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동주의 주인공들, '대하드라마'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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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동주의 주인공들, '대하드라마'를 만들다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5.08.11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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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드러난 중국인들의 기질·사고방식
▲ 한국인 중국 패키지여행의 필수 코스 중의 하나인 동양의 베니스 쑤저우. 장수성(江蘇省)의 쑤저우(소주,蘇州)는 오(吳)나라의 수도였으며 그 뒤 수(隋)나라 때 월나라 땅이었던 저장성(折江省) 항저우(항주,抗州)와 베이징을 연결하는 경항(京抗) 대운하가 개통되자 강남지방에서 생산되는 쌀의 집산지로 도약했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쑤저우,항저우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는 성어를 만들어 냈다.

▲ 정 거 배 <인터넷전남뉴스 기자 · 중국언어와 문화학 전공>
중국역사를 보는 것은 중국인들의 기질과 사유세계를 엿보는 것이다. 춘추라는 명칭은 원래 공자가 수정하고 편집했다는 지금의 산동성 근처에 있었던 노나라의 역사서 <춘추>에 근거했다. 삼황오제 시대, 하나라와 은나라(상나라)를 거쳐 주나라가 건국됐다. 중국 역사상 879년이라는 가장 오래 유지됐던 왕조가 주나라이다. 주나라 말기인 기원전 770년부터 춘추시대라고 부른다. 이어 전국시대란 위나라, 조나라 등이 분열돼 건국되는 기원전 403년부터 진나라가 나머지 6국을 제압하고 천하를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를 말한다. 이를 모두 합친 550년 간 시기를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른다. 특히 춘추시대 가장 두각을 나타낸 나라들이 바로 노(魯), 제(齊), 진(晉), 진(秦), 초(楚), 송(宋), 정(鄭), 오(吳), 월(越)나라를 들 수 있다.

오월동주, 굴묘편시, 와신상담, 토사구팽의 고사를 만들어낸 오나라와 월나라 간 공방전은 중국 춘추시대 중 가장 드라마틱한 역사기록을 남겼다. 따라서 분량 상 한차례로 모두 할 수 없기에 두 차례에 걸쳐 오나라와 월나라 간 승패의 역사를 소개하려고 한다.

생선요리에 칼을 숨기다

오(吳)나라는 한국인들의 여행지로 잘 알려진 장수성 쑤저우(소주,蘇州)를 도읍으로 해 세운 나라로, 그 시대 합려왕과 부차왕 때 월나라와 접전을 벌이면서 기원전 473년에 멸망했다. 오나라에는 유명한 인물로 바로 옆 초나라에서 피신 해 온 풍운아이자 복수의 화신으로 이름난 오자서가 있었다.

상대인 월(越)나라는 마찬가지로 한국인들의 관광코스로 유명한 저장성의 항저우(항주,抗州)와 가까운 회계(會稽)일대 소흥(紹興)에 도읍을 두고 있었으며 구천왕 때 오나라를 제압해 복수를 했다. 구천왕을 도운 유명한 재상으로 범려와 그의 친구 문종이 있었고, 월나라는 나중에 기원전 306년 초(楚)나라에게 멸망했다.

초나라에서 망명해 온 오나라의 오자서는 기원전 515년 당시 오나라의 요왕을 전제(專諸)라는 협객을 동원해 제거한 뒤 공자 광이라는 인물을 새 왕으로 세우는데 핵심역할을 했는데, 오나라의 새 왕이 바로 오나라의 합려(闔閭)왕이다.

오나라 왕 요가 연회에 참석했을 때 요리사로 위장한 협객 전제는 왕에게 생선음식을 올리기 위해 규정대로 호위병들에게 몸수색을 당한 뒤 무릎으로 기어서 요왕에게 접근한다. 그는 생선구이 요리를 요왕에게 올리는 척 하다가 고기 뱃속에 숨겨 둔 비수로 요왕을 살해하고 자신도 현장에서 호위병들에게 살해당한다. 유명한 사자성어 어복장검(魚腹藏劍)으로, ‘때를 놓치면 기회는 오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광 합려를 오나라 왕으로 앉힌 오자서는 원래 초나라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초나라 평왕 때 태자의 스승인 태부라는 고위직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궁중 안에서 모함으로 아버지와 형은 평왕에게 살해 당하고 오자서만 간신히 초나라를 탈출해 송나라, 정나라를 거쳐 천신만고 끝에 오나라로 들어왔다. 그래서 그는 부친과 형을 죽인 초나라에 대해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초 평왕 시체에 300번 채찍질

오나라는 왕 합려가 즉위한 뒤 10년 가까이 끊임없이 초나라를 공격해 드디어 기원전 506년 초나라 도읍 영(江陵, 지금의 후베이성에 속함)을 점령하게 된다. 초나라는 오자서의 복수의 대상이었던 평왕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소왕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오나라 군대가 밀고 들어오자 도읍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다.

이에 오나라 군대와 함께 초나라 도읍에 들어온 오자서는 죽은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꺼내 300번이나 채찍질함으로써 아버지와 형을 죽인 원한을 갚았다. 이 사건을 유명한 사자성어 굴묘편시(掘墓鞭屍)이다. 이 소식을 듣고 초나라 오자서의 친구 신포서(申包胥)가 “복수방법은 지나친 게 아닌가…”라고 질책하자, 오자서는 “해는 지고 갈 길이 멀어 어쩔 수 없이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말을 친구 신포서에게 전했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사자성어가 ‘해는 지고 갈 길이 멀다’는 뜻의 일모도원(日暮途遠)으로, ‘나이는 들었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오나라 군대에 수도가 점령당했던 초나라는 나중에 진(秦)라의 지원군을 받아 오나라 군을 국경 밖으로 밀어내고 국권을 회복했다.

초나라를 상대로 본때를 보였던 오나라는 당시 약소국이었던 월나라를 공격했다가 패한다. 기원전 496년 오나라 왕 합려는 월나라 왕 윤상이 죽은 틈을 타서 이른바 국상 기간에 공격한다. 그러자 갓 즉위한 월왕 구천은 전투력의 열세를 뒤집기 위해 사형수 30명을 결사대로 선봉에 내세워 침략한 오나라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스스로 목을 베어 죽는 섬뜩한 행동을 연출하게 했다. 기가 질린 오나라 군대가 혼란에 빠졌고 이 틈을 타서 월나라 군대가 기습을 해 승리하게 된다. 전쟁 과정에서 오나라 왕 합려는 손가락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해, 그 상처가 도져서 결국 전쟁 중에 죽고 만다. 그는 숨을 거두기 전에 아들 부차에게 “월나라를 잊지 마라!”라는 유언을 남긴다.

월왕 구천, 오왕의 신하가 되다

오나라 왕 부차는 죽은 아버지 당부대로 오자서를 숙부처럼 대우하기는 했지만 역시 초나라에게 망명해 온 백비라는 인물을 더 중시하면서 궁중 분위기가 바뀌고 있었다.

상대인 월나라에서는 범려와 문종이라는 걸출한 책략가가 왕 구천을 도와 국정을 운영하고 있었다. 월나라는 구천의 아버지 윤상 왕 때부터 오나라의 합려와 싸우면서 오월 두 나라는 원수처럼 됐다. 또 상대인 오나라 역시 왕 부차는 월나라와 전쟁 중 부상으로 사망한 부친 합려의 유언대로 월나라를 원수처럼 여기고 복수의 칼을 갈았다. 오나라 부차는 특이하게 사람을 뽑아 자신이 다니는 문 앞에 세워 놓고 자기를 볼 때마다 “부차, 너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 월나라를 잊었느냐?”라며 큰 소리로 외치게 하는 등 복수를 잊지 않도록 했다.

3년이 흐른 기원전 494년, 상대 월나라에서는 왕 구천이 오나라를 기습하기 위해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자 책략가 범려는 왕 구천에게 섣부르게 전쟁을 시작해서는 안된다며 막아섰지만 결국 오나라를 공격했다. 범려의 충고를 듣지 않았던 월왕 구천은 되레 오나라 군대에 쫓겨 월나라 수도 소흥의 회계산으로 도망갔지만 포위당했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지략가인 범려와 문종은 왕 구천에게 위기 타계대책을 제시했다. 그들은 구천에게 “예물을 준비해 포위하고 있는 오나라 왕 부차에게 보내고, 만약 그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스스로 왕이 오나라의 인질이 되어 섬길 것”을 제안했다.

월왕 구천의 입장에서는 원수 오나라 왕 부차를 섬기라는 범려의 제안은 치욕적이었지만 살아남아 다음날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월왕 구천은 책사 문종을 오왕 부차에게 보내 강화를 요청했는데, 그때 문종은 무릎을 꿇고 기어서 부차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강화를 애걸했다고 한다.

당시 오나라 내부에서는 오자서를 주축으로 한 주전파와 오자서의 라이벌 백비를 중심으로 강화파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오왕 부차는 격렬한 논쟁 끝에 오자서 등 주전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전쟁을 계속 이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오왕 부차는 부친의 충신이었던 오자서에 대한 불신감이 깊어지기 시작했고, 오자서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달변가이자 임기응변과 술수가 좋은 백비에게 무게중심이 가고 있었다. 

적을 이용해 적을 제압하다
   
한편 오왕 부차가 강화를 거부했다는 소식을 접한 월나라의 범려와 문종은 왕 구천과 상의한 끝에 전술을 달리하기로 했다. 오나라 내부에서 오자서와 백비가 대립각을 세우고 있고 왕 부차는 백비를 더 신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월나라는 오자서 제거작전에 착수한다. 첩자를 이용해 적을 제압하는 이른바 반간계(反間計) 작전이다.

월나라 책략가 문종은 백옥 20쌍, 황금 천냥, 그리고 8명의 미녀를 대동하고 야밤에 적군 오나라 진영으로 가서 백비를 만났다. 백비에게 월왕 구천 등을 인질로 데려가는 것을 골자로 한 휴전안을 왕 부차에게 적극 권하도록 작업을 했다. 다음날부터 당연히 오자서의 완강한 반대가 있었다. 오자서는 “하늘이 주신 기회를 받지 않고 버리면 그 화가 반대로 자기 자신에게 미친다”며 강력하게 강화를 반대했다.

오자서 주장에 맞서 백비는 “월왕이 오나라의 신하가 되어 대왕을 모시겠다고 자청하니 이미 선왕의 원수도 갚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오자서는 당초 아버지와 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초나라를 정벌했는데, 그때는 왜 초나라를 멸망시키지 않고 화친했습니까?”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오왕 부차는 백비의 주장을 수용하고 오자서를 내치기로 했다. 오나라 군대는 결국 포위하고 있었던 회계산에서 철수하고 대신에 월나라 왕 구천과 범려는 인질로 잡혀 오나라로 갔다. 이때 문종은 월나라에 남아 전쟁에 패한 나라를 챙길 수 있도록 했는데 구천과 범려는 3년 동안 오나라 왕의 말을 키우는 천한 일을 했다. 기원전 491년 월왕 구천과 범려는 오나라에서 어렵게 풀려나 귀국하게 된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에서 인질로 있으면서 병이 난 왕 부차의 똥을 직접 손가락으로 찍어 맛보기 까지 하면서 의심을 풀었다는 설화도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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