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吳)는 월(越)나라에 어떻게 멸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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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吳)는 월(越)나라에 어떻게 멸망했을까?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5.08.17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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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략 앞세운 월 구천왕의 와신상담, 중국인들의 복수심 엿보여

▲ 지난 2007년 개봉된 영화 <색,계>는 대만 출신 리안감독이 장아이링(1920~1995)의 동명 소설<色,戒>를 토대로 제작했다. 탕웨이와 량차오웨이가 주연으로 나오며, 1942년 일본이 점령한 상하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 친일파 딩모춘을 제거하기 위해 미인계로 접근한다. 결국 실패해 동료들과 함께 총살당하면서 비극적으로 끝난다. 원작자 장아이링이 당시 겪었던 자전적 경험이 영화 속에 담겨있기도 하다.

▲ 정 거 배 <인터넷전남뉴스 기자 · 중국언어와 문화학 전공>
중국을 제대로 알자<27>

월나라는 왕 구천은 상대방 오나라에서 3년 간 인질로 있으면서 부차 왕의 마굿간 지기를 하는 등 치욕을 당했기에 오나라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는 것은 당연했다.

천신만고 끝에 월나라로 귀국한 왕 구천은 치욕을 갚기 위해 절치부심(切齒腐心)했는데, 그는 매일 쓰디쓴 쓸개를 혀로 핥고 장작더미에 누워 고통을 참으며 복수의 칼을 갈았다. 바로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유명한 고사성어를 만들어 냈다. 이 속뜻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고통과 치욕도 참는다’는 의미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장작 더미위에서 잔다는 뜻의 ‘와신’은 빠져 있으나, 그 뒤 후한 말에 조엽(趙曄)이 쓴 역사서이자 역사소설 <오월춘추>라는 책에서 처음 언급된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귀국한 월왕 구천은 노심초사하며 자리 옆에 쓸개를 매달아 놓고 앉거나 누워서 이것을 보며 음식을 먹을 때도 핥곤 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회계산에서의 치욕을 잊지 않았지?’라고 중얼거렸다. 귀국한 구천은 이제 오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작전에 들어간다.

월나라, 오나라 멸망시킬 지략
 
책략가 문종은 월왕 구천과 논의해 오나라를 멸망시킬 6가지 지략을 제시한다. 첫째, 오나라에 많은 뇌물을 보내 오왕과 대신들을 안심시키고, 둘째, 오나라에서 양식을 사거나 빌려 오나라 창고를 텅 비게 할 것, 셋째, 미녀를 오왕에게 보내 그를 황음무도하게 유혹 할 것, 넷째, 오나라에 목재와 벽돌, 기와 등을 많이 보내고 토목공사를 크게 벌이게 함으로써 국력을 소모시킬 것. 다섯째, 대신들을 매수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훌륭한 충신과 장수들을 조정에서 몰아낼 것. 여섯째, 월나라 자체적으로 많은 식량과 건초를 비축해 많은 병마를 징수하고 부지런히 조련할 것.

월왕 구천은 10년 동안 인구증가와 교육에 관한 계획을 세웠는데, 연로자는 젊은 여자와 결혼을 금지했으며 아들은 20세, 딸은 17세가 됐는데도 결혼시키지 않은 부모는 처벌하고, 출산이 임박했을 때는 관가에 보고하여 관에서 파견한 의원의 보살핌을 받아 영아 생존율을 높이고 남자 아이를 낳으면 나라에서 술 한 주전자와 큰 돼지 한 마리를 상으로 주고, 여자아이를 낳으면 술 한 주전자와 새끼 돼지 한 마리를 선물로 주기로 하는 등 인구증가정책을 시행했다. 또 아이가 셋이면 그중 둘을 나라에서 키워주고 7년 동안 세금을 징수하지 않았다.    

얼마 후 오나라 왕 부차가 건축공사를 벌이자 월왕 구천은 많은 목재를 헌납함으로써 원래 계획보다 규모를 늘려 짓게 했다. 월나라의 국력소모 계략에 말려든 오나라는 눈치 채지 못한 채 월왕 구천의 충성심에 매우 흐믓하게 생각했다.

미인계로 권력을 좌지우지하다

미인계(美人計) 작전에는 중국 4대 미녀에 해당하는 책략가 범려의 여자인 서시(西施)가 동원됐다. 범려는 오나라 왕 부차를 접대하는 방법과 임기응변 대책에 대해 일러준 뒤 보냈다. 오나라 왕 부차에게 간 서시는 미모 뿐 아니라 비범한 언행과 탁월한 식견까지 갖추고 있었다. 서시는 오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견해가 오왕 부차의 신뢰를 얻어야 하고 둘째 정치에 관여하다가 기회를 보아 오나라 정권을 혼란에 빠뜨리기로 했다.

어느 해 월나라는 흉년이 들자 문종을 오나라에 보내 곡식 10만석을 빌려 달라고 하자 오나라 궁정에서 의견은 분분했다. 오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충성하고 있는 월나라를 지원할 것인가를 두고 찬반의견이 엇갈렸다. 그러자 오왕 부차는 서시에게 의견을 물었다. 서시는 “대왕께서는 천하의 패권을 장악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까? 이런 사소한 일조차 결단을 내리지 못하다니 말입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백성은 먹은 것을 하늘로 안다고 하였습니다. 대왕께서는 그들(월나라)에게 양식을 빌려 주지 않고, 설마 그들을 굶어 죽게 하시렵니까?”

오왕 부차는 서시의 지적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고 월나라에 양식 10만석을 빌려주기로 결정했다. 다음해 월나라에서는 빌린 양식을 오나라에 갚았는데, 오왕 부차는 월나라가 약속한 데로 갚자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더구나 월나라에서 가져온 곡식을 알맹이가 크고 좋아 10만석을 종자로 삼기로 했다. 그래서 그 뒤 오나라에서는 종자로 심었는데 때가 지났어도 싹이 트지 않았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모두 썩어 있었다. 월나라에서 보낼 때 문종의 지략으로 모두 삶아서 말린 곡식이었지만 오나라에서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오왕 최측근 오자서 제거작전

기원전 494년 회계산 전투 당시 오나라가 월나라 구천을 포위했을 때 오자서는 왕 부차에게 ‘하늘이 준 기회’라며 이번에 월나라를 완전히 멸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왕 부차는 백비의 강화주장을 수용했었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기원전 484년 오나라 조정에서는 오자서와 백비 간 권력 투쟁이 정변으로 확대돼 오자서가 백비의 모함을 받고 궁지에 몰렸다. 이 때 서시는 오자서를 내치기로 한 왕 부차에게 “속담에 이르기를 의심나는 자는 쓰지 않고, 쓴자는 의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자서는 월나라를 멸망시키자고 주장하는 자이니, 그가 득세하면 맨 먼저 나 같은 월나라 사람을 죽일 것입니다.”라면서 오자서 제거를 요청했다.

결국 오왕 부차는 부친 합려왕 때부터 대신이었던 오자서에게 촉루검을 보내 스스로 자결하도록 했다. 이 때 억울한 오자서는 죽기 직전 “내 눈알을 빼서 오나라로 들어오는 길목인 고소산 동문에 매달아 월나라가 오나라를 쳐들어 오는 것을 지켜보게 하라”는 자신의 진언을 듣지 않아 결국 망할 것이라며 오왕 부차에 대한 복수심을 섬뜩한 유언으로 남겼다.  

2년이 지난 기원전 482년 오왕 부차는 정예군을 이끌고 북상해 황지(지금의 허난성 봉구현)에서 진(晉), 노(魯)의 제후들과 회맹(會盟)한다. 회맹이란 춘추전국시대 제후들이 만나서 하는 회의를 말하는데, 이 자리에서는 패주로서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맹약을 체결했다.

월나라는 오왕 부차가 군사를 이끌고 나라를 비운 것을 알고 정예군 4만명을 동원해 오나라 수도를 기습했다. 월왕 구천이 오나라에서 인질로 있다가 돌아 온 지 10년 만이었다. 1천킬로 멀리 떨어져 회맹 중이었던 오왕 부차는 수도가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월왕 구천에게 백비를 사신으로 보내 강화를 요청했다. 이때 월나라의 범려는 오나라를 일시에 멸망시킬 수 없다는 것 알았기 때문에 강화를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4년 뒤인 기원전 478년 월나라는 다시 군사를 동원해 오나라를 공격했다. 이때 쇠락해 가는 오나라는 월나라 군대를 막을 힘조차 없었고 왕 부차는 도읍 근처 고소성으로 후퇴했으나, 월나라 군대를 2년 동안 성을 포위해 고사작전을 폈다. 그러자 오왕 부차는 왕손을 파견했는데, 그는 웃을 풀어헤치고 무릎걸음으로 월왕 구천에게 가서 “옛날 오왕이 회계산에서 당신을 모욕했으니 감히 화해까지는 바라지 않겠습니다. 다만 월왕의 포로가 되어 이전의 죄를 갚고자 합니다.”라고 사정했다.

토사구팽, 범려-문종 운명을 가르다

월왕 구천은 측은한 생각이 들어 이런 제안을 수용하려고 하자 범려가 막아섰다.

“옛날 하늘이 우리 월나라를 당신(오나라)에게 주었는데, 당신은 천명을 어기고 접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의 고생이 생겼습니다. 지금 하늘이 오나라를 우리(월나라)에게 주는데 우리가 만약 받지 않는다면, 천벌을 받습니다. 설마 회계산에서 치욕을 잊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월나라는 범려의 결단으로 오나라의 제안을 거절했고 전투는 계속됐다. 결국 오나라 왕 부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왕 부차는 죽으면서 천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게 하고는 죽어서 무슨 낯으로 오자서를 대하겠냐고 후회했다고 한다. 기원전 473년 오나라가 멸망함으로써 오월동주 시대는 막을 내렸다.

월나라의 책략가인 범려는 오나라를 제압한 일등 공신으로 상장군이라는 벼슬에 임명됐지만 사직서를 제출했다. 범려는 “큰 명예를 짊어지고 오래 살기는 어렵다. 그리고 왕 구천과는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지만, 편안함을 함께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날던 새가 다 잡히면 활 시위를 거둬들이고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 먹는다”는 토사구팽을 예견한 것이다.

진퇴를 판단하는 현명함은 춘추전국시대를 합쳐 범려를 따라잡을 인물은 없을 것이다. 범려는 서시와 함께 월나라를 조용히 빠져나가 제나라(지금의 산동성)로 들어가 버렸다.

같은 공신 문종과는 정반대의 선택을 한 것이다. 문종은 월나라에 남아 있었는데, 결국 문종이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는 누군가의 모함이 왕 구천에게 전해졌다.

그러자 구천은 문종에게 검을 내려 자살을 강요했다. 문종은 “설마 구천왕이 나를 이렇게 죽일 줄이야”라고 생각하며 이럴 줄을 몰랐던 것이다. 한 시대 같은 책략가이자 친구였던 범려와 문종은 선택과 결단이 달랐기에 운명을 갈라놓았다. 토사구팽의 성어는 그 뒤 한나라 개국 공신이었던 장수 한신도 역모죄로 죽임을 당하면서 사자성어의 두 번째 주인공이 됐다. 반면에 떠날 때를 알고 역사적 책무를 다한 한나라 개국 공신 장량은 제나라 땅을 봉토로 주겠다는 고조 유방의 제의를 사양하고 떠나 산속에서 도교 수련술인 양생술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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