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제대로 알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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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제대로 알자 <1>
  • 정거배
  • 승인 2015.01.20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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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 역사에서 지혜를 배우다

▲ 정거배 <인터넷전남뉴스 기자,
진시황과 만리장성, <사면초가>의 유래, 사마천의 <사기>
                                  
우리는 종종 궁지에 몰린 상황을 가리켜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됐다고 말한다. 직역하면 사면이 초나라 노래 소리만 들린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면초가라는 사자성어가 유방과 항우가 천하를 놓고 마지막 패권을 다투던 당시에 유래된 뜻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 “중국 삼국지에서 나온 말 아니냐?”고 질문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기원전 221년 춘추시대를 거쳐 전국시대의 종지부를 찍고 천하를 통일한 인물은 바로 진나라의 왕 영정(?政)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시황이다. 그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어지러운 천하를 통일하고 자신의 호칭을 천자(天子)가 아닌 시황제(始皇帝), 즉 황제시대의 시작이라고 한 것이다.

지금의 중국을 영어로는 ‘China’라고 표기하는데 바로 진(秦)나라의 영어 표기 ‘Chin’에서 유래됐다. 시황제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다. 그가 통치하면서 전까지 각 나라별로 제각각이었던 각종 제도를 통일하고, 문자를 통일하고, 심지어 수레바퀴의 폭 등 도량형을 통일했다.
그가 동서로 6,500km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주장이다.
 
왜냐하면 춘추·전국시대에 각 나라들이 방어를 위해, 특히 북쪽 흉노족 등 오랑캐의 남진과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아 놓은 성벽들을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하나로 연결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했다. 없던 장성을 진시황이 쌓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가 중국여행을 가서 구경하는 만리장성(중국인들은 長城(창청)이라고 부른다)은 지금으로부터 700여 년 전 명나라 때 축조된 것이다.

△건달 <유방>과 명장 <항우>의 천하쟁패
영생불사와 영구집권을 꿈꿨던 진시황은 우리 나이 50살에 지방 순방 중에 죽고 아들이 그 뒤를 이었으나 천하는 어지러웠다. 가난한 농민출신인 진승과 오광은 유명한 말인 “왕과 제후 그리고 장수와 정승의 씨가 따로 있는가?(王侯將相寧有種乎)”라며 농민반란을 일으켰고, 그 와중에서 천하의 패권을 놓고 마지막으로 유방과 항우가 대결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 진나라는 채 15년을 못 버티고 기원전 206년 역사 무대에서 사라진다.

유방은 패현 출신의 건달 비슷한 사람이었던 반면 항우는 지금의 서주(당시 팽성이라고 불렀다)출신으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초나라를 칠 때 마지막까지 진나라에 저항한 장수의 손자로, 명문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전투에도 능했고 힘도 장사였다. 전쟁마다 연전연승을 거뒀다. 두 사람의 대결은 객관적인 조건과 전력 면에서 볼 때 천하는 항우가 잡는 듯 했다.

그러나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에서 명장 한신과 지략가 장량 등이 이끄는 유방의 군대는 항우와 마지막 승부를 결정짓는 전투를 하게 된다. 항우는 4년 전 진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자신을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고 부르게 하며 고향 서주로 금의환향(錦衣還鄕)까지 했었다.
 
△영화 <패왕별희>의 주인공 장국영
그런데 이제 상황이 역전돼 천하를 호령했던 초나라 출신의 명장 항우와 그의 군대는 유방의 군대에 포위됐다. 군량미는 바닥나고 군사들의 사기는 떨어진 어느 날 밤, 사방에서 퉁소소리와 함께 처량한 초(楚)나라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인생이 무엇이기에 부모처자 내버리고 고향 산천 등지고 죽을 땅을 헤매는가, 칼 가지고 덤벼들면 중한 목숨 이슬일세....”
초나라 출신이 대부분인 항우의 군사들은 포위된 것도 사기가 떨어진 마당에 자기나라 노래를 듣고 ‘우리 동료들이 유방 군대에 저렇게 많이 투항을 했구나’하며 전의를 상실하게 된다.

사면초가 전략은 '장막에 앉아서 천리 밖의 승부를 결정짓는' 지략가 장량의 작품이었다. 결국 유방 군대에 쫓겨 오강(嗚江)까지 탈출한 항우는 끝까지 자신과 함께 한 사랑하는 여인 우미인(우희虞姬)의 자살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고, 결국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는 유방보다 15살이나 젊은 30살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장국영이 주연한 경극을 주제로 한 영화 천 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覇王別姬 : ‘패왕 항우가 사랑하는 여인 우희와 작별하다‘는 뜻)가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해서 중국 역사상 두 번째 통일왕조가 탄생하게 되는데 바로 한(漢)나라다. 유방이 한나라를 세운 고조이다. 진나라는 너무 빨리 망했고 사실 한나라 때 나라의 골격과 체계가 잡혀지는 등 국가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래서 중국 글자를 한자(漢字) 또는 한어(漢語)라고 하고 주류 민족을 한족(漢族)이라고 부르게 됐다.

△중국 3천년 역사의 기록, 사마천의 <사기>
중국의 역사 기록은 잘 알려진 사기(史記)이며, 사면초가의 역사적 사건도 바로 이 역사책에 기록돼 있었다. 한나라 무제 때 역사를 기록한 사관이었던 사마천(BC145-90)은 삼황오제(三皇五帝)에 이어 요순시대부터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를 거처 한나라 무제에 이르는 중국 3천년의 역사를 대나무로 된 죽간에 52만6천500자로 정리하는 대업을 남겼다.

사기는 130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도 분량이지만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황제에 관한 기록 뿐 만 아니라 연대와 인물을 배열하는 연표와 국가 제도와 문물에 관해서도 기록해 놓았다. 또한 천재성을 갖고 있었던 사마천은 황제를 보필했던 제후에 관한 기록 뿐 만 아니라 깡패와 자객 등 온갖 부류의 인물들에 대해 기록했을 뿐 만 아니라 역사서 기록 체제상 ‘기전체의 효시’를 만들어 낸 인물이다.

▲ 중국 산시성 서안시 외곽에 있는 진시황릉을 지키는 병마용, 1974년 밭에서 우물을 파던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는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만 돼 있었다.

특히 전 세계가 주목했던 중국 산시성 시안시 린퉁구에 있는 병마용은 지난 1974년 밭에서 우물을 파던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됐다. 진시황릉과 병마용은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만 돼 있었을 뿐이었다. 진시황릉을 지키는 병마용이 발견되자 세계가 놀랐다. 사마천은 <사기>에 진시황릉에 대한 매우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역사기록 <사기>가 없었다면 전시황릉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병마용은 1979년 일반에 공개된 이후 기록을 세우고 있다. 중국측 통계에 근거한다면 1년 관람객 수는 300만 명에 이른다. 하루에 1만명 가까운 사람이 찾는다는 얘기다. 관람료 수입은 얼마나 될까? 한해 평균 4천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관광지 한 장소에서 우리나라 군 단위 자치단체 1년 예산규모를 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역사서 사기(史記)는 사상과 지혜의 근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 이후 많은 문학작품들도 사기를 인용하거나 근거로 창작되는 경우가 많다. ‘은혜와 원수는 대를 이어 갚는다’라는 중국 속담이 있다. 중국인들의 기질을 말해주는 대목인데 이것 역시 사기에 기록된 많은 역사적 사건에서 기원하고 있다.

△쉽게 믿지 않은 기질도 역사에서 기인
중국인들은 쉽게 사람에 대해 신뢰하지는 않아 작은 식당을 차려도 가족 또는 친척들을 데려와 함께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가족이 아니더라도 한번 신뢰하게 되면 가족이상으로 친밀한 관계가 형성된다. 그것이 흔히 말하는 관시(關係)문화이자 친구(朋友)라는 호칭이 바로 그것이다. 역사상 전란을 많이 겪어 온 중국인들의 기질이기도 하다.

서양 등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경우 국민들에게 미래 청사진을 제시하며 민심을 추스린다고 한다. 그러나 반대로 중국 지도자들은 국난 앞에서 과거 선조들의 사례를 들며 인민들의 지혜를 모으고 단합시킨다고 한다.

중국 역사상 가장 번영한 왕조가 바로 당나라 시대였다. 국토도 넓었지만 당시 로마와 오가는 실크로드의 깃점이자 당 왕조의 수도인 서안의 인구가 100만 명에 육박했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서안에는 신라와 일본 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3만 명 이상의 외국인들이 유학을 오거나 머무를 정도로 국제도시였었다. 신라에서 유학 간 최치원(崔致遠 857~?)도 당나라에서 외국인 관리시험에 합격해 그곳에서 지방관리까지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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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이 이끄는 오늘의 중국 역시 ‘대국굴기(大國?起)’, 제2의 대당제국 건설을 ‘중국의 꿈’이라고 말하고 있을 정도이다. 이처럼 중국인들은 역사의식 또한 투철하며 유구한 역사의 연장선에서 오늘날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한다는 점이 우리와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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