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북한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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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북한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
  • 정거배 기자
  • 승인 2015.07.01 16: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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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 관계,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 1987년 중국을 방문한 북한의 김일성을 포옹하는 덩샤오핑.(출처: 중국 인터넷검색 사이트 바이두), 양국 관계는 일본과 항일전쟁과 국공내전 등 역사적으로 동지적 혈맹관계라고 볼 수 있다.

▲ 정 거 배 기자 <인터넷전남뉴스 기자, 중국 언어와 문화 전공>
중국의 근현대사는 일본과 영국, 미국, 독일 등 서구열강 제국주의와의 항전이었다. 중국은 1840년 영국과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기 직전까지 100여년 동안 수천만명이 외세와의 전쟁에서 희생된 뼈아픈 역사와 함께 승리의 자부심을 갖고 있다.

올해는 동족상잔의 6·25전쟁이 발발한 지 65주년이 되는 해다. 중국이 북한의 든든한 후견인 역할을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글에서는 북한과 중국 관계를 되짚어 봄으로써, 오늘의 북중관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그러면 우선 우리의 시각이 아닌 인민지원군을 파병했던 중국의 시각에서 6·25 전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가장 상징적인 내용을 먼저 소개한다.

지난 2010년 6월 25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인민지원군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돕다) 전쟁 60년 좌담회에서 당시 시진핑 국가 부주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당시 중국인민지원군의 6·25전쟁 참전은 “평화를 지키기 위한 위대한 전쟁이자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었다고 말했다.

시진핑,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
이처럼 중국정부의 6·25 전쟁을 보는 시각은 지금도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한국과는 상이하다. 그렇다면 왜 중국은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관점을 갖게 된 것일까?  1945년 일본과 독일의 패망이라는 2차 대전 종식 직후 마지막 장제스와 치른 국민당-공산당 내전 역시, 국민당에 무기를 지원하고 도운 것은 미국과 영국이었다. 따라서 중국은 장제스의 국민당군을 대륙에서 몰아내고 1949년 10월 정식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것은 제국주의와 맞서서 거둔 승리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그런데 1년도 지나지 않아 이웃한 한반도에서 남한과 북한이 전쟁을 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내전의 성격이었던 전쟁 상황이 미국의 개입으로 국제전 상황으로 확전됐다. 인천상륙 작전으로, 미국이 주도한 유엔군이 38선을 넘는 등 후퇴를 거듭한 북한은 중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풍전등화에 몰린 북한을 중국은 지원하게 된다.

6·25전쟁이 끝난 뒤 중국인민지원군은 북한에서 전후복구사업을 돕다가 1958년에 완전히 철수한다. 그 직후 북한 수상 김일성의 중국 방문에 맞춰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1958년 11월 22일자 사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보도한다.

“중국 인민은 북벌의 전화 속에서, 장정의 길에서, 항일의 간고한 세월 속에서, 장제스 통치를 뒤엎는 승리의 진군에서 조선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들이 중국인민과 공동 투쟁했으며, 자기 생명의 희생을 무릅쓰고 중국혁명과 중국인민의 해방 사업을 원조한 것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항일투쟁 공로로 조선족 자치주 승인
여기서 북벌전쟁은 중국 공산당이 1920년대부터 각 지역 군벌을 제거하는 전쟁 과정에서 조선인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의미이고, 장정은 1934년 10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중국 공산당의 홍군이 장제스의 국민당군에 쫓겨 1만2500km의 대장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 1945년부터 국민당군과 마지막 치른 전쟁에서도 조선인들의 지원을 받았다고 <인민일보> 사설은 강조하고 있다.

또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한반도가 점령당한 이후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은 상하이 임시정부를 비롯해 대부분 중국대륙에서 계속 이어졌다. 조선인 일부는 1921년 상하이에서 처음으로 중국공산당이 태동한 이후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게 되고 이를 통해 조선의 독립운동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았다. 마오쩌둥을 세계에 알린 <중국의 붉은 별>을 쓴 기자 에드가 스노의 부인 님 웨일즈는 <아리랑>이라는 책을 통해 중국 공산당에 입당해 활동하는 김산이라는 조선인을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지금의 중국 공산당은 1920년대 중국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군벌과 내전을 시작으로 해서 1937년부터 1945년까지 대륙을 침략한 일본제국주와 항일전쟁을 치르는 등 혁명기간  동안 조선인들이 공산당에 가입해 함께 투쟁한 역사를 갖고 있다.

특히 일본제국주와 전쟁기간에 이어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장제스의 국민당과 제2차 국공내전을 치르는 동안 중국 공산당은 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조선인들이 참전한 조선의용군 또는 항일연군의 역할이 컸다.
따라서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자마자, 중국정부는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첫 소수민족 자치주로 지린성(길림성)에 조선족 자치주를 허용할 정도였다.

연변일대 혁명열사 98%가 조선인
한 사례만 들어보면 1928년부터 1945년 9월까지 동북지방인 옌볜일대에서 희생돼 중국정부가 항일투쟁 열사로 공식 인정한 수는 모두 3천125명인데, 이중 조선인이 3천26명으로 98%에 육박할 정도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 중국대륙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벌인 조선사람은 많다.

특히 1945년 8월 일본제국주의 패전 이후 진행된 국공내전 기간에는 북한은 중국 공산당 후방기지로서 역할을 담당 했는데, 이는 중국 공산당으로 하여금 전략적 요충지인 길림성,요동성,흑룡강성 등 동북지방의 만주를 확보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버팀목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중국 공산당이 장제스의 국민당을 대륙에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는데 북한이 도와 준 역량은 실로 큰 것이었다.

따라서 북중 관계를 가리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순망치한脣亡齒寒)’라고 표현된다.

북한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로 정식 정부를 수립한데 이어 북중 양국은 1949년 10월 6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된다. 또 만주에서 항일무장 투쟁과 공산당이 이끄는 국민당과의 내전에 참전한 조선인 부대원들 대부분은 나중에 북한으로 귀국해 북한정권을 세우는데 참여하게 된다.
또 1950년 발발한 6·25전쟁에서 중국은 위기에 처한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인민지원군을 파병함으로써 혈맹 관계를 재확인하는 등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바로 이런 역사적인 연장선 가운데 위치해 있다.

북중, 호상원조 조약으로 혈맹 확인
즉 북한과 중국은 6·25전쟁 이전부터 공동의 항일투쟁과 공산주의 혁명 경험으로 인한 동지적 유대감을 갖고 있었고, 6·25전쟁을 통해 이 유대감은 ‘혈맹’으로 표현되는 정치군사적 동맹관계로 굳어진 것이다. 특히 중국의 6·25전쟁 참전은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다고 볼 수 있다. 북중 양국은 미국이라는 제국주의에 맞선 항전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김일성은 그해 11월, 중국을 방문해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고 미군의 융단폭격으로 초토화된 국토에 대한 복구건설 과정에서 중국의 원조를 요청했다. 뿐 만 아니라 중국은 그때까지 북한에 제공된 원조는 일체 무상으로 하고, 여기에 다시 북한경제 부흥을 위해서 자금을 원조하기로 했다.

북중 양국은 또 남한이 미국에 체결한 상호방위조약과 같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 간의 우호, 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을 1961년 정식 체결했다.

그해 7월 1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권대표 김일성과 중화인민공화국 전권대표 저우언라이(周恩來) 이름으로 서명된 이 조약은 ‘쌍방 중 어느 일방에 대한 어떠한 국가로부터의 침략이라도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모든 조치를 공동으로 취할 의무를 지니며, 일방이 무력 침공을 당함으로써 전쟁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에 체약 상대방은 모든 힘을 다하여 지체 없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에 이어 개혁·개방이라는 실용주의 노선을 채택한 덩샤오핑 시대 개막으로 양국 관계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됐다. 더구나 1980년대 말부터 중·조 관계는 소련 등 사회주의권 붕괴와 탈냉전이라는 대외적인 환경변화 영향으로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북한은 심각한 경제위기 속에 빠져들었고, 특히 1992년 8월 중국·한국과의 수교는 북중 관계에 결정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중 수교는 북한에게 있어서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임은 분명하지만,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북한은 중국과의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복원하고 지속시키는데 주력했다. 중국 역시 한중국교 수립 직후인 1992년 9월 9일 북한 건국 44주년을 맞이하여 중국 <인민일보>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북중 관계의 끈끈함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중조(중국·북한) 양국은 산수가 이웃하는 친숙한 이웃 국가이며, 중조 우의는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주은래)와 김일성 등의 노혁명가들에 의해 세워진 굳건한 기반 위에 있다.“

따라서 북중 양국은 세계 정세와 관계없는 혁명의 동지라는 틀 안에서 유지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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