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갇힌 유배인을 찾아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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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갇힌 유배인을 찾아서-1
  • 류용철
  • 승인 2016.08.24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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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마지막 유학자 무정 정만조
 

진도소리에 매료된 유배인의 12년 기록 은파유필(恩波濡筆)

물이 맑으면 머리를 감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진도의 예인 박덕인 소리에 젖은 지음으로 유유자적

 “선생은 뭔 일로 여기까지 왔다요?”
“…”
“유배길인 것 같은 디! 일본놈들이 나라를 아조 절단낸단디 그 말이 참말이요. 세상이 하도 시끄러워서 말이요. 작년에 난리가 났제! 동학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끌려갔제. 뭇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다 산으로 숨어들어 농사질 사람이 없어요.”

벽파진으로 건너가는 울돌목은 굶주린 호랑이의 울음소리처럼 으르렁 거렸다. 울물목의 바닷물이 뱃사공의 말을 삼키고 있었다.

서울 북창에서 태어나 글공부만 했던 정만조에게 이런 바다는 생소함을 넘어 생사를 넘나다는 두려움의 존재로 다가섰다. 일렁이며 울어데는 울돌목의 바다로 손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가 뱃머리를 놓을 수가 없었다. 바닷속 귀신이 사람을 빨아드리는 것 같은 착각을 할 정도였다.

뱃사공은 벽파진 나룻까지 내내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것이 판소리인지 이야기인지 구분이 않았다. 판소리 같으면서도 이야기로 들리고 대화를 하는 것 같으면서 음률을 타고 있었으며 음율을 타면서도 대화하듯 자연스러웠다.

“나 같은 시골 촌띄기가 뭘 알것소. 순응하면서 살아야제.”

“♬뱃사공이 적벽에서 자살하려는 󰁕굴원에게 물이 맑으면 ♬머리를 감고 물이 탁하면 발을 씻는다.”

무정 정만조는 진도 적벽진에 내렸다. 서울에서 출발해 꼬박 100일이 걸렸다.

아직도 금갑도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하루 밤낮을 걸어야한다. 서울에서 해남 우수영까지 수십 날을 걸어 왔던 탓에 다리가 퉁퉁 부어올랐지만 죄를 지은 몸으로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명량(鳴梁)이 무엇이냐! 큰 대들보의 울음소리이다. 그것은 바다의 울음소리였다. 인진왜란 충무공 이순신 12척의 판옥선으로 124척의 왜선을 무찔렀던 곳 아닌가? 왜군의 혼령이 아직도 울부짖는 것 처럼 들린다. 진도 사람들은 비록 적군이지만 왜군들의 시체를 수습해 무덤을 만들어주는 은덕을 베풀었다. 그런데 그 은공을 모르고 일본 놈들이 다시 대한제국을 집어 삼키려하고 있다.

이완용! 그 자는 알고 있다. 명성황후의 죽음이 누구의 소행인지. 일본 낭인들이 궁궐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했음도 자신에 그 죄를 물어 귀향을 보내다니! 참기 힘든 형벌이다. 고종 황제는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두려워 러시아 공사로 거처를 옮겼다. 나라의 상황이 풍전등화(風前燈火)에 놓였다. 일본놈들의 계략에 대한제국이 놀아나고 있다. 고관대작들은 나라의 위태로움은 살피지 않고 자신의 안위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해가 뉘엿뉘엿 서쪽 하늘에 걸려 있는 세방낙조는 붉은 색을 토해내고 있었다. 유배지인 금갑도에 도착했다.

 1896년 동학농민운동 수배로 국토가 유린되고
무정 정만조가 유배왔던 해인 1886년 진도를 비롯한 해남 등 전라도 지역은 동학농민개혁으로 초토화된 상황이었다.

1894년 1월 10일 고부군민들이 농민군을 조직하여 전봉준의 영도하에 폐정에 개혁을 요구하며 들불처럼 일떠섰다. 무능한 조선 왕조와 위정자들은 일본군과 청나라를 끌어들여 동학농민군을 토벌했다.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에세 패하였다. 그해 12월 2일 전봉준이 순창에서 체포되고, 이듬해인 1895년 3월 29일 교수되었다. 전국적으로 자행된 수천명 농민군의 처형을 끝으로 동학농민 전쟁은 끝이 났다. 자력에 의한 혁명조차 봉쇄되고 말았다. 실로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동학농민군에 개입했던 농민들은 고향을 등지고 산골짜기로 숨어들어야했다. 무안과 해남 등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김개남 등 동학농민군이 득세했던 고창의 경우 지역 토착 성씨가 24개에서 8개만 남고 사라졌을 정도였다.

동학농민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반도에 입국한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 내 기득권을 잡기 위해 남의나라 국토에서 전쟁을 벌여 조선반도 산하를 유린한다.

일본군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청나라를 끌어들인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당시 무정 정만조는 강위의 문하에서 수학해 문학에 일가를 이루었다. 1884년(고종 21년) 교섭통상아문(交涉通商衙問)의 주사가 된 무정은 1889년 25세의 나이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장원급제한 뒤 신문명에 눈을 뜬 김홍집 내각의 개화파 지식인과 교류하면서 예조참의와 승지를 거쳐 1894년에는 내부참의에 이르렀다.

무정은 당시 주도 세력인 여흥 민씨 일파와 대립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휘말리면서 이완용의 모함으로 1896년 4월 고종의 특명으로 우낙선과 함께 유(流) 15년형에 처해져 진도에 유배된 것이다.

무정은 동래 정씨 정원용의 아우 정윤용의 손자이다. 정원용은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대의 5대에 걸치는 벼슬했다. 정원용 고택은 윤보선 고택, 안동김씨 김병기, 대원군 이하응의 운현궁, 민비 친정 척족인 여흥민씨 일족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정원용의 손자로는 위당 정인보가 있으며 무정은 무당과 사촌간이다. 무당은 일제강점기 무정을 친일 학자라 비판했을 정도로 강직했다. 한 사람은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한 사람은 친일 학자의 길을 가는 얄궂은 인생의 아이러니의 단편을 보여주었다.

 

 
진도에서 서민들의 삶을 보고 기록을 하다
무당은 금갑도에 도착하면서 문재를 바탕으로 진도의 시민들의 생활을 기록했다. 당시 유배지에서의 적적함도 시로 읊을 정도로 시문에 박학다식했다.

무정은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다가 파도 소리 들리는 진도 바닷가에서 살게 된 심정을 노래한 시로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마시는 삼배주(悲歡榮췌三杯酒)’가 있다.

 비바람 부는 강산에 외로운 등불 (風雨江山一點燈)
꿈속은 어쩐 일인지 먼 길이 없고(夢裡尋常無遠道)
바닷가에 쫓겨오니 친한 벗이 적구나(天涯零落少親朋)
공명도 초두객에게 주는 것은 다 했으니(功名盡付焦頭客)
화복은 두구 구승과 무슨 관계 있을까(禍福何頭坵口僧)
뜬구름이 하루 종일 태양을 가렸으니(擧首浮雲終蔽日)
높은 곳에 올라가 고릉이나 바라보자(登高憔意望고陵)

 무정은 적막한 유배생활을 진도 주민들과 교유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은 듯하다. 그는 매일 심경변화와 진도 주민들의 생활풍습 기록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은파유필(恩波濡筆)은 그렇게 태어났다.

그는 은파유필에 진도까지 유배되어 오기까지의 경로와 유배생활 중에 본 여러 가지 신기한 진도지역의 풍물과 진도 주민들과의 만남 등을 꼼꼼히 기록했다.

이 책에는 총 157수의 시가 실렸으며 진도의 세시풍속과 재미있는 민속놀이가 기록돼 있어 진도지역의 민속학을 연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다정한 친구들과 흥겹게 보낸 답교놀이가 있는가 하면, 비 내리는 들판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흥겹게 노래 부르며 마시는 탁주에 대한 묘사도 있다.

또 담 넘는 놀이, 바느질 놀이, 외 땀 놀이 등 추석에 행해졌던 진도의 여러 민속놀이 등에 관한 이야기는 백미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이 책에 묘사된 1890년대 진도의 강강술래 가사는 최고(最古)의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것은 현존하는 강강술래 기록으로 최고로 치며 전라도 지역 강강술래 유래에 대한 연구자료로 활용되고 있을 정도로 훌륭하게 묘사돼 있다.

겹돌마기 홑치마를 곱게 지어 입고
떼를 지어 나온 사람 구름처럼 많고
꽃다운 젊은 날이 날 버리고 가는데
강강술래 노래하니 젊은 사내들 찾아 온다
춤추는 모습은 좌우로 돌고 돌아
노랫소리 연연한데 즐겁고도 처량하네
웃으며 즐기고 이 한밤을 다 지새우니
등불 밝혀 길쌈할 때 세월 가는 줄 몰라라.

 진도 70세 예인(藝人) 박덕인의 지음(知音)
무정은 진도 주민들과의 왕래가 잦으면서 자연스럽게 ‘진도 소리’와 마주하게 됐다. 사람의 마음을 잡았다, 놓았다 하면서 또 어느새 웃기며, 울리고, 마음을 또 소스라치게 놀라게했다가 휘몰아치는 태풍처럼 휘감았다 놓기를 반복하는 그 소리에 무정은 반했을 것이다. 처음 벽파진을 넘어올 때 어부의 소리처럼 이야기하는가하면 가락이 있고 가락이 흐르는 듯했다가 어느새 음율에 맞춰 장단이 이루어지는 그런 소리말이다.

무정은 자신보다 43세나 더 많은 박덕인(朴德寅)과 행복한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박덕인은 진도의 예인(藝人)으로 젓대(대금)의 명인(名人)으로 대금 산조를 창시하고, 진도아리랑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예인(藝人)의 아버지' 박종기(朴鐘基)의 아버지이다.

정만조(鄭萬朝)는 박덕인(朴德寅)을 만나 비로소 진도의 뛰어난 민속예술문화인 진도 가락에 한껏 심취하게 된다. 정만조는 '贈歌者 朴德寅(노래하는 사람, 박덕인에게 바침)'이란 시에서 박덕인(朴德寅)의 뛰어난 예술적 경지를 장편의 시로 기록했다.

“바닷가에 쫓겨오니 친한 벗이 적구나(天涯零落少親朋)”라고 한탄하던 정만조(鄭萬朝)는 유배 와서 5년이 지난 1900년, 자신보다 43세 위인 박덕인(朴德寅)이라는 칠십여 세 된 노인과 '예술(藝術)'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진한 우정(友情)을 나누게 된다.

'노래하는 사람, 박덕인에게 바침(贈歌者 朴德寅)'이란 시를 지었다.

'노래한 사람은 나이 칠십여 세인데 가곡에 우아함과 속됨, 맑음과 탁함, 느림과 빠름, 슬픔과 기쁨에 모두 능숙하였는데 그만둔 지 20여 년이 되었으나 나를 위해서 베풀어주었다. 또한, 무용에도 능숙하고 더욱이 가야금과 퉁소를 부는 데 능하였다(歌者七十余歌曲雅俗淸濁緩促哀愉無不極善廢止二十余年爲余如發云又能舞尤工於伽倻琴及吹簫笛)'라고 칭송했다.

예인(藝人) 박덕인도 자신의 예술(藝術)을 통해 멀리 서울에서 진도까지 유배 온 유배인(流配人) 정만조에게 삶의 기쁨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무정의 학문적 식견과 진도 소리인 예술은 교감을 넘어 소리를 알아주는 진정한 지음(知音)이었을 것이며 70세 예술가에게 삶의 관조와 새로운 인생의 지침이 생겼을 것이다. 소리가 기쁨을 주고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소리는 소음을 떠나 예술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운림산방에 서당을 열고 미산 허형을 만나다
무정은 미산 허형의 도움으로 의신면 사천리 소치 허련의 운림산방에서 방 한 칸을 얻어 학생들을 가르치다. 이후 동외리 가막골에 '자유당(自由堂)'이라는 서당을 열었다. 자유당은 매우 번성해서 한창 때는 학생이 1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때 일본에서 대학을 마치고 돌아온 안국선이 무정과 손을 잡고 서당을 광신(光新)학교로 바꾸고 자신이 교장이 됐다.

무정이 글방을 열었을 때 제자로 찾아온 사람 중에는 여덟 살이던 허백련도 있었다. 무정은 허백련이 열다섯 살이 되자 논어의 한 구절 '굳세고 튼튼하며, 기운과 성질이 단단하고 과감한 것, 생김새가 질박하고 표정을 꾸미지 않으며, 말씨가 더듬는 듯 느린 것은 인에 가깝다(剛毅木訥近仁子路篇)'에서 '의(毅)'자를 따서 '의재(毅齋)'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실제로 의재는 어렸을 때 말을 더듬었다고 한다. 무정은 논어의 글귀를 인용한 호를 지어줌으로써 말을 더듬는 의재가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미산는 혈통으로 유달산에 남농을 두고 법통으로 무등산에 의재 허백련을 두었다. 그 그곳에 무정의 가르침도 한몫했을 것이다.

운림산방은 1857년 소치 허련이 50세 때 고향인 진도에 돌아와서 지은 집이다. 이해는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타계한 이듬해이자 소치가 지천명의 나이가 된 해이다. 소치는 1893년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잠깐씩 출타한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곳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다.

소치의 뒤를 이은 2대 화가는 넷째 아들인 미산 허형이다. 미산이라는 호는 원래 소치의 장남인 허은(許溵)의 호였으나, 재질이 뛰어났던 장남이 19세로 일찍 죽자 넷째인 허형이 형님의 호를 물려받은 것이다.

미산은 구한말의 격동기와 한일합방이라는 역사적 격동기를 살아야 했기 때문에 아버지만큼 활동하지 못했다. 63세 때 제2회 선전에 출품하여 입선하는 등 늦게나마 작품세계를 인정받기도 했으나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생계를 위해 그는 운림산방을 떠나 강진 병영으로 갔다가 여의치 않자 다시 목포로 이사를 하게 된다. 그는 화필을 들고 이곳저곳 부잣집 사랑채에 기거하면서 그림이나 병풍을 그려주고 돈이나 곡식을 얻어 와야 했으니,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개척할 여유는 없었다.

녹우당에서 첨철산 운림산방에 이르는 길은 소치가 맡았지만, 운림산방에서 다시 무등산과 유달산의 양대 맥으로 확산되는 중간 연결고리는 미산이 담당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민산 자신은 크게 빛을 보지 못했지만, 그 혈손인 남농과 법손인 의재를 통해 크게 빛을 본 셈이다. 이 중심에 무정의 가르침이 있을 것이다.

의재 허백련 삶의 철학적 기반을 다지다
의재 허백련은 형연으로는 진도의 허씨로서 소치의 방손이자, 소치와 미산의 운림산방에서 학문과 그림을 계승한 법손이다. 의재는 전통적인 남종화의 문기(文氣) 어린 화풍을 고수한 인물이다.

진도에서 태어난 의재는 운림산방의 미산 문하에서 처음 그림을 접했으며, 20대에는 6년동안 일본에 머물며 우에노공원 아래 있는 일본 남화의 대가 고무로(小室翠雲)의 화숙에서 남화를 연마했다. 그리고 귀국하여 무등산 마루턱에 춘설헌이라는 집을 짓고 시 서 화 삼절에 모두 능한 전통적인 문사의 삶을 살았다. 의재는 민족의 진로를 걱정하는 지사이기고 했다.

 귀향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가다
금갑도에 머물렀던 무정의 박학다식함은 소전 손재형의 조부 손병익에까지 알려졌다. 그는 무정을 진도읍 교동리 생가에 초청해 학문을 토론하고 많은 대화를 나눴다.

현재 소전의 생가터에는 '삼성사'라는 사찰이 자리하고 있고, 그 이웃한 자리에 흘렀던 천(川)에는 무정이 직접 쓴 것으로 보이는 '무정은천(茂亭恩泉)'이라는 글씨가 돌에 새겨져 있다.

진도 유배 15년은 고종이 일본의 의해서 강제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자 유배 3년이 짧아진 1907년 귀양이 풀렸다. 무정이 12년 동안 유배생활을 마치고 벽파진에서 우수영으로 나아가는 배에서 어부는 진도소리를 불러주었을지 모른다. 울돌목의 파도는 어부의 진도소리를 삼킬듯이 으르렁거렸지만 서울로 가는 무정 정만조에게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이 있을 것이다. 무정은 서울에 올라와 성균관 대제학, 규장각 부제학 경학원 대제학을 역임하고 합방 후 고종 실록과 순종실록 편찬을 담당하는 등 친일 한학자로서 이름을 올리게된다.

“♬뱃사공이 적벽에서 자살하려는 굴원에게 물이 맑으면 ♬머리를 감고 물이 탁하면 발을 씻는다.”

유용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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