치주의 실천유학의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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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김형만의 한국 유학이야기 25]지치주의 실천유학의 좌절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09.05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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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理 구현의 이상사회 건설 목표한 실천적 정치 이념
경세치용 주장 조광조의 개혁 정치 기묘사화로 좌절

[목포시민신문]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였다. 중종은 민폐를 덜고 가혹한 법을 폐지하며, 절의(節義)를 장려하고 간쟁(諫諍)을 용납하며, 널리 인재를 등용하여 힘써 선정(善政)을 펴고자 하였다. 이때 무오사화(1498)와 갑자사화(1504)로 인하여 넋을 잃고 멀리 전야에서 조용히 숨어 지내던 선비들 사이에 다시 새 원기를 얻어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니, 조광조를 비롯한 지치주의 유학자들의 출현이 곧 그것이다.

지치(至治)’란 곧 이상적인 정치의 실현을 말하는 것으로, 서경·군진편에 보인다. 다시 말해서 천리(天理)가 구현되는 이상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이념이자 실천적 지침이라 할 수 있다. 유가에서는 전통적으로 요·(堯舜) 및 하··(夏殷周) 삼대(三代)의 정치를 이상정치의 모델로 삼아왔다. 그러므로 지치주의(至治主義)는 특히 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는 유가적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한 요·····(堯舜禹湯文武)와 같은 성왕(聖王)의 치세(治世), 즉 성대(聖代)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광조 등의 지치주의 도학(道學)정치란 다름 아닌 내성외왕을 바탕으로 하는 유가적 이상정치인 것이다.

유교에서는 왕도정치를 주창하고 패도정치(覇道政治)를 배격하거니와, 지치주의 역시 군주가 자의가 아닌, 덕과 예에 의해 다스리는 왕도정치를 목표로 한다. 따라서 지치는 예치(禮治), 덕치(德治)라고도 할 수 있다.

지치주의 유학파의 영수이며 대표자는 조광조로,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다. 성종 13(1482)에 한양에서 출생하였다. 17세에 부친을 따라 평안도 어천 찰방아문에 가서 있었다. 그때 김굉필이 희천에 적거(謫居)하므로 나아가 수학하여 학문을 닦는 대방(大方)을 듣고, 후에 송도의 천마산과 지평의 용문산에 들어가, 주야로 분발하여 경학의 깊은 뜻을 연구하며, 특히 소학근사록을 학문의 토대로 삼았었다.

그는 천질이 매우 아름답고 지조 또한 견확하여, 성현을 반드시 배울 수 있다고 확신하고, 동정어묵(動靜語默)에 매양 법도를 벗어나지 않으니, 속류들이 때때로 손가락질하며 비웃으나,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34세 때에 탁행이 있다고 하여 정부가 천거하여 사지(司紙)를 삼으니,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가 작록을 구한 것이 아니거늘, 이 같은 제명이 있으니, 차라리 과거에 응하여 정식으로 출신하여, 성주를 섬김만 같지 못하다.’하고, 드디어 그 해에 등제하여 이듬해 옥당에 선입(選入)되었다. 그는 매양 입시(入侍)할 때마다, 도학을 존숭하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법으로 삼아, 지치를 일으킨다는 설로 반복하여 임금께 아뢰었다. 그때 마침 중종은 유술을 숭상하고 문치에 뜻을 둘 때이므로, 정암을 중용하여 그의 말하는 바를 허심송청(虛心竦聽)하고, 몇 해 안에 부제학과 대사헌에 불차(不次)로 초천(超遷)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더더욱 불세(不世)의 은우(恩遇)에 감격하여 이것을 천재의 일시라 자신하고 우리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고 우리 백성을 삼대의 인민으로 만들 수 있다하여, ‘치군택민(致君澤民)’흥기사문(興起斯文)’을 자신의 임무로 알고, ‘군심(君心)은 출치(出治)의 근본이니 근본이 부정하면 정체가 설 수 없고 교화가 따라서 행하여질 수 없다하여 입대(入對)할 때마다 왕에게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을 역설하였다.

 

정암과 뜻을 함께한 지치주의 유학자들은 공·(孔孟)의 사상과 도를 정치나 경제나 교화에 실제로 실현시킴에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임금과 백성을 요순시대의 임금과 백성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이것을 힘써 말로 주장하거나 글로 쓰는 데 만족하지 않고, 몸으로 정치로 제도로 실천하고 실행하여, 직접 요순과 삼대의 성세의 출현을 기약하는 것이 저들의 목표였다. 그러므로 이 학파는 실천유학(實踐儒學)’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이 학파에 속한 사람들은 대개 청년기에 속한 사람들이어서, 열성과 용기로써 자진하여 시국을 담당하며 책임을 맡아, 임금에게는 몸을 바쳐 충성하고 백성에게는 혜택을 베푸는, ‘치군택민(致君澤民)’을 각각 자기가 아니면 다시 수행할 사람이 없다고 자신하고 자임하였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그 시대에 요순의 성세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듯하고 삼대의 왕도정치가 의심 없이 곧 실현될 것으로 믿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조광조 등 도학정치가들은 모든 숙폐를 개혁하고, 선유를 표창하며, 교조를 수명하고, 소학과 향약으로 백성을 교화하고 미풍을 이루는 방법으로 삼으니, 한때 사방이 풍동하고 조야가 모두 그들을 경외하였다.

유송 조병연 작 ‘백매’

그러나 당시에 지치주의 유학파 여러 학자에게는 또한 적지 않은 결점이 있었으니, 곧 연소신진들이 개혁에 급급하여, 군주의 자질과 시의를 헤아리지 않고, 지론이 과격하며,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이 너무 심하였던 것이다. 조광조를 위시한 신진사림은 대개 연소·기예한 사람들이라 조예가 깊지 못하고 이상은 풍부하였으나 실사에는 어두워서, 어떤 일이든지 모두 크게 벌여 놓으려고만 하여, 일을 속히 이루려는 욕속(欲速)의 실수를 면하지 못하였으며, 모든 건의와 설시(設施)에 예봉이 너무 드러나서 급격하고 순서가 없으며, 혹은 우활하고 실지가 없었다. 또한, 종래의 습속을 반대하여 노성(老成)한 대신을 비부(鄙夫) 또는 소인으로 지목하고, 자기의 동지들은 모두 청류 또는 군자라고 하니, 여기서 신구·노소의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신진개혁파와 선진수구파의 사이에는 노소·신구 사상의 충돌뿐 아니라 또한 경학·사장의 반목도 있게 되었으며, 은연중 당쟁적 기운을 조성하여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공격하고, 공격을 받은 자는 원한이 골수에까지 사무치어 드디어 모해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저들은 자기네의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성현을 법으로 삼아 인심을 바르게 하고,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며, 군자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하며, 군신 상하가 지성으로 서로 믿음으로써, 지치를 일으킬 수 있음을 항상 신조로 알고 요결로 알았었다. 그러나 이들이 정계에 나선 지 4년에 기묘사화로 좌절되기까지 주요한 치적을 들어보면, 소격서의 혁파, 현량과의 설시, 교화사업, 선유의 표창, 위훈의 삭제 등이었으며, 민생을 돌보는 경세의 시책은 보이지 않고, 소학과 향약의 보급을 통해 향민을 사림의 지도 아래 두려던 것마저도 중도에 좌절되고 말았던 것이다.

율곡은 정암의 지치주의의 운동이 좌절된 데 대하여, “오직 한 가지 애석한 것은 조광조가 출세한 것이 너무 일러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이 아직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같이 일하는 사람 중에는 충현(忠賢)도 많았으나 이름나기를 좋아하는 자도 섞이어서 의논하는 것이 너무 날카롭고 일하는 것도 점진적이지 않았으며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 기본을 삼지 않고 겉치레만을 앞세웠으니, 간사한 무리가 이를 갈며 기회를 만들어 틈을 엿보는 줄을 모르고 있다가, 신무문이 밤중에 열려 어진 사람들이 모두 한 그물에 걸리고 말았다. 이때부터 사기(士氣)가 몹시 상하고 국맥(國脈)이 끊어지게 되어, 뜻있는 사람들의 한탄이 더욱 심해졌다.”고 평하였다.

정암과 더불어 학문과 사상을 같이 하고, 또 함께 죄찬(罪竄)을 입은 지치주의 유학파의 학자들로는 김정, 김식, 김구, 기준, 김안국, 김정국 등이 있다. 그들 중 김안국·정국 형제만은 파직과 귀양에 그쳤고, 이후 학행에 힘쓰니 학도들이 모여들어 일세에 긍식하는 바가 되었다. 그리하여 함께 유림의 종장이 되었다.

한편 중종 때 조광조에 앞서 도학정치의 길을 새롭게 열었던 이로 류숭조(1452 ~1512)가 있었다. 중종은 즉위 후 연산시대의 모든 폐정을 혁신하였다. 먼저 학궁을 수리하고 다시 박사를 두며 경연을 개설하였다. 또 지난날 화를 입은 사람들을 신원하는 한편 문치에 전심하고 유학을 숭상하며 풍화를 진작하니, 사기(士氣)는 다시 소생하고 학자들도 차츰 흥기하였다. 그리하여 도학정치를 실현하려는 이들이 나타났다. 류숭조가 비로소 그 길을 열고, 조광조와 그의 동지들이 그 뒤를 이었다. 유숭조와 조광조는 전후하여 사림의 영수가 되어 열렬히 철인정치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대개 전대의 정치 및 사장의 학에 대한 반동에서 온 것이다.

/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26번째 이야기로,'서원과 향약'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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