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영의 희망편지] 희망차게 영화롭게
상태바
[김희영의 희망편지] 희망차게 영화롭게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09.05 14: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목포시민신문] 나는 스물세 살 때부터 자취를 시작했다. 집을 나와서 지낸 것은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부터였지만, 혼자 살기 시작한 시기는 대학교를 졸업하던 스물셋 그맘때였다. 주변 사람들은 혼자 사는 것이 무섭지 않냐는 물었지만, 나는 겁도 없었던지 딱히 그런 기분을 잘 모르겠다고 했다. 가끔 공포 영화를 혼자 보고 잠이 들 때나, 건물 복도에서 들려오는 뚜벅뚜벅 발소리를 제외하면 일상은 꽤 평탄했다. 그래서 외로움 따위를 잘 모르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나의 첫 자취방은 작은 고시원 방 한 칸이었다. 그때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서울에서 잠시 인터넷 라디오방송국 AD를 할 때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지옥철에 올라, 저녁 6시에 퇴근했다. 그때는 서울에 사는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나의 저녁은 오롯이 맥주 한 캔과 치킨 햄버거였다. 환기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고시원 방에서 물 냄새가 나는 빨래를 널어놓고 맥주를 홀짝였다. 그래도 별로 지친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공황장애 비슷한 증상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9호선을 타고 국회의사당역에서 내려 한참 걸어가야 직장이 있었는데, 출근길 인파 사이에 혼자 주저앉아 숨을 헉헉거렸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쉬기 어려워 한참 동안 앉아있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주변의 누구도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마음을 진정한 나는 사무실에 돌아와 울음으로 헐떡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왜 이렇게까지 불안해졌는지를, 왜 울음을 멈출 수 없었는지를. 나는 나의 방을 다시 돌아보았다. 맥주가 있어야만 잠이 들 수 있었던, 가족이나 친구도 없이 좁은 침대 위에서 웅크려 잠들어야만 했던, 오늘도 퇴근하면 가야만 하는 감옥 같은 그곳을. 나는 석 달 만에 다시 집으로 내려왔다. 서울에서 경험한 충격은, 몇 년 동안 서울살이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주었다. 그때야 깨달았다. 나는 외로움을 처절하게 느끼는 사람이라는 걸.

이후 지방에서 작은 원룸을 얻어 방송국 작가 생활을 이어갔다. 서울만큼 복잡하지도 않았고, 주변엔 그래도 몇몇 친구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딱히 이곳에 있다고 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도 않았다. 섭외와 원고 작성에 대한 스트레스로 밤 열 시를 꼬박 넘기고 나면, 집에 와서 쓰러져 자기에 바빴다. 드라마나 영화를 몰아서 보던 습관도 점점 없어졌다. 책 한 권 여유 있게 읽을 수 있는 시간조차 없었다. 주말에는 다른 지역 촬영을 따라다니느라 바빴고, 나는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그래도 서울에 살았을 때보다는 나았다. 빨래에 더는 물 냄새가 나지도 않았고, 환기도 원활히 잘 됐다. 그것으로도 충분한 방이었다.

나의 방이라는 건 사실상 특별한 의미도 없었다. 인테리어나 가구를 사서 꾸미는 것은 아주 큰 사치처럼 느껴졌다. 끼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그저 살아가는 것에만 급급한 나에게 좋은 집은 먼 꿈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도 마찬가지였다.

휴식을 취하는 것에 거창한 의미를 가질 필요가 없었다.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지고,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적어지고, 그렇게 천천히 혼자만의 세상을 만들어갔다. 그게 곧 휴식이고, 나만의 시간이었다. 때론 사람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피곤할 때가 있었으니까.

나의 방, 내 집이라는 것은 결국 내 마음이 편할 때 완성되는 것 같다. 세상살이가 여유 없이 굴러가더라도, 두 다리 뻗고 편히 잘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것도 휴식이 될 수 있었다. 외로움에 익숙해지는 것은 절대 슬픈 일이 아니다. 혼자만의 휴식을 제대로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