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ㆍ18 광주민중항쟁 36주년 목포행사위원회 시민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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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ㆍ18 광주민중항쟁 36주년 목포행사위원회 시민논단
  • 최지우
  • 승인 2016.05.26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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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중항쟁 36돌 목포5ㆍ18를 조명한다
▲ 5 18 광주민중항쟁 36주년을 맞아 목포YMCA 시민사업위원회가 ‘아~5?18~ 다시 민주주의를 생각하고, 평화통일을 꿈꾸다’란 주제로 시민논단을 펼쳤다.

▲ 강덕수 YMCA 시민사업위원
5ㆍ18 광주민중항쟁 36주년을 맞아 목포YMCA 시민사업위원회가 ‘아~5ㆍ18~ 다시 민주주의를 생각하고, 평화통일을 꿈꾸다’란 주제로 시민논단을 펼쳤다. 지난 16일 목포YMCA에서 열린 이번 토론회에서는 목포 5ㆍ18 민주화 운동을 제조명하기  위해 열렸으며 강덕수 목포YMCA 시민사업 위원이 사회를 보고 광주기독교교회 협의회 박상규 회장(1980년 목포대책위 집행위원장)의 주제발표에 이어 5?18민중항쟁동지회 한봉철 회장과 5ㆍ18 구속부상자회 목포신안무안지회 최형주 회장, (사)5ㆍ18 민주화운동부상자회전남지부 정석봉 지부장이 나서 토론을 했다.

▲사회 = 강덕수 목포YMCA시민사업위원
현 정권 이후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후퇴를 걱정하고 있다. 더불어 개성공단 패쇄 등으로 극명하게 드러난 남북 긴장고조와 관계 악화의 정황 속에서 5.18 36주년을 맞이하였다. 특별하게는 5.18 목포지역운동을 중심으로, 그 당시 목포에서 많은 활동가들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이번 토론회를 계기로 목포시민들이 5.18 민주화 운동의 주역으로서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게 한다. △목포지역 5.18운동사를 정리하는 계기로 삼고 항쟁유적지의 보존과 관리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갖게 한다. △5.18 정신계승사업으로 향후 지역에서 평화공존과 통일운동을 보다 지속적으로 하게한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시대적 소명과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오월정신은 우리의 미래이다.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인 인권을 수호하고 백성이 세상의 참 주인되는 대동세상을 꿈 꾸었던 36년 전의 그 함성이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오늘에 새롭게 남겨준 과제는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 봐야할 것이다.

 
▲주제발표 = 광주기독교교회 협의회 박상규 회장
그 일이 있은 후 이제 36년이 되었다. 광주목포 5월 운동이 이 날의 정치 사회적 민주화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요즘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부인하려는 사람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80년 그때도 광주 시민들에게 총질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부인하고 왜곡하려고 했다. 그래서 광주목포시민을 빨갱이로 폭도라고 했다. 지금도 이 총칼로 광주시민을 학살한 사람들의 꼭두각시들이, 비위를 맞추려고 헛소문을 내고 있다. 일부 세상권력을 숭상하는 종편 언론들이 북한군 1개 대대 600명이 광주사건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의 신군부는 이들이 남침할 때 까지 뭐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더구나 순사 계엄령아래서 북한군 1개 대대가 남침했다면 계엄사령관이하 모두 지휘관들은 지금이라도 그 책임을 물어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이 80년 오월에 본 무지개, 5월의 영성은 그런 복수극이 아니다. 5월의 무지개, 5월의 영성은 최악의 조건에서도 최선의 삶을 살아낸 진리와 평화의 시민정신이었다. 무지개는 다양한 색깔의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다리와 같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다리가 되어야 한다, 동서화합 남북통일을 잇는 무지개가 되어야 한다, 다리는 스스로 일어서는 법이 없다. 댓가나 보상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다. 그저 진리에 충실했고 평화를 갈망했고 사랑을 실천했을 뿐이다. 여기에 5월의 영성이 있다. 80년 5월에도 숱하게 죽어간 영령이 우리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민주의 시대를 열었다. 5월 운동은 나 죽이고 저만 살겠다는 군부집단에 저항했지만 그렇다고 너 죽이고 나만 살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오늘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날 우리는 음식을 나누고 피를 나누고 서로를 걱정하며 서로의 울분을 달래며 최선의 삶을 살아 내려고 했었다고, 그래도 그때 그런 우정과 사랑이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고, 그리고 우리는 다만 진리와 정의가 승리할 것을 믿고 바랬던 것이라고, 그리고 우리는 이제 우리자식의 육신을 찢어 놓은 그들까지도 함께하는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5월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목포 광주 시민들만이, 이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돌아올 유익에 구애되지 않고 진리를 믿는 것이고, 진리 안에서 진리를 실천하며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5월 광주의 역사적 영성이 있다. 이러한 영성이 이제는 마사다를 넘어 무지개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이러한 오월의 영성으로 이제 오월에서 민족통일로 오월에서 민족화합으로 오월에서 민족번영으로 그리고 오월에서 동북아와 세계의 평화를 선도하는 나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진리와 사랑이 우리를 영원히 자유하게 할 것이다.

▲ 5.18당시 10만여명이 훨씬 넘는 시민이 항쟁시위에 참여 하였다. 항쟁기간동안 시민상호간 난동이나 약탈 등이 한건도 없는 평화로운 시위를 하였다. 목포시민의 성숙한 시민사회 공동체의식과 민주시민 의식을 보여줬다
▲5ㆍ18 민중항쟁동지회 한봉철 회장
거의 전 시민이 참여할 만큼 거대한 규모의 항쟁은 몇몇 선진적 사람들이나 학생들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반드시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민족적, 계급적 요구가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이처럼 당시 목포시민은 박정희 정권의 지역편향 개발정책에 의한 파행적 경제구조로 인해 열악한 공업생산 기반과 지역적 소외, 사회문화적 소외, 정치적 소외감으로 늘 잠재적인 사회개혁의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이 5월 18일 광주의 비보가 목포로 전해지고, 급기야 광주에서 무장한 차량들이 21일 내려오면서부터 80년 목포지역 민중항쟁은 시작된다. 목포민중항쟁은 목포역 광장을 중심으로 22일부터 28일까지 목포시민들 모두가 하나 되는 적극적인 참여와 뜨거운 성원 그리고 완벽한 치안질서 속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낮에는 “시민결의대회”와 “광주상황보고대회”를 하고, 밤에는 “햇불시위” 등의 평화적인 시위를 하였다.

▲5ㆍ18 구속부상자회 목포신안무안지회 최형주 회장
당시 10만여 명이 훨씬 넘는 시민이 항쟁시위에 참여 하였다. 항쟁기간동안 시민상호간 난동이나 약탈 등이 한건도 없는 평화로운 시위를 하였다. 목포시민의 성숙한 시민사회 공동체의식과 민주시민 의식의 발로라 생각하며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다. 또한 경찰이나 관계기관에서도 시민의 안전과 보호에 적극 대처해 준 것으로 기억한다. 그 후, 1997년 이 나라 민주화운동의 금자탑이 된 5.18 민중 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목포시민은 정치인 김 대중을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김 대중 대통령은 5.18 민중학살의 근본 원인이 되는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분단이후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6.15선언을 통해 남북평화공존과 통일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목포시민은 이 나라 민주화운동과 평화통일 운동에 크게 기여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80년 5.18민중항쟁은 이 땅에 사는 모든 민중에게 미국의 실체를 드러내었고, 또한 보수정객은 진정한 변혁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자연발생적, 고립분산적인 항쟁의 실패 경험은 “조직화된 민중(대중)의 합목적적 실천”을 통해서만이 운동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음을 자각케 했다.

▲ 36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5.18 목포민중항쟁의 역사적 평가를 해보려는 때늦은 작업을 시도하면서 앞으로 더욱 연구하고 다듬어야 할 많은 과제가 남아있음을 보게 된다.
▲5ㆍ18 민주화운동부상자회전남지부 정석봉 지부장
36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5.18 목포민중항쟁의 역사적 평가를 해보려는 때늦은 작업을 시도하면서 앞으로 더욱 연구하고 다듬어야 할 많은 과제가 남아있음을 보게 된다.
△목포지역운동사의 보다 과학적이고 역사적이며 체계적인 조명을 통해 운동의 맥을 잇기 위한 5.18 민중항쟁의 연구가 필요하다.
△지역운동사나 5.18 목포민중항쟁사가 몇몇 명망가의 중심이나 기억에 의존하는 운동사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목포민중항쟁은 목포 전체 대중의 것이 되어 목포 시민 자부심으로 남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심부가 주변부로 주변부가 중심부로의 이동이 있어야 하며, 또한 목포지역 열사 찾기에도 노력을 기우려야 한다.
이 이야기는 낭만적이거나 단순한 과거의 추억으로 축소시킬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들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이야기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오늘 우리의 삶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었고, 우리 민족이 참으로 사는 길이 무엇인가가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정리=최지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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