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고조 유방, 건달이 황제가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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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고조 유방, 건달이 황제가 되기까지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5.08.04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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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들 조언을 수용, 인재활용 잘하는 ‘진화하는 리더십’

▲ 기원전 206년부터 5년간 치러진 초한쟁패라는 전쟁의 두 주인공 유방과 항우. 초나라 무장출신의 가문은 이어온 항우는 객관적으로 유방군대를 압도했고 연전연승을 했다. 그러나 퇴보하는 리더십의 소유자로서 한계를 드러내면서 결국 유방에게 제압당하고 패배했다.

▲ 정 거 배 <인터넷전남뉴스 기자 · 중국언어와 문화학 전공>
중국을 제대로 알자<25>

원래 작은 부족국가에 지나지 않았던 진나라는 기원전 221년에 그간 550년 동안 지속된 어지러운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천하를 통일했다. 그러나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 진나라는 15년을 못 버티고 무너진다. 강력한 제국이었던 진나라는 진시황이 죽은 뒤 기원전 209년 하층민 진승(진섭)과 오광이 주도한 농민봉기로 흔들리기 시작하다가 결국 기원전 206년 유방과 항우군에 의해 수도 함양성이 함락되면서 붕괴된다.

그리고 다시 유방과 항우는 4년 간의 쟁패 끝에 유방의 최종 승리로 결론이 나고 중국 역사상 두 번째 통일왕조인 한나라가 건국된다. 유방 고조가 세운 한(漢)나라는 서기 220년까지 400년 넘게 존속된 대제국으로, 첫 통일제국 진나라는 오래가지 못하고 사라진 반면에 한나라 때 비로소 국가로서의 골격이 갖춰진다.

유방과 항우, 인재관이 달랐다

우리가 두는 장기에서도 초한전쟁으로 더 알려진 유방과 항우의 승부를 두고 그동안 다양한 평가와 분석이 계속돼 왔다. 건달 출신에다가 전력 면에서도 열세였던 유방이 어떻게 항우를 제압할 수 있었느냐였다. 그러면 사마천이 기록한 역사서 <사기>를 통해 이들 두 인물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나라 개국 황제 유방(劉邦 BC247~BC195)은 어릴 때부터 특이한 데가 많아 아버지가 비범하다고 생각해 방(邦)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방은 자라면서 동네 주막집에서 외상술에다가 주색잡기에 빠져 농사일도 열심히 않고 빈둥거리며 생활했다. 그래서 결혼한 그의 형 부부도 한집에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아 아버지가 결국 분가해 살게 했다. 유방이 스무살 됐을 때 참지 못한 아버지는 질책도 했지만 우이독경이었다. 건달 친구들과 함께 몰려다니며 형집에 찾아가면 끼니를 챙겨주는 형수가 구박을 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유방이 또 친구들과 함께 끼니 때 형집에 갔는데, 형수는 일부러 부엌에서 주걱으로 솥을 긁는 소리를 요란하게 냈다. 솥 안에 이미 밥이 없다는 표시였다. 그 소리를 들은 유방은 데리고 왔던 친구들을 돌려보내고 나서 돌아와 부엌에 들어가 보니 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유방은 그제야 형수가 자신을 속인 줄 깨닫고 자극을 받아 그 뒤부터 형 집에 찾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진시황은 재임 11년 동안 총 5차례나 전국을 순시했는데, 암살이 두려워 5기의 마차를 동원했고 기록에 따르면 한번 행차 때마다 궁중관리와 호위병 등 10만 명이 동원됐다고 한다.

유방과 대결하게 될 항우는 초나라 장수 가문 출신으로 용맹하고 전술에도 뛰어나 나중에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멸망시킬 때 연전연승을 했다. 한때 유방은 나이가 24살이나 적은 항우 휘하에 있기도 했었다.
아직 진시황이 살아있고 진나라가 건재하던 기원전 210년 유방은 47세였고 항우는 23세였다. 이들은 운몽-구외산-회계산-낭야-지부 코스의 진시황의 5차 지방순시 행렬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는데, 함께 동시에 본 것은 아니지만 그 웅장하고 위엄있는 행차를 본 두 사람의 평가는 판이했다.

항우, 현상 집착형 리더십의 한계

<사기>에는 항우는 “저 자리를 내가 반드시 차지하고 말겠다”라고 마음 먹었고, 유방은 “사내  대장부라면 마땅히 저 정도는 돼야지”라고 말했다고 기록돼 있다.

<사기>연구가 김영수 선생은 바로 이 지점부터 유방과 항우의 리더십은 구별되고 중요한 시사점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나중에 두 사람이 마지막 대결에서 결국 항우가 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여기에 두고 있다.

항우는 진나라가 자신의 조국 초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원한에 사로잡혀 그 자리에만 집착하는 ‘현상 집착형 리더’라고 평가했다. 반면에 유방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현상 인정형 리더’라고 말한다. 김영수 선생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느냐 못하느냐는 어떤 상황 앞에서 문제를 해결할 때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결국 현상 집착형 리더는 자연스럽게 현상 부정형 리더가 돼서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항우가 마지막 해하전투에서 패하고 유방 군대에 포위돼 오강 근처에서 자결할 때도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상은 세상을 덮을 만하지만‘ 이라며 力拔山氣蓋世(역발산기개세)로 시작되는 그의 시에서도 “내가 싸움을 못해서 진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나를 돕지 않아서 진 것”이라고 원망했다. 
항우는 그러나 호방하고 시원스러운 면도 있었을 뿐 아니라 솔선수범하고 다친 부하의 상처를 입으로 빨아줄 정도로 자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유방과 초한전쟁 과정에서 부하들에게 벼슬을 주는 논공행상에 있어서는 인색했다. <사기>에 따르면 항우는 부하에게 줄 도장 모서리가 닳아버릴 때까지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릴 정도였다고 기록돼 있다. 또 의심이 많아 인재를 활용하는데 인색했고 자신의 책사이자 지략가인 범증(范增, ? ~ 기원전 204년)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

유방은 연전연패하며 항우군에 쫓겨 다닐 때 말이 빨리 달리지 못하자 마차에 함께 타고 있던 자신의 아들과 딸을 수레 밖으로 내던질 정도로 잔인한 면도 있었다.

유방이 황제 자리에 오른 뒤 어느날 유생인 육가라는 사람이 시경과 상서 등 유가경전을 공부할 것을 권했다. 그러자 “내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거늘 한가롭게 시경이나 상서 따위를 논한단 말인가?”라고 화를 낼 정도였다. 평소에도 유생들과 대화하다가 화를 내거나 욕지거리를 하는 것은 유방의 스타일이었다.

이에 대해 육가는 “폐하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지만 말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고 반박하며 황제를 설득하자 수그러들었다고 한다. 아랫사람의 지적을 수용하는 것은 그의 장점이었다,

유방은 한나라 개국 공신들과 자리에서 “여러 장수들과 제후는 숨기지 말고 솔직히 말해보시오. 내가 천하를 얻은 것은 무엇 때문이며, 항우가 천하를 잃은 것은 무엇 때문이오?”

이 사건은 중국 역사상 황제가 자신의 역할에 대해 분석하는 사례로 꼽힌다.

유방과 같은 고향 패현 출신인 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이 먼저 말했다. “폐하는 오만하여 사람을 업신여기고 항우는 인자하여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압니다. 그러나 폐하는 점령한 곳을 나눠주며 천하와 더불어 이익을 함께 하셨습니다. 반면에 항우는 재능있는 자를 시기하고 공을 세운 자에 그 공을 돌리지 않고 땅을 얻어도 이익을 나눠주지 않았습니다. 항우가 천하를 잃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 말을 정리하면 유방은 논공행상을 잘했다는 것이다.

한나라 건국의 영웅, 장량·소하·한신

이에 대해 유방은 자신이 천하를 통일한 이유를 나름대로 분석해서 밝혔다. 유명한 3불여(三不如)로 이는 ‘내가 이 사람들보다 못하다’는 뜻이다.

“공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군영에서 계략을 짜내 천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일은 내가 장량(張良)보다 못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달래며 양식을 공급하고 운송로가 끊어지기 않게 하는 일이야 내가 소하(蕭何)만 못하고, 백만 대군을 이끌고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하는 일에서는 내가 한신(韓信)보다 나을 수 없지. 내가 이 세 사람을 기용했기 때문에 천하를 얻은 것이오. 그러나 항우는 범증(范增) 한 사람도 끝까지 믿지 못했기에 나한테 잡힌 것이요.”

이처럼 유방은 인재를 중시하고 그들을 기용했기 때문에 승리했다고 진단했다.

“인재는 데려다 쓰는 존재가 아니라 모셔 와서 그의 말에 따르는 것”이라는 유방의 인재관을 말해준다. 배수진의 고사성어 주인공 한신도 원래는 항우 휘하에 있었다가 자신을 중용하지 않자 유방진영으로 넘어온 장수였다. 그러나 한신은 나중에 한나라 건국 이후 역모죄로 주살당한 비운의 장수가 됐다. 춘추시대 월나라 문종(文種)에 이어 중국역사상 두 번째로 고사성어인 토사구팽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사기> 기록에 따르면 유방은 항우와 전쟁을 치르면서 적어도 다섯차례 이상 위기를 맞았지만 그때마다 참모들의 의견을 수용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술 좋아하고 여자 좋아했던 건달 유방이었지만 7년 간 전쟁을 치르면서 상황분석 능력을 익히고 대세의 흐름을 잘 파악했다. 특히 그는 주변의 조언을 잘 수용하는 등 진화하는 리더십을 통해 천하를 통일하고 황제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재를 얻느냐 못얻느냐에 따라 나라의 흥망성쇠가 결정되던 시대가 바로 춘추전국시대였다. 연나라 곽외선생은 소왕에게 인재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조언했다.

‘제왕은 인재를 스승으로 대하고, 패주는 인재를 신하로 대하며, 망국의 임금은 인재를 노예로 대한다’<계속></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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