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제대로 알자<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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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제대로 알자<6>
  • 정거배 기자
  • 승인 2015.03.06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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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거 배 <인터넷전남뉴스 기자, www.ohmyjnews.com>

▲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20세기 중국현대사를 극명하게 상징하는 인물이다. 두 사람이 중국역사의 전면에 나서기 직전에는 사상적으로 엇비슷해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장제스가 마오쩌둥과 결코 질 수 없는 싸움에서 패배하고 타이완으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가 혁명정신을 배반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오늘의 중국을 보는 키워드 ‘대장정’
당초 마오쩌둥이 기획하지 않았다

▲ 정거배 기자
1840년 아편전쟁을 계기로 서구 제국주의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한 중국 대륙은 내부적으로는 청조의 봉건체제지속과 군벌들의 할거로 내외우환이 계속된다. 이런 가운데 1911년 쑨원(孫文) 등이 주도한 신해혁명이 일어난다. 신해혁명으로 청조의 황제체제가 무너지고 만주족의 변발이 사라지는 등 중국 역사상 가장 큰 변화를 맞게 된다. 그러나 신해혁명은 황제를 폐하고 이른바 민국(中華民國)시대를 열었지만 민주공화국 이념을 실현하지 못한 미완의 혁명에 그쳤다.

일본을 포함한 서구제국주의는 중국대륙을 끊임없이 잠식해 들어왔다.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는 전후 유럽 각국의 영토조정 등을 주요 의제로 한 파리평화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중국 산동반도를 점령하고 있었던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던 일본을 비롯 영국·프랑스·이탈리아·미국·중국 등 1차 대전 승전국들이 참석했다.

그러나 파리회의에서는 일본 등과 체결한 불평등한 21개조 폐지, 일본이 점령한 산동반도에 대한 주권 회복 등 중국이 요구한 것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중국은 1차 대전의 참전국이자 승전국이었지만 서구 제국들은 중국의 이런 위치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조선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
1919년 조선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3·1 독립운동이 벌어졌다면 2개월 뒤 중국에서는 5·4 운동이 일어났다. 5월 4일 베이징 대학생 3천여명은 천안문 광장에 집결해 무능한 중화민국 정부를 규탄하고 파리평화회의 결정에 반발해 궐기했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애국운동으로 기록된 5·4운동은 톈진(天津)·상하이(上海)·난징(南京)·우한(武漢)까지 확산됐다. 결국 중국 현대사에 있어서 큰 획을 그었던 이 운동은 2년 뒤 1921년 중국 공산당이 태동하는 모태가 된다.

세계사적으로 1919년은 러시아에서 레닌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자, 나라가 풍전등화에 놓인 중국의 지식인들은 러시아혁명에 주목했다. 중국 지식인들은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서양을 배워 서양을 물리치자’는 중체서용(中體西用)운동을 해 왔다. 그러나 1차 대전 이후 유럽을 휩쓸고 있는 대공황으로 인한 빈부격차와 노사대립의 현실을 보고 ‘서구 문명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깨닫게 된다. 서구사회를 배우려고 했던 중국지식인들은 혼란에 빠지게 됐고 결국 레닌이 주도한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지켜 본 중국 지식인들은 자연스럽게 마르크스주의를 선택하게 된다.  

무명의 애국청년 ‘마오쩌둥’
이런 가운데 천두슈를 비롯한 마오쩌둥(毛澤東) 등 13명은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열었다. 지금도 한국 관광객들이 상하이 여행코스 중의 하나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중국 공산당이 창당모임을 했던 유적지 ‘일대회지(一大會址)’가 있다. 중국 공산당은 그 뒤 프랑스 등 당국의 감시를 피해 가흥에서 2차 회의를 열어 ‘제국주의와 군벌타도’를 위한 원칙을 세웠다. 이 당시만 해도 초등학교 교사와 베이징대학 도서관 사서출신인 마오쩌둥은 무명의 애국청년일 뿐이었다. 중국 대학생들의 분위기는 어떠했을까? 1923년 베이징대학 학생 500여명을 대상으로 세계 최고 위인을 뽑는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을 이끈 레닌이 227표를 얻어 1위를 차지했고 2위는 미국의 윌슨대통령으로 51표에 그쳤다. 

배신한 장제스의 쿠데타와 대학살극
1924년 쑨원의 제안으로 성사된 국민당과 공산당은 합작을 통해 “열강을 물리치고 군벌을 제거하자”며 국민혁명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쑨원이 1925년 사망하고 중화민국의 제3대 대통령(총통)인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는 1927년 4월 난징(南京)에서 비밀지령을 내려 이른바 반혁명쿠데타를 일으킨다.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는 중국 공산당과 진보인사, 그리고 항의하던 시위군중에 대한 일방적인 학살극이었다. 대로변이건 골목이건 가릴 것 없이 학살이 이어졌다. 장제스의 군대는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총살시켰는가 하면 광장이나 대로에서 참수를 하고 허리를 동강내기까지 했다. 학살을 면했지만 붙잡힌 사람들은 상하이 인근 룽화의 육군감옥에서 처형됐다. 상하이 뿐 만 아니라 장제스의 학살극은 난징, 쑤저우, 우시, 항저우, 광저우 등으로 확산됐다. 학살의 명분은 국민당을 깨끗하게 한다는 청당(淸黨)이었다.

영국과 미국 등 서구 제국주의 세력과 결탁해 벌어진 쿠데타로 상하이 등지에서 공산당원 2만6천여명과 30만명의 군중이 살해되고 역사적인 제1차 국공합작이 깨지게 된다. 장제스는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대중적 민족주의에서 미국과 영국 제국주의와 연결된 매판자본과 대지주로 바꾼 것이다. 그는 쿠데타 이후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쑹메이링(宋美齡)과 결혼했다. 그는 이를 위해 본부인과 이혼하고 첩들을 쫓아냈다. 당시 이 결혼을 두고 중미합작이라고 했는데, 장제스가 중국 우파와 미국 자본이 결합했다는 뜻이다.

마오쩌둥, ‘무력은 어쩔 수 없는 선택’
장제스의 배신으로 대혁명에 실패한 중국 공산당은 이제 무력을 통한 새로운 혁명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당시 마오쩌둥은 ‘정권은 포탄으로 얻는다(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외국기자와 만나 “초등학교 교사였던 내가 총을 들고 전쟁을 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했다. 이제 중국공산당은 1927년 8월 난창봉기를 시작으로 국민당에 맞섰지만 중과부적으로 밀린다. 여기서 오늘의 중국을 이해하는 키워드인 대장정(大長征)의 역사가 등장한다.

1934년 10월 중국 남부의 장시성(江西省)에서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의 포위공격을 피해 368일 동안 1만2500km를 강행군해 섬서성(?西省) 북부 옌안(延安)까지 중국 공산당 홍군과 중화소비에트 중앙정부가 이동한 것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은 영국과 미국의 군사원조까지 받은 장제스의 국민당군에 맞서 끊임없는 포위와 추격을 뚫어야 했고 50개가 넘는 강과 협곡, 고산지대와 습지를 건넜다. 국민당의 장제스가 미국과 영국이 지원한 전투기를 타고 추격했다면 공산당은 맨발로 죽음의 탈주를 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처음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고 장시성에서 위두하를 건널 때 만 해도 대장정이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중국 공산당의 홍군은 8만6천여명에 달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나 종착지 옌안에 도착했을 때는 7천여명에 불과했고 그 중에서 처음 출발한 사람들은 3천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완주율이 4%에도 미치지 못하는 처참한 죽음의 행군이었다.

시진핑의 부친과 대장정 종착지
대장정 시작 당시인 1934년 10월 마오쩌둥은 중앙소비에트 공화국 집행위원회 주석으로 대외적으로는 국가를 대표하는 주석이었지만 아무런 실권이 없었던 정치적 왕따였다. 더구나 대장정은 마오쩌둥이 기획하거나 주도한 것도 아니었다. 대장정은 당시 코민테른에서 군사고문으로 파견된 오토 브라운(중국 이름 李德)이 발의하고 중국 공산당 최고 책임자인 보구(博古)가 코민테른의 비준을 받아 결정했었다. 보구는 모스크바 유학파 출신으로 당시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소련의 신임을 받은 27세의 청년이었다. 당시 소련은 중국 공산당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기에 모스크바 유학파들이 중국 공산당의 핵심이었다. 대장정 초반에는 실세 중의 한명은 훗날 마오쩌둥과 같은 1976년 같은 해 세상을 뜬 저우언라이(主恩來) 뿐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1934년 10월 장제스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주를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난 1935년 1월 귀주성(貴州省) 준의(遵義)에 도착해 회의를 열고 소련파와 브라운은 주도권을 마오쩌둥에게 넘긴다.

천신만고와 같은 대탈주가 끝나갈 무렵인 대장정 종착지에서 마오쩌둥을 맞이했던 인물은 지금의 중국을 이끌고 있는 시진핑 주석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勛)이었다.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은 섬서-간쑤성 지역의 혁명 1세대로 1927년 장제스가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탄압하자 이곳에서 국민당에 맞서 무장폭동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시중쉰은 이 일대 30개 현(우리로 말하면 군단위)에 혁명 근거지를 만드는데 류즈단과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그런 와중에 마오쩌둥의 홍군이 도착했다. 결국 마오쩌둥은 시중쉰이 닦아 놓은 터전에서 대장정을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1935년 10월 19일 마침내 대장정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오늘의 중국 공산당이 서구 제국들의 절대적인 군사지원을 받은 장제스 군대에 참담한 패배를 당하면서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는 대장정이란 고난의 역사를 경험했다는 점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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