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전승 기념 열병식과 한국 언론의 소설쓰기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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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전승 기념 열병식과 한국 언론의 소설쓰기 경쟁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5.09.15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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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공내전·항일전쟁부터 혈맹관계’ 거듭 확인
▲ 사진설명: 미국의 아시아로 회귀는 그만큼 한반도 정세가 격동하고 있음은 의미한다. 중국은 한국정부의 대외정책이 미국 입장에 치우칠 경우 한반도는 불안해 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지난 9월 3일 베이징 천안문 성루에 선 박근혜 대통령, 61년 전인 1954년 10월 1일 북한의 김일성 수상도 같은 자리에 서서 열병식을 지켜봤었다.

▲ 정 거 배 <인터넷전남뉴스 기자 · 중국언어와 문화학 전공>

중국을 제대로 알자<31>

지난 9월 3일 중국은 수도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전 세계가 주목한 가운데 항일 전쟁 및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 열병식을 개최했다.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과 함께 러시아의 푸틴,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이 나란히 천안문 성루에 올라 열병식에 참석했다.

베이징 천안문 성루는 항일전쟁 전쟁승리에 이어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군을 타이완으로 몰아낸 마오쩌둥이 1949년 10월 1일 이곳에서 역사적인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했던 곳으로, 중국인들에게는 의미가 깊은 장소이다.

이곳은 특히 6.25 전쟁을 끝난 이듬해인 1954년 10월 1일 국가건국일인 국경절 열병식 때 북한의 김일성 수상이 마오쩌둥 바로 옆에서 지켜봤던 곳으로, 61년이 지난 2015년, 그 자리를 대신해 한국의 대통령이 섰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30여명의 외국 인사들 가운데 러시아 푸틴 다음으로 한국의 대통령이 선 것도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시진핑 지도부가 미국이 줄기차게 한국에 요구하고 있는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제인 사드배치 문제와 한미일 삼각군사동맹 추진 등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전략에 맞서 한국이 갖고 있는 지정학적 위치를 중시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박 대통령 특별대우는 한반도 지정학적 의미

특히 전승기념 열병식 하루 전날인 지난 9월 2일 한중정상회담 등 분위기에 봤을 때 초청한 다른 국가지도자들을 제외하고 시진핑 주석이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과 단독 오찬을 했으며, 오찬 중에 박대통령이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할 정도로 특별대우를 한 것도 바로 중국정부의 이런 의도를 뒷받침하고 있다.

반면에 천안문 성루에서 최룡해 북한 노동당 비서는 끝에서 2번째에 자리를 했는데, 이를 두고 북한 최룡해는 시진핑 주석과 접견도 못하는 등 ‘홀대를 받았다’ ‘빈손으로 귀국했다’는 등 한국 언론의 온갖 추측성 기사가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 보면 이런 보도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한국 언론의 냄비근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인다. 이는 북한이 식량난을 겪었던 20여 년 전 ‘인민 폭동이 일어나 북한정권이 곧 붕괴될 것’ ‘ 부자세습으로 쿠데타가 발생해 김정일 체제가 붕괴될 것’ 이라는 식의 당시 한국 언론의 지극히 편협적이고 일방적인 보도모습과 비슷하다. 북한은 지난 90년대부터 시작된 식량난에도, 이른바 북핵 위기에 이어 김일성 사망과 김정일 세습 그리고 최근 김정은 체제에 이르기까지 붕괴되지도 않고 여전히 건재하다. 다만 한국 언론의 편향적이고 자기도취적인 것이 아닌가? 

한중 관계가 이전보다 한층 가까워 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북중 관계가 소원해져 중국이 북한을 버리고 전적으로 한국편을 들게 될 것”이라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보도방식은 한중관계나 한반도 평화통일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북한주재 중국대사, ‘조·중 우호 중시‘
 
‘중국이 북한과 결별할 것’이라는 착각을 유도하는 듯한 방식은 역사적으로 북중관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언론들의 성급한 판단이라고 본다.

북한은 역사적으로 지금의 신중국을 있게 한 혈맹이다. 항일전쟁 시기 조선인들은 중국대륙에서 함께 일본군에 맞서 전쟁을 치렀고, 1945년 일본 패망 이후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을 몰아낼 때도 북한 또는 조선인들의 지원과 역할과 공헌이 컸었다.

그러기에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 하자마자 중국정부는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처음으로 만주땅 길림성 안에 조선족자치주 설립을 승인했다. 

중국이 전승기념 열병식을 앞둔 지난 8월말 리진쥔(李進軍) 북한 주재 중국대사는 북한의 월간지인 '금일의 조선' 9월호에 '역사는 잊을 수 없고 평화는 쉽게 오지 않는다'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주 북한 중국 대사관 홈페이지에 공개된 이 글에서 리 대사는 김일성을 '중국의 친밀한 친구'로 표현했다.

리 대사는 "조선(북한)의 많은 지사가 잔혹한 일본 식민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중국으로 와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중국 인민의 친밀한 친구인 김일성 동지는 동북항일연군과 함께 동북지방에서 용감하게 일본에 저항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중국 인민들은 이를 기억하고 있으며 양국 혁명 선열들의 생명과 피로 만들어진 조·중 우호를 중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리 대사는 이어 "김정은 제1비서 지도하에 북한 노동당은 강성국가 건설에 분투하고 있으며 경제와 민생 부문에서 좋은 성과가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리 대사는 "항일전쟁 등에서 피로써 맺은 양국 우의는 우리의 소중한 자산으로 세대를 넘어 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새로운 국제정세 하에서 중국은 '전통계승·미래지향·선린우호·협조강화'라는 방침을 유지할 것"이라고 거듭 밝혔다. 이처럼 중국과 북한은 역사적으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순망치한의 관계이다. 중국인이 갖고 있는 은원론에는 ‘은혜와 원수는 대를 이어 갚는다’라는 말이 있다.

한반도 긴장반대는 한미훈련도 반대 의미

지난 2일 있었던 시진핑-박근혜 한중정상 회담에서 합의한 '한반도의 긴장 반대'라는 의미에는 한미연합훈련 반대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중국은 이제껏 ‘조선반도(한반도)의 비핵화’를 견지하고 있지 ‘북한만은 핵무기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중국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남한에 배치된 미국의 핵무기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저명인사들을 포함한 대부분 중국인들은 미국이 1950년대 말부터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제인 사드처럼 남한에 배치된 핵무기는 북한 뿐 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를 겨냥하고 있다는 인식은 당연하게 할 것이다.

따라서 중국정부의 공식 멘트인 ‘한반도의 비핵화’는 ‘북한도 핵무기를 갖지 않아야 하고 남한에도 미국의 핵무기를 배치해서는 안된다‘는 두 가지 주장이 함축돼 있는 것이다.

중국은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으로 끝난 제2차 대전을 제국주의와 파시스트에 저항한 전쟁이었으며, 이 전쟁과정에서 중국의 역할이 가장 컸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일본이 중국을 본격 침략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에서 갑오농민전쟁이 있었던1894년이었다. 갑오농민운동 진압을 명분으로 조선에 출병한 청나라와 일본 양국 군대는 그해 충남 아산 앞바다에 충돌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됐는데, 이를 1차 청일전쟁이라고 부른다. 이때 일본군은 여순 등 만주일대까지 진입하는 등 사실상 중국 동북지역 점령을 시작했다. 일본은 그 뒤 1931년 9월 18일 만주철도 폭파사건을 조작해 대륙침략 전쟁을 본격화했으며, 이를 만주사변이라고 한다.

이어 1937년 7월 7일 중국 베이징 주변 화북성 일대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은 훈련 도중 사병 한명이 실종된 것을 ‘중국군의 소행’으로 조작하고 북평 완평현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군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발발한다. 중국역사에서는 이를 7·7사변이라고 부르며 이를 항일전쟁의 시작이라고 하고, 중국 공산당은 중국 전역에 항일전쟁을 선포하고 이틀 뒤인 7월 9일 마오쩌둥이 주도하는 홍군(紅軍)이 공식적으로 항일전쟁 참전을 선포하게 된다. 그해 12월 13일 일본군은 중국의 남쪽인 상하이에 이어 난징을 점령하고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무고한 시민 30만명을 학살한다. 이른바 ‘난징대학살’이며 지금까지도 일본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항일전쟁 중 중국인 3천500만명 희생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을 끝났지만 중국은 만주사변이 일어난 1931년부터 14년간 계속된 항일 민족해방전쟁에서 일본군 252만명을 사살하거나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면 항일전쟁 기간 중 중국인들의 희생도 엄청났다. 지난 7월 14일 중국 국무원 신문판공실은 항일전쟁 시기 인명 피해 및 재산 손실 조사 발표 기자회견에서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한 사상자 수는 3천500만 명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중국정부가 공식적으로 수치를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이 중에서 군인은 380만명이고 나머지 3천100만 명은 민간인이다. 일본의 침략전쟁에서 무고한 중국인민들이 그만큼 많이 희생됐다는 설명이다. 경제 피해규모도 1937년 국제통화기준을 고려했을 때 직접적인 경제 피해는 1000억 달러(약 114조원) , 간접적인 피해 규모도 5000억 달러로 추정된다고 중국 정부는 밝혔다.

특히 1945년 세계 2차 대전 종전 직전 일본군의 해외파병 규모는 358만명이었는데, 그중 186만명이 중국에 투입돼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날 시진핑 주석은 열병식 기념사 끝부분에서 ‘평화는 반드시 승리한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인민은 반드시 승리한다’고 역설한 것도 그런 의미를 갖는다. 시진핑 주석은 또 “전쟁은 평화의 소중함을 더욱 잘 알 수 있게 하는 거울”이라고 밝혔다. 시 주석은 “오늘날 평화와 발전은 시대의 주제가 되었지만 세계는 여전히 평화롭지 않다”며 “우리는 역사를 본보기로 삼아 평화 수호의 결심을 확고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시진핑 주석은 “중국인민은 장차 세계 각국의 인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중국인민항일 전쟁과 세계반파시스트 전쟁 승리의 성과를 결연히 지켜내고, 인류에 대해 새롭고 더욱 큰 공헌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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