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유배살이 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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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유배살이 18년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6.05.26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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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의 다산이야기
▲ 박석무 다산연구소이사장

1801년에 일어났던 신유옥사(辛酉獄事)는 참으로 고약한 사건이었습니다. 국청(鞠廳)을 열어 국문(鞠問)을 통해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는 옥사는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인데, 대역부도 역적 죄인이 아니고는 쉽게 열리던 재판이 아니었습니다. 혹독한 고문에 사지가 찢겨나가는 아픔을 견디며 생사를 넘나들면서 문답이 진행되는 재판입니다. 40세의 정약용은 그해 춘옥(春獄:봄의 옥사)과 동옥(冬獄:겨울의 옥사)이라는 두 번의 국문을 받으며 천주교 신자인가 아닌가에 대한 답변을 얻어내는 수사와 재판을 받았습니다. 다산의 기록으로 확인해보면 재판의 결과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는 판결이 내려졌지만, 세력이 강한 단 한 사람의 재판관이 극구 반대하여 석방되지 못하고 긴 유배살이를 했노라고 말했습니다.

춘옥은 그해 초봄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고 정치적으로 몰락시킬 목적으로 일어난 옥사로 다산을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정치적 반대파들이 일으킨 사건인데, 목숨을 구해 다산은 귀양살이를 시작했습니다. 동옥은 귀양 사는 다산을 다시 국청으로 끌어들여 이제는 결단코 죽이고야 말겠다는 재판인데, 바로 황사영백서 사건으로 야기된 옥사였습니다.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가 아니고, 오직 정치적 반대당인 요인을 죽이자는 옥사였음을 다산의 기록은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때 교리(校理) 윤영희(다산의 가까운 친구)가 다산의 생사를 탐지하려고 대사간 박장설을 찾아가 재판의 진행과정을 물었다. 마침 홍낙안이 와서 윤영희가 옆방으로 피해갔다. 홍낙안이 말에서 내려 방에 들어와 발끈 성을 내며 소리치길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 한 사람을 죽이지 못하면 아무도 죽이지 않은 것과 같은데 그대는 왜 힘써 다투지 않소’라 하니, 박장설이 ‘저 사람이 스스로 죽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그를 죽이겠소’라 했다. 떠나간 뒤에 박장설이 말하기를 ‘답답한 사람이다. 죽여서는 안 될 사람을 죽이려고 두 번이나 큰 옥사를 일으키고도 나더러 다투지 않았다고 책하니 답답한 사람이로다.’라 했다.” (『사암선생연보』 1801년 10월 부분)

이 몇 줄의 기록이야말로 죄 없는 다산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오랜 유배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정치적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임에 틀림없습니다. 대사간으로 국청에서 수사와 재판을 직접 목격하여 죽일 수도, 귀양 보낼 수 없는 정약용을 끝까지 죽여야만 한다던 반대파 홍낙안의 입장이 바로 당시 노론 벽파와 공서파들이 합작하여 일으킨 신유옥사임을 밝혀주는 내용입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죄의 유무를 가리지 않고 권력이나 정권에 반대 입장이면 무조건 죽이고야 말겠다는 가혹한 권력의 횡포, 그것 때문에 역사는 후퇴하고 진실과 정의는 묻힐 수밖에 없는 불행이 계속되는 것 아닐까요. 다산의 억울함이야 학문과 사상으로 꽃이 피게 되었지만, 오늘에도 권력의 횡포 때문에 억울한 누명으로 시달리는 사람이 줄어들지 않으니, 역사의 불행한 구름이 언제쯤 걷힐 날이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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