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제대로 알려면 사기(史記)를 읽어야
상태바
중국을 제대로 알려면 사기(史記)를 읽어야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5.07.23 10: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사성어만 600개, 역사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통찰
▲ 지금으로부터 2,100년 전 천재적인 기질을 타고 난 역사가 사마천은 52만6,500자로 중국의 3천년 역사를 기록했다. 그는 죽음보다 더 치욕스럽다는 궁형을 받으면서까지 <사기>를 완성함으로써 훗날 인류의 위대한 유산을 남기게 됐다.

  

▲ 정 거 배 <인터넷전남뉴스 기자 · 중국언어와문화학 전공>

지금으로부터 2,100년 전 기록된 중국 역사책 ‘사기(史記)’을 소개하려고 한다. 사기는 사마천(司馬遷 BC145~BC85)이 중국 요순임금 시대인 삼황오제(三黃五帝)부터 유방이 세운 한나라의 무제 때까지 3천년의 역사를 다룬 정사(正史)이다. 사마천은 당시 ‘천하의 잊혀진 일들을 모조리 망라하고 그것을 비교 검토하여 성공과 실패, 흥기와 파괴의 이치를 고증하고 싶었다’며 사기 기록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는 사기를 기록할 당시 종이가 발명되기 전이었기에 대나무 등으로 만든 죽간과 목간에 52만6,500자, 이른바 130권의 압축파일로 중국 3천년 역사를 고증해 기록함으로써 중국 뿐 아니라 인류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사례로 <사기>에 기록돼 있지만 전설 속의 왕조로만 간주돼 왔던 은나라(기원전 1600년경~기원전 1046년경)는 19세기말 갑골문자가 중국 하남성 안양에서 유적인 은허로 발견됨으로써 역사적으로 실제 존재한 사실이 입증됐다.

또 중국 서안에 가면 진시황릉과 이를 지키는 병사들의 병마용이 있다. 그런데 이곳은 1974년 밭에서 우물을 파던 한 농부에 의해 병마용이 세상에 드러나기 전까지는 사마천 <사기>에 기록돼 있을 뿐이었다. 2천년 넘게 지하에 묻혀 있던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인 진나라의 거대한 존재가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중국 3천년 역사, 52만6,500자로 압축
 
또한 <사기>에는 중국의 역사만 기록돼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고조선의 멸망(BC108)의 역사에 관한 내용도 기록돼 있다.
특히 <사기>는 단순히 한 나라의 역사책이라는 차원을 넘어 인간과 세상을 보는 통찰력을 배울 수 있는 지식의 보물창고라는 점에서 그 가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30년 가까이 <사기>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김영수 선생은 “현명한 사람은 역사에서 배우고, 보통사람은 경험에서 배우고, 못난 사람은 경험에서조차 배우지 못한다”며 소설 <삼국지>보다는 <사기>의 열독을 역설하고 있다.
존재감이 갈수록 커지는 중국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이유는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또는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기 때문만은 아니다. 중국인들의 역사관과 기질, 생사관(生死觀)을 파악함으로써, 우리에게 기회인 부상하는 중국과의 대등하고 올바른 관계를 만들어 미래 동반자 관계를 정착시켰으면 한다.
메르스 영향으로 북적거렸던 중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뜸해진 서울 명동거리를 비롯해 텅빈 강원도 양양국제공항을 보면서 한국에 있어서 중국의 존재감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우리는 새삼 실감하고 있다.

사마천, 죽음보다 치욕스런 궁형 당해 
   
역사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꿰뚫은 <사기>가 탄생하기까지는 바닷물을 길러 소금을 정제하는 작업이었다. 사마천의 아버지인 사상가 사마담도 한나라 때 궁중에서 천문과 역법을 관장하는 태사령이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다. 지금 우리로 말하자면 국립도서관장이자 국가기록물 보관소장이었다. 아버지 사마담은 사마천이 10살이 되자 본격적으로 역사관련 공부를 시키기 시작해 20살이 되자 나라 각지를 여행하면서 역사의 현장을 직접 확인하도록 했다.

사마천이 36살 되던 해 아버지 사마담은 세상을 뜨면서 미완의 역사서를 완성하도록 아들에게 유언으로 남겼다. 아버지에 이어 태사령의 직책을 물려받은 사마천은 그러나 인생의 절박한 위기를 맞게 된다. 47살 때 그는 한나라 무제의 노여움을 사 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다른 아닌 흉노족을 정벌하러 나섰던 이릉장군이 수적인 열세로 흉노족의 포로로 잡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사마천은 이릉을 변호하고 나섰다. 그런데 나중에 포로가 된 이릉장군이 흉노족 진영에서 군사훈련을 시키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황제의 귀에 들어왔고 그러자 황제는 남아 있는 이릉장군의 노모를 비롯 가족들을 역적죄로 몰살시키기에 이른다.

또 옥에 갇혀 있던 사마천에게도 사형선고가 내려진다. 역사책을 완성해야 하는 사마천은 이제 죽음 앞에 결단을 해야 했다. 당시 사형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은 돈을 지불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성기를 잘라내는 궁형을 택하는 것이었다. 사마천은 결국 죽음보다 더 치욕스럽다는 궁형을 택했다. 그래서 지금도 남아있는 사마천의 그림에는 수염이 그려져 있지 않다. 당시 궁형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수술기법이나 마취기술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리 고환과 성기를 줄로 묶어 신경을 죽이는 방법이었다. 시간이 흘러 신경이 죽으면 성기와 고환을 한꺼번에 잘라 내고 거위 털로 꽂아 요도를 확보하고 시간이 지나 소변이 나오면 기적적으로 살아남는 것이요 소변이 나오지 않으면 요독증으로 죽는 것이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다행스럽게도 사마천은 살았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을 택하다

그는 당시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제가 굴복하여 죽임을 당한다 해도 아홉 마리 소에서 털 오라기 하나(구우일모 九牛一毛) 없어지는 것과 같고,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하등 다를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세상은 절개를 위해 죽은 사람처럼 취급하기는커녕 죄가 너무 커서 어쩔 수 없이 죽었다고 여길 것입니다.
.........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습니다.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고유일사人固有一死, 혹중우태산或重于泰山, 혹경우홍모或輕于鴻毛, 용지소추이야用之所趨異也)“

이처럼 사마천은 역사책을 완성해야 한다고 결단하고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을 위해 치욕스러운 궁형을 선택함으로써 스스로 생사관을 정립시키고 처절한 고통과 지독한 고독의 터널을 통과했다. 중국 5천년 역사 중에서 60% 해당하는 3천년의 역사를 생생한 현장 고증을 통해 52만6,500자로 된 <사기>는 이런 탄생 사연을 갖고 있다.

특히 사마천은 완성시킨 <사기>가 황제를 비롯한 당시 권력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 폐기될까 두려워 2부를 만들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 50년 뒤에 세상에 공개됐다. 2천100년이 지난 위대한 역사책은 현재를 사는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쳤기에 더욱 소중한 것이다.  
춘추시대 제나라의 재상이자 ‘관포지교’의 주인공 관중은 제나라를 경제활성화 정책추진과 함께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데 핵심역할을 해냈다.  관중은 경제가 개인의 삶을 결정하고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한다며 “창고가 넉넉해야 예절을 알고 먹고 입는 것이 족해야 영예와 치욕을 안다”고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돼 있다.

태산과 바다가 높고 깊은 이유

기원전 221년 그동안 500년 넘게 어지러웠던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천하를 평정함으로써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웠던 진나라에는 이사(李斯)라는 유명한 재상이 있었다.    

그는 원래 대륙의 남동쪽 초나라 사람이었다. 진시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각종 정책들을 입안하고 시행했던 주인공이었지만 그도 역시 본국 초나라로 추방될 위기가 닥쳤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기 전 진나라에서는 정(鄭)나라 사람이 주도한 역모사건을 계기로 축객령(逐客令)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외국출신 관리들에 대한 추방령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승상 이사는 진시황에게 유명한 간축객서를 써서 보낸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이 편지의 내용을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다.

“태산이 높은 이유는 한 줌의 작은 흙이라도 사양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강과 바다가 깊은 것은 작은 물줄기라도 가려서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泰山不辭土壤 故能成其大(태산불사토양 고 능성기대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하해불택세류 고능취기심)”

이른바 개방적인 인재정책을 거듭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작은 부족국가에서 시작해 강대국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중국 역사상 첫 통일제국을 세운 진나라의 비결 중 하나는 국적과 신분, 민족, 나이를 불문하고 유능한 인재를 불러 모았던 정책이 밑바탕이 됐다.

사마천이 기록한 130권의 <사기>는 요순시대로 부르는 삼황오제부터 시작해 한나라 제5대 황제 무제에 이르는 3천년 역사를 압축시키며 600개 이르는 유명한 사자성어를 인류에 선사했다.

전체 <사기>는 제왕들의 흥망성쇠와 제왕만큼 그 시대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들을 기록해 놓은 <본기>12권, 공자를 포함해 제후들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세가> 30권, 인류 역사기록상 연도와 사건을 표로 엑셀프로그램처럼 정리한 표 10권 , 그리고 자객과 점쟁이,백정, 조폭 등 보통사람들의 행적을 기록한 <열전> 70권, 국가 제도와 문물, 제사 등을 기록해 놓은 <서> 8권이다.

또 마지막 130번째에는 사마천의 자서전인 내용으로, <사기>를 기록하게 된 동기와 취지 그리고 129편 전체 내용의 핵심과 개략적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