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반간계로 명나라 충신을 제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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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반간계로 명나라 충신을 제거하다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5.09.08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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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교체의 전주곡 농민반란, ‘천명이 철회됐다’
▲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있는 천하의 요새 산해관은 중국대륙의 동북방향인 만주지역에서 베이징으로 진입하는 요충지로, ‘한 명의 병사가 지키고 있으면 1만 적군도 함락시키지 못한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러나 명나라 멸망이 초읽기에 들어간 1644년 장수 오삼계는 청나라군에 투항하고 산해관 동쪽 성문을 열어 청군이 베이징에 입성하도록 했다.

▲ 정 거 배 <인터넷전남뉴스 기자 · 중국언어와 문화학 전공>
중국을 제대로 알자<30>

중국 역사상 대부분 왕조가 몰락하는 전주곡으로 농민반란이 있었다. 황제는 ‘하늘이 내려주신 뜻’으로 천자(天子)라고 불렀지만 가뭄과 질병 그리고 흉년, 기근, 폭정 등이 빈발하거나 계속되면 백성들은 ‘천명이 철회됐다’ 즉 ‘하늘이 뜻을 거두었다’고 받아들이고 국가권력을 향해 봉기했다.

최초의 통일 국가 진나라 때도 진시황이 죽자 진승과 오광이 주도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고 후한 말기의 황건적의 난, 명나라 말기에는 이자성 등이 주도한 농민반란, 청나라 말기인 19세기 중엽에는 태평천국의 난 등 농민들이 봉기하면서 왕조의 몰락을 재촉하게 됐다. 명나라 말기 계속된 가뭄과 기근으로 1627년 섬서성에서부터 시작된 농민반란은 1644년 명나라기 오랑캐 만주족에 의해 멸망한 이후까지도 계속됐다. 이 사이에 만주에서 후금으로 발흥한 청나라는 결국 기진맥진한 명나라를 공략해 왕조를 교체시킨다.

그런데 명·청 권력교체기에서도 실제로 ‘적을 역이용하는’ 반간계(反間計)에 의해 명나라 충신이자 장수가 살해됐다. <손자병법>과 소설 <삼국지> 내용처럼 ‘차도살인’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데, 바로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에 의해 명나라의 충신이자 장수 원숭환(袁崇煥,1584년- 1630년)이 제거된 사건이다.

지금의 동북 3성이라고 부르는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 등 만주일대에서 성장한 후금은 원래 여러 부족들이 흩어져 사는 여진족이었다. 여진족을 통일시킨 인물은 누르하치였는데, 청 태조 누르하치에 이어 홍타이지(청 태종)은 1627년 정묘호란으로 조선을 1차 제압한 뒤 1636년 병자호란을 통해 조선을 제후국으로 만든 인물이다. 홍타이지는 부친에 이어 후금의 권좌에 오른 뒤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를 즐겨 읽었고 ‘남의 칼로 상대의 충신을 제거하는’ 차도살인 계책을 실행하기에 이른다. 그는 <삼국지> 적벽대전 당시 주유가 장간을 이용해 조조군의 주력을 이끌고 있던 장수 채모와 장윤을 제거한 것에 주목하고 실제로 성공해 명나라의 멸망을 앞당기게 된 것이다.

명장 원숭환, 차도살인으로 희생

청나라 군대가 가장 두려워했던 인물이 바로 원숭환으로 당시 명나라 요동지구 총사령관으로 있었는데, 원숭환은 그 이전 1627년 영원성 전투에서도 홍타이지의 아버지인 누르하치가 이끄는 20만 병력을 2만명의 군대로 맞서면서 네덜란드 무기인 홍이포로 격퇴시킨 명장이었다.  

조선을 정벌한 정묘호란으로 형제관계를 만든 청의 홍타이지 군대는 1629년 명의 원숭환과 정면 대결해 수도 베이징을 공략하는 것은 역부족이라고 판단했다. 10만 군대를 이끌고 서북쪽으로 만리장성을 우회해서 명나라의 수도 성문 앞까지 진격해 온 사건이 벌어졌다. 질풍노도와 같은 청나라 군대의 맹렬한 기습에 황제 숭정제와 명나라 조정은 혼비백산했고 베이징 도성은 공황에 빠졌다.

당시 베이징의 동쪽 멀리 요동지구에서 주둔 중인 원숭환은 수도 함락위기 소식을 듣고 기병 5천을 이끌고 밤과 낮 천리를 달려 베이징에 도착한다. 그러나 쳐들어 온 청군을 격퇴시키는 과정에서 황제 숭정제와 원숭환 간 의견 차를 보이기도 했다. 청군대가 멀리까지 퇴각할 수 있도록 공격하라는 숭정제의 지시에 원숭환은 그걸 경우 베이징이 위험해질 것이라며 전술 상 문제를 들며 거절했고, 이를 계기로 숭정제는 원숭환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숭정제가 통찰력도 있고 신중하며 주도면밀하고 부지런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반면에 급한 성격에 의심이 많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는 단점도 있었다.

망국의 지름길, 조정 내 권력투쟁

원숭환은 청 홍타이지 군대와 전력 면에서 명나라가 열세라고 보고 줄곧 화친을 주장해 왔었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직전 황제인 무능한 희종 때부터 명 조정에서는 환관 위충현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의 전횡과 당파싸움, 복수극 등 어지러운 상황이 계속됐었다.

아직 성 밖에 대치하고 있던 청 홍타이지 군대는 백성들에 대한 약탈과 포로사냥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명나라 조정 대신들은 대부분 도성 밖에 별장 등 재산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청군이 약탈하고 훼손하고 있다는 소식에 전전긍긍하며 그 책임을 원숭환에게 돌리려고 했다. 조정 일부 대신들은 원숭환이 청군을 끌어들여 화친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베이징의 여론은 명장 원숭환이 반역자로 모는 쪽으로 기울게 되고 이를 알게 된 청 홍타이지를 자신이 열독해 왔던 소설 <삼국지>에서 주유가 반간계로 조조군의 장수 채모와 장윤을 살해하는 차도살인 계책을 실행하게 된다.

이 전에 청군은 베이징성 근처에서 명나라 황실의 말을 관리하는 태감 양춘(楊春)과 왕성덕(王成德)을 사로잡은 적이 있었는데, 그 이전에 청군에 귀순한 명나라 장수 고명중(高鳴中)과 포승선(鮑承先), 영완성(寧完成)을 시켜 이들은 감시하게 했다. 이들 귀순자들은 어느날 밤 홍타이지의 지시대로 사로잡힌 태감 양춘, 왕성덕이 옆 막사에서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한다.

‘이번에 베이징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는 것은 우리(청군)가 전투에서 진 것 때문이 아니고, 모두 홍타이지의 계책에 따라 작전상 후퇴하는 것이라네, 이미 홍타이지와 원숭환 사이에 밀약이 맺어졌으니 곧 대사가 성공 할 것이네’

태감 두 사람은 이런 엄청난 말을 듣고 며칠 뒤 청군 진영을 빠져나와 베이징으로 돌아오게 된다. 숭정제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황제는 노발대발하며 그동안 자신이 원숭환한테 품었던 의심이 사실로 확인됐다고 생각했다. 원숭환은 결국 궁으로 소환돼 적과 내통해 모반을 꾸몄다는 반역혐의로 옥에 갇히게 된다. 청과 전쟁 중이었지만 원숭환 사건을 두고 명나라 조정과 백성들 사이에서도 찬반양론이 엇갈리고 구명운동도 벌어졌다.

능지처참, 가장 잔인한 형벌

6개월 가까이 베이징 성 밖에서는 청군과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숭정제는 이미 원숭환에 대한 형벌을 결정하게 된다. 청군을 멀리 물리친 다음에 원숭환을 능지처참한다는 것이었다. 능지(陵遲)라는 형벌은 ‘칼로 천 번을 베고 난 뒤 죽이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가장 잔인한 형벌 중의 하나다. 칼로 살을 벨 때에도 조금이라도 얇든지 깊게 베어도 안된다. 이를 어길 경우 사형을 집행하는 칼잡이가 대신 처벌을 받게 돼 있다. 그러기에 죄수가 빨리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 먼저 겉살부터 도려내 혈관을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 죄수의 몸에서 도려낸 살을 주위 군중들에게 경매하게 된다. 살 한 점에 은 한전에 거래되기도 하는데 살점을 산 사람은 입에 넣고 씹으면서 ‘반역자’를 욕했다고 한다.

형벌은 사흘 동안 집행되며 죄수가 죽으면 시신은 물론이고 내장까지 군중들에게 나눠진다. 이처럼 잔인무도한 능지처참의 형벌은 명나라의 장수 원숭환이 받게 된 것이다.

1630년 어느 날 베이징의 채소시장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漢)민족의 배반자’가 어떤 모습이며, 그가 어떻게 처형되는지 보려고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반역자’의 살 한 조각을 얻어 씹어 먹음으로써 자신이 진정한 염황(炎黃)의 후손이고, 정정당당한 군자임을 증명하려 했다.

적이나 적의 첩자를 이용해 견고한 성벽을 내부에서부터 허물어버리는 반간계 전략은 명장 원숭환의 주살로 역사상 실제로 성공하는 사례 중의 하나가 됐다. 명 왕조가 안으로는 농민반란, 외부로는 청과 전쟁 와중에서 명장 원숭환의 죽음으로 명 멸망을 재촉하게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원숭환이 능지처참 된 뒤 14년 뒤 명나라 수도 베이징은 청군에 의해 함락 당했다.

망국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자살

청나라는 1583년 만주에서 누르하치가 20여 년 동안 흩어져 있던 여진족을 통일한 뒤 동아시아에서 힘을 키울 수 있었던 기회는 조선에서의 임진왜란이었다. 1592년부터 7년 동안 왜란에 휩싸인 조선을 명나라가 파병하는 등 일본과 싸우고 있는 틈을 이용해 국력을 강화시켰다. 누르하치는 1618년 자신의 조부와 부친이 명나라 군에 의해 살해당했던 사건을 비롯 7대 원한을 풀기 위해 명나라를 정복하겠다고 선언한다.
이어 북방의 몽고족과 조선까지 정벌한 홍타이지는 1636년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제후국가로 만든 뒤 이제 명나라 정복만 앞두고 있었다.

1644년 3월 19일 이자성 등이 이끄는 농민반란군 베이징을 함락시킨다. 10일이 지난 3월 29일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신하들까지 도망가고 없는 자금성에서 아들들을 탈출시키고, 처첩과 딸들을 살해했다. 그리고 자금성 북쪽 문을 통해 현재의 경산(景山)으로 올라가 스스로 목을 매 생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청은 1년 전인 1643년 홍타이지의 돌연사하자 아들 순치제가 권좌를 이어받았다. 3대 황제가 된 그는 1644년 5월 27일 청에 투항한 명나라의 장수 오삼계의 도움으로 베이징으로 통하는 관문인 만리장성의 산해관을 통과해 베이징에 입성한다. 망국을 앞둔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은 이자성의 농민반란군이 휩쓸고 간 전장터였다. 1368년 중국대륙을 100년 가까이 지배하고 있던 원나라 몽고족을 북방으로 몰아내고 왕조를 세운 대명제국은 이렇게 276년 만에 역사 무대에서 사라진다. 그 후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 왕조가 붕괴되기 전까지 다시 오랑캐인 만주족의 지배를 받게 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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