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제대로 알자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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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제대로 알자 <7>
  • 정거배 기자
  • 승인 2015.03.13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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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의 천안문, 장제스를 대륙에서 몰아낸 마오쩌둥은 1949년 10월 1일 이곳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했다. 1934년 10월 장제스 국민당 군대의 포위 공격을 피해 필사의 탈출을 했던 중국 공산당은 14년 후 승리를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는 중국 공산당이 승리할 것이라고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21세기 현재, 개혁개방 30여년만에 중국이 이렇게 성장할 것이라고 예측했던 전문가들도 많지 않았다.

▲ 정거배 <인터넷전남뉴스 기자, www.ohmyjnews.com>
8년간 항일전쟁과 국-공내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마오쩌둥에 패한 장제스, ‘우리는 자멸했다’  
                

먼저 장제스의 이야기를 좀 더 한다면, 그와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과의 관계이다. 코민테른은 1919년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레닌이 제창해 만들었으며, 러시아 10월 혁명 성공 이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창당된 각국의 공산당들이 아직 미숙한 단계에 있어 이를 지원하고 지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따라서 쑨원의 주도로 1924년부터 1927년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 직전까지 계속된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간 합작기간에 국민당은 코민테른의 자금과 무기지원을 받았다. 국공합작으로 공산당원이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원에 입당할 수 있었다.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은 황푸군관학교를 중심으로 국민당 정부의 군대인 국부군을 육성했고, 총사령관을 맡은 장제스는 1926년부터 북벌전쟁을 벌여 지방군벌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코민테른의 최대 수혜자 장제스
이 당시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主恩來)도 국민당의 유능한 간부였다. 상하이 쿠데타가 일어나기 1년 전인 1926년 6월 마오쩌둥은 국민당 제6기 농민운동강습소 소장이었고 후난선 창사 등지에서 국민당 이름으로 농민운동을 조직하기도 했다. 특히 저우언라이는 텐진 난카이대학을 거쳐 일본 와세다·메이지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대학을 졸업하고 1924년 귀국했는데, 그는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던 황푸군관학교 정치부 주임으로 일할 정도로 장제스의 신임을 받은 핵심 간부였다. 장제스는 코민테른의 지원으로 황푸군관학교 졸업생들을 자기 세력으로 키운, 어떻게 보면 코민테른의 최대 수혜자였다.

그는 젊어서 자신의 일기에 “영국과 미국의 제국주의를 지독하게 증오했고 중국 매판자본에 대해서도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며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고 한다. 특히 황푸군관학교 교장시절 코민테른의 무기와 자금이 도착하자 한없이 감격하기도 했었다. 그랬던 장제스가 1927년 공산당과 위험한 동거를 끝내는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킨다. 쑨원의 신임을 받았던 장제스는 1925년 쑨원이 죽자 초기 북벌전쟁 승리로 권력에 눈길을 돌리면서 미국과 영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상하이 자본가들과 비밀협약을 맺어 자금지원을 받게 됐고 결국 공산당과의 결별을 선택한 것이다.

일본, 만주사변으로 동아시아 전쟁시작
이제 시계를 돌려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이 있기 전인 1931년 만주의 상황을 보자.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 뒤 만주에 괴뢰정권인 만주국을 세우고 육군주력 병력인 관동군사령부를 만들어 지배했다. 생체실험이란 만행을 저지른 731부대 역시 관동군사령부 소속이었다. 중국의 동북지방을 점령한 만주국은 본격적인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했는데, 1931년 중국과 전쟁을 명분을 만들기 위해 이른바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그해 9월 18일 일본은 만주철도 폭파사건인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을 조작해 중국과 전쟁을 시작해 1932년 3월까지 동북 3성인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전역을 점령하고 만주국을 세웠다. 그러자 국제연맹은 1933년 2월 일본군의 만주 철수를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만주사변은 1945년까지 계속된 중국과의 15년 전쟁의 시작이자 동아시아에서 세계 제2차 대전의 서막이었다. 이어 1937년 7월 7일 베이징 서쪽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과 중국군이 무력 충돌한 노구교 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에 일본은 베이징, 톈진 등 북부 주요도시들을 쉽게 점령해 버렸다.

일본군, 난징에서 30만명 학살
그러나 남쪽 상하이 전투에서 국민당군의 저항으로 2~3개월이나 전투가 장기화됐고 일본군은 어렵게 상하이를 점령한 뒤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南京)으로 곧바로 진격한다. 일본군이 밀고 들어오자 장제스의 국민당은 난징에서 충칭으로 철수하지만 남아있던 60만명에 달하는 난징시민들은 대학살극의 사냥감이 된다.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고 있던 6주 동안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했던 난징시민 60만명 중 30만명이 희생됐다. 난징에 들이닥친 일본군은 백기를 들며 항복한 중국군 포로 뿐만 아니라 젊은 남자들을 색출해 닥치는 대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일본군은 여자들을 '집단윤간', '선간후살'(先姦後殺, 먼저 강간한 다음에 죽임) 작전을 자행했다. 강간과 살육 대상은 어린이부터 60, 70대 노파까지 대상을 가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성당의 수녀들과 사찰의 비구니들까지 희생양이 됐다.

8년간 항일전쟁으로 3천500만명 희생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이른바 2차 국공합작은 일본군에 의해 폭사 당한 군벌 장쭤린(張作霖)의 아들이자 동북군 총사령관 장쉐량(張學良)이 주도한 1936년 12월 12일 시안사변을 계기로 이뤄진다. 대륙을 침략한 일본군보다는 공산당과 내전에만 주력하고 있던 장제스로 하여금 공산당과 합작을 통해 항일전쟁을 하게 한 것이다. 1937년 8월 장제스는 전면적인 대일 항전을 결의하면서부터 시작된 2차 국공합작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할 때까지 계속된다. 이 때 공산군의 홍군은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으로 편입돼 팔로군이라는 이름으로 대일항전에 나섰다. 1937년 시작돼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면서 끝난 8년간의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은 252만명이 사망하거나 체포됐다. 중국군인은 3천500만명이 사망했고 재산손실은 100억 달러에 달했다. 중국으로서는 역사상 가장 엄청난 희생이었다. 세계는 이제 항일전쟁에서 승리한 중국 대륙의 선택에 관심을 돌리고 있었다. 1945년 8월부터 국민당의 장제스와 공산당의 마오쩌둥은 충칭에서 직접 만나 그해 10월 10일 화평협정을 체결했는데, 양측은 내전을 피하고 연합정부 구성을 골자로 한 민주적인 건국방침을 확정했다.

장제스의 패배, 영국과 미국의 패배
그러나 장제스는 이같은 화평건국 강령을 파기하고 1946년 6월 내전을 일으켰다. 당시 국민당의 장제스는 대도시와 주요도로 등 전국토의 76%, 인구의 71%를 장악하고 있었고 병력면에서도 430만명으로, 홍군의 127만명에 비해 3배가량 우세했다. 거기에다가 미국과 영국이 지원한 공군력을 비롯한 무기와 장비도 월등했다. 객관적인 면에서 장제스의 국민당이 패배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중국인민해방군은 1949년 1월 베이징 입성에 이어 4월 23일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접수함으로써, 신해혁명이후 22년간 중국을 통치했던 혼돈의 중화민국시대를 마감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1일 초대 국가주석인 마오쩌둥은 베이징 텐안먼 성루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했다. 이는 1934년 10월 17일 장제스 군대의 포위 공격을 뚫고 중국 남부 장시성 위두현의 위두하를 건너면서 시작된 대장정의 종결을 의미했다. 이와함께 장제스의 국민당을 지원했던 영국과 미국의 패배였다.

1981년부터 1982년까지 중국 공산당 제3대 총서기를 지낸 후야오방(胡耀邦)은 대장정의 대열에서 함께했을 당시 18세, 1983년 6월부터 1988년 4월까지 제3대 국가주석을 지낸 리셴녠(李先念)은 25세, 그리고 1988년 4월부터 1993년 3월까지 제4대 국가주석이었던 양상쿤(楊尙昆)은 27세 청년이었다. 마오쩌둥의 주장대로 쑨원이 주도한 1911년 신해혁명이 구민주주의 혁명이라고 한다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은 신민주주의 혁명이었다. 마오쩌둥에 밀려 타이완으로 탈출한 장제스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공산당이 우리를 이긴 것은 그들의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부패하고 무능했기 때문이며 우리는 우리의 약점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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