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제대로 알자<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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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제대로 알자<47>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6.02.0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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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쉐량과 쑹메이링이 처음 만난 시기는 쑹이 장제스와 결혼하기 전이었다. 3년 뒤 쑹이 장제스와 결혼을 했다. 시안사변이 중국 역사의 운명을 가르게 된 것도 두 사람 간 분위기와 전혀 무관하지 않았다. 훗날 장쉐량은 “장제스를 감금했던 시안사변 때 장제스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쑹이 과부가 되는 것을 자신이 원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2001년 10월 백발의 노인 쑹메이링은 뉴욕에서 장쉐량의 부고를 접했을 때 소파에 기댄 채 통곡했다고 한다. 쑹도 2년 뒤인 2003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장학량-송미령, 한 세기를 다 채운 연정
반세기 동안 연금생활, “신중국의 영원한 공신”

 

정 거 배<인터넷전남뉴스 기자/중국언어와 문화학 전공>


장쉐량(張學良)은 시안에서 풀려난 장제스를 난징까지 배웅했다.
그러나 그때 그 길은 동북황제이자 군인으로서 무장해제이자 갇힌 세월의 시작이었다. 그는 1936년 12월 31일 특별군사법정에 섰다. 재판부는 징역 10년에 5년 간 공민권 박탈을 선고했다. 다음날 장제스는 중화민국 군사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장쉐량의 특별사면을 정부에 요청했다. 군사위원회가 장쉐량의 신변을 인수해 엄격히 관리 단속한다는 조건으로 특별사면은 승인됐다. 군사위원회는 장쉐량을 장제스의 고향 시커우로 이송하고 군인들을 배치해 24시간 감시했다. 1937년 1월부터 시작된 장쉐량의 연금생활은 1990년 6월 1일 타이완에서 해제될 때까지 53년 5개월간 계속됐다.
그런데 장제스는 시안에서 감금돼 있을 때는 사건 해결 뒤 장쉐량의 신변보장을 약속했었다. 홍군의 저우언라이에게도 약속했고 부인 쑹메이링(宋美齡)과 사태수습을 위해 함께 시안에 왔던 처남 쑹즈원에게도 공언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1975년 죽을 때까지 장쉐량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장제스의 아들이 집권하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장제스는 생전에 아들 장징궈(蔣經國)에게도 “호랑이는 풀어놔서는 안된다”며 장쉐량을 붙잡고 있으라고 했다. 장제스의 이런 콤플렉스는 장쉐량을 풀어주면 만약 마오쩌둥의 중국으로 건너가 ‘인민영웅’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장쉐량이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 것은 아버지 장제스에 이어 아들 장징궈 타이완 총통이 사망 한 뒤였다. 장쉐량은 연금이 해제된 이듬해 1991년 봄 타이완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는 장쉐량을 ‘영원히 변할 수 없는 공신’이라고 평가했다.

장쉐량, 신중국의 영원한 공신

시안사변을 계기로 1937년 국·공 합작으로 항일전쟁이 시작됐다. 연금돼 있는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전쟁에 나가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장제스는 허락하지 않았다. 장제스는 시안사변의 주인공이자 동북의 황제인 장쉐량이 항일전쟁에 직접 뛰어든다면 인민적 영웅이 될 것이라는 불안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마오쩌둥이 돌아온 장쉐량을 항일전쟁의 지도자로 추대하는 것은 우려했다. 그래서 장제스는 비밀에 부쳐진 장쉐량의 연금장소를 수시로 옮겼다. 
당시 활동한 정치가이자 서예가였던 위우런(于右任,1879~1964)은 행방을 알 수 없는 장쉐량은 그리워하며 이런 시를 남겼다.
“아무리 불러도 청춘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믿지 않았고, 청사(靑史)에 빛나는 일이 한 줌의 재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부서지는 파도는 성찬이었고, 만리강산은 한 잔의 술이었다.”
중국은 1945년 항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장쉐량은 여전히 풀려나지 못하고 있었다. 중국 공산당 뿐 만 아니라 각계에서 장쉐량 석방운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장제스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면서 그는 “장쉐량을 감금한 것은 그를 아끼지 때문”이라는 애매한 말로 변명했다.
일본제국주의를 물리친 중국은 이제 마오쩌둥의 공산당과 장제스의 국민당 간 쟁패가 남아있다. 1949년까지 다시 4년 동안 국·공 내전을 앞두고 있었다. 장쉐량은 1946년 12월 2일 중국대륙에서 비밀리에 타이완으로 이송됐다. 그때 장쉐량은 자신이 난징으로 이송돼 풀려날 것으로 기대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고 한다.
장쉐량은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가 사망한 1988년 이후에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연금돼 있는 동안 그는 쑹메이링의 각별한 보호를 받았다. 장쉐량은 나중에 “쑹메이링이 하루를 더 살면 나도 하루를 더 살 수 있다”고 술회했다고 한다. 연금이 풀릴 시기에 쑹메이링은 미국 뉴욕에서 살고 있었지만 잠시 귀국했다. 1990년 6월 타이완에서 자유의 몸이 된 장쉐량의 90세 생일 축하연이 열렸다. 94세의 쑹메이링은 불참했지만 생일선물로 복숭아 9개를 보냈다. 생일선물이 복숭아인 이유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알 수 없었지만 자신들은 의미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달 뒤 이들은 타이완 교회에서 우연히 만나 10여 분간 대화했다. 자신들의 삶에서 마지막 만남이었다.

1925년, 장쉐량과 쑹메이링의 운명적 만남

장쉐량과 쑹메이링은 첫 만남은 언제였을까?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쑹메이링이 장제스와 결혼하기 3년 전이었다. 1925년 4월 산둥성 칭다오의 일본인이 운영하는 방직공장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이 시작된 것을 계기로, 5월 30일에는 상하이까지 확산돼 유혈사태로 발전했다. 학생과 시민들을 향해 공동 조계지역에서 영국 경찰이 시위 군중에게 발포해 11명이 숨졌다. 시위는 베이징, 광저우, 우한 등 전국 주요도시로 확산됐다. 이 시기는 동북군벌 장쭤린의 세력이 상하이가 있는 안후이성까지 미치고 있었다. 그해 6월 14일 동북황제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 육군중장이 지휘하는 동북군 3천명을 태운 열차가 상하이역에 도착했고 역 광장에서 환영대회가 열렸다. 장쉐량은 단상에 올라 연설하면서 단상 밑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젊은 여인에게 눈길이 갔다. 그날 밤 칵테일 파티가 열렸고 이 자리에도 역 광장에서 목격했던 쑹메이링이 와 있었다. 미혼인 쑹은 29세였다. 장은 25세였지만 이미 결혼해 부인이 있었다. 장쉐량은 쑨원의 처제 쑹메이링이 있는 테이블로 가서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다음날부터 장쉐량이 나타나는 곳에는 쑹메이링이 있었다. 2001년 장쉐량은 그때를 이렇게 회고했다고 한다. “8일간 내 옆을 떠나지 않았다. 내 생애에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만약 내가 결혼하지 않았었다면 절대로 놔주지 않았을 것이다. 3년 후 다시 만났을 때는 장제스의 부인이 돼 있었다. 울화통이 터졌지만, 그렇게 반가울 수는 없었다. 쑹메이링은 나를 3년 전과 똑같이 대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 장쉐량 자료실에는 두 사람의 편지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반세기 동안 장쉐량이 연금된 기간에 쑹메이링이 보낸 편지까지 포함해 두 사람의 많은 마음들이 오고 갔다.
연금이 해제돼 자유의 몸인 된 장쉐량은 1991년 3월 타이완에서 미국으로 떠났다. 2001년 10월 하와이에서 험난했던 삶을 101세로 마감했다. 그때 뉴욕에 살고 있던 105세의 쑹메이링은 『뉴욕 타임스』를 보고 장쉐량의 사망소식을 알았다. 쑹은 소파에 기댄 채 통곡했다고 한다.

장쉐량, 시안에서 장제스 죽일 수도 있었다

장쉐량은 사망하던 그해 봄 언론과 인터뷰에서 “1936년 12월 시안사변 때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장제스를 죽여 버리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쑹메이링을 과부로 만들 수 없었다. 쑹메이링만 아니었다면 장제스는 죽을 목숨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03년 10월 쑹메이링도 뉴욕의 맨해튼의 자신의 집에서 10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장쉐량은 장쭤린(張作霖, 1875~1928)의 아들이다. 랴오닝성 출신인 장쭤린은 마적인 토비출신이지만 토비를 토벌한 공으로 자신의 무장조직을 갖고 청말에 정식 군인의 자격을 얻은 인물이다. 그 뒤 군벌 간 전쟁을 통해 동북 3성(랴오닝, 지린, 헤이롱장성)의 실력자가 됐다.
1927년 6월 장쭤린은 베이징에서 북양군정부 육해군대원수로 취임한다. 중화민국의 동북 통치자가 됐다.
청말과 중화민국 초기에 자주 언급되는 군벌(軍閥)이라는 개념은 개인이 군사력을 갖고 있는  정치적인 실력자를 말한다. 군벌들은 이 시기 중국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군벌이 탄생하게 된 것은 1800년 전 후한말기 황건적의 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나라 조정은 황건적을 진압할 때 지방의 지주들이 스스로 무장하도록 만들었다. 이를 단련(團練)이라고 불렀다. 단련세력은 현지의 관료나 지주가 연합해 조직했다. 
태평천국운동은 1840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함으로써 청나라가 반봉건 반식민지 상태로 추락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발발했다. 1851년 훙슈취안(洪秀全,1814~1864) 등이 주도한 ‘반제 반봉건 농민전쟁으로, 50만 명에 달하는 태평천국군은 1853년 3월 난징을 점령하고 봉건지주 토지소유지를 폐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 평등사상을 내걸며 1864년까지 14년 동안 지속된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농민전쟁이었다.
태평천국군이 봉기하자 청나라 조정은 군대를 파견해 진압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청 조정은 지방의 향신세력이 갖고 있는 민생자경단 조직을 통합해 태평천국군 진압에 나섰다. 이런 민간군사조직이 나중에 사병(私兵) 형태인 군벌로 발전했다.
따라서 토비에서 군벌로 다시 중화민국의 정식 군인이 된 장쉐량의 부친 장쭤린이 북양정부의 국가원수가 됐다. 여기서 북양(北洋)이란 당시 남양(南洋)과 대비되는 장쑤성 이북의 산둥·허베이·랴오닝성 등 발해와 황해에 접한 각 성을 북양이라고 불렀다.
장쭤린의 지위는 그가 1928년 6월 3일 새벽 일본군에 의해 암살될 때까지 북양의 최고 실권자였다. 사망한 아버지의 뒤를 1936년 12월 시안사변으로 연금되기 전까지 아들 장쉐량이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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