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대한 배드민턴협회 김영섭 전국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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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대한 배드민턴협회 김영섭 전국 부회장
  • 최지우
  • 승인 2016.09.28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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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회장의 파란만장 인생 성공기-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과학의 발달로 생활이 편리해지면서 여가시간이 길어진 현대인들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수로 생각하는 한 가지가 운동이다. 전국적으로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운동열풍이 불고 있다. 그래서 인기있는 운동 종목의 선수들은 엄청난 인기와 함께 부를 누리고 있으며,운동을 직업으로 삼아 선수와 지도자로 생활하는 전문체육인은 국가와 지역 단체를 대표하는 프로로 본연의 임무를 다하며 열과 성으로 자신의 실력을 키우고 있다.

그리고 생활체육인이라는 용어가 말해주듯 각자 편리한 시간에 좋아하는 운동을 즐기는 일반사람들 또한 400만을 넘어섰다. 전문체육인과 생활체육으로 양분화 되어 있던 우리나라 체육정책이 지난 3월 커다란 변화를 맞이했다. 생활체육과 전문체육, 학교체육이 선순환 하는 선진 스포츠시스템을 바탕으로 언제 어디서 누구나 손쉽게 운동을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전문체육인 단체인 대한체육회와 생활체육인들의 단체인 국민생활생활체육회가 통합을 했다. 각 종목의 통합과 각 지역 단체들도 하나의 협회로 합쳐지고 있다.

그 중 배드민턴의 통합은 대한체육회의 모범 사례로 꼽히고 있으며 특히 통합배드민턴협회 전국 부회장에 전남배드민턴협회 김영섭 회장이 선출되어 지역사회 화제가 되고 있다. 이례적으로 생활체육인이 전국 부회장에 당선되며 체육계를 놀라게 했지만 전문체육인들과 생활체육인들의 소통의 가교 역할을 하며 성공적인 통합을 마무리한 능력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 인정받았다. 지난 7월엔 대한체육회 창립 96주년 기념식에서는 체육유공자로 선정 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기 국민생활체육 전국배드민턴대회 등 다양한 전국대회를 전남지역에 유치하여 성공적으로 치러내 전남을 전국 최고의 명품 배드민턴도시의 반열에 올려놓은 결과다.

 

김영섭 회장은 14년 전 친구들과 단순하게 건강을 위해 배드민턴을 시작했고, 이제는 절대 소홀히 할수 없는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그리고 5만 명 회원을 자랑하는 통합 배드민턴협회를 대표하는 리더로 우뚝 섰다. 김영섭 통합 배드민턴 전국 부회장을 만나 그의 살아가는 얘기를 들었다.

“전남 내 30개 통합 대상 중에서 배드민턴이 제일 먼저 통합했다. 선수가 120명 지도자가 50여명 이다. 반면 동호외원들은 약 5만 명이다. 통합 과정에서 알력과 자존심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생활체육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부회장이 되었기에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담도 된다”며 당선 소감을 밝혔다.

중책을 맡아 활동하고 있는 김영섭 회장은 일 년에 4주 정도 쉰다. 비시즌인 12월~2월 빼고는 매주 경기가 있기 때문이다. 협회에서 주관하는 대회가 6개, 승인하는 대회가 21개 있다. 그 외 전국대회가 6개 정도 있고 위와 같은 공식행사 말고 시‧군자체 행사도 있다. 확실한 사명감이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할 고된 강행군이지만 날로 발전해가는 선수들과 동호인들의 실력을 볼 때면 감사와 함께 보람을 느낀다.

운동경기 중 유일하게 단일 종목으로 먹고 사는 일이 해결 되는 종목은 배드민턴이란다. 목포만 해도 10여개의 전문 샵이 성업 중에 있다. 목포가 클럽수도 많고 동호회원들도 많은 편이어서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단다. 하지만 전문지도자가 부족한 상태다. 그래서 생활체육인으로 왔다가 전문가의 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전문체육인 양성을 위한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한 이유다.

“현재 지역에 초‧중‧고 선수들만 90여명이지만 우리지역 대학 전문팀이 없다.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갈 수 있는 학교가 많지 않다는데 가장 큰 문제점이고, 대학을 졸업한다 해도 갈 수 있는 실업팀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현재 전문체육을 육성하지 않은 시군이 일곱 군데 있다. 재정자립도가 단단한 시‧군에 전문체육인 육성을 유도할 계획이다, 도내 1천명이상의 조직원이 있는 기업을 대상으로 한 실업팀 조성도 권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지역의 양질의 선수들 유출을 막을 수 있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선수들이 실력도 늘어날 것이다”는 앞으로의 포부를 밝혔다.

강력한 리더십과 포용력으로 협회를 이끌고 있는 김영섭 회장은 무안해제 출신으로 영화 같은 파란만장 그의 지난 삶은 김회장을 아는 이들에게 놀라움과 감동을 주고 있다.

 

김회장은 초등학교만 일곱 군데를 옮겨 다니며 7년 만에 졸업할 만큼 험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공식적인 최종학력은 중학교 공부 2달이 전부다. 무안해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연희전문대학을 졸업한 인텔리였지만 정치를 하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김영섭 회장의 인생 전환기는 꽃보다 더 예쁠 나이인 7살에 찾아왔다. 부모님이 헤어지면서 아버지 와 단둘만의 삶이 시작 된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목포, 나주, 임자 등 전남 도내를 떠돌며 생활하게 된다. 삶의 의욕을 상실한 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비관하며 술로 자신을 달랬고 결국 간경화를 앓게 되었다. 나주에서 생활하던 중 김 회장의 아버지의 병이 악화 되었다. 어린 김회장이 감당하기엔 벅찬 상황의 연속 이였지만 속 깊고 어른스러웠던 어린 김영섭은 모든 걸 받아들이며 나름대로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한다.

“초등학교를 자주 옮겨 다니다 보니 학교 성적이 좋을 수가 없었다. 항상 꼴찌였는데 4학년때 구국여성 봉사단에서 주는 상을 받았다. 인사를 잘했다는 이유였다. 아버지가 너무 기뻐하고 행복해 하셨다.  아는 사람들에게 아들이 천재라고 자랑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상 받을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글짓기와 웅변을 특히 잘 했다. 글은 삶에서 나오는 글을 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병세는 악화 되었고 어린 아들에게 더 이상 짐이 될 수가 없어 신안 임자도로 떠나게 된다. 나주엔 어린 김 회장 혼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싹싹하고 영리했던 김회장을 예뻐했던 친구 아버지와 선생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5학년 때 임자도로 아버지를 찾아간다.

임자도에서 병든 아버지를 돌보며 생활하며 중학교 입학을 했지만 가난 때문에 학업을 계속 할 수가 없었다. 입학 후 두 달 간의 학교생활을 마지막으로 생계를 위해 서울로 돈을 벌로 떠나게 된다. 하지만 두 달 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병세가 악화된 아버지는 고향인 해제로 돌아갔고 동네 사람들의 보살핌 속에 사망을 한 것이다. 동네사람들의 도움으로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준 동네 어르신들이 너무 고마워서 일 년간 농사일을 거들며 해제에 머물렀다.

그러다 동네 선배의 권유로 15살 때부터 목포에서 자동차 시트 카바 만드는 가게에 취업, 자동차 관련 기술을 배웠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밤 9시까지 일을 해야 하는 고달픈 시절 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에는 목포에 1500여대의 차가 있었는데 그중 택시가 500~600대 였다. 그런데 펑크 수리점은 딱 3곳 뿐 이였다. 당시에는 도로 상황이 안 좋아서 한 택시가 두세 번 펑크가 나기도 했다. 직원 중 김회장이 가장 어렸기에 잠을 자다가도 두세 번 일어나는 것은 기본 이였다. 힘들었지만 힘든 줄을 모르고 살았다. 유년기의 생활이 너무 힘들었던 탓 이였다.

당시 한 달 월급이 2만3천9백 원 이였는데 한 푼도 쓰지 않고 저축을 했다. 최고의 기술자가 되어 자신만의 가게를 꼭 가지고 싶었다. 눈썰미와 손재주가 좋아 남들보다 빨리 18살에 모든 기술을 마스터 할 수 있었다. 그렇게 22살 되던 해 첫 직장 이였던 가게를 인수해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시작했던 첫 사업은 어린 나이와 경험 미숙으로 실패를 한다. 그를 챙겨주고 관리해줄 그 누구도 없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몰랐다. 늘어나는 빚 때문에 사업을 정리하고 또 다시 월급쟁이 생활을 하며 미래를 설계했다.

한참 일할 때 징병검사 통지서가 왔다. 암담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징병검사면제대상제도가 있었다. 병무청장에게 편지를 써 자신의 처지를 알리고 징병검사 면제를 부탁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병무청의 확인 후 군대를 면제 받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도 하고 보석 같은 아이들도 얻었다. 다시 시작한 가게는 30세까지 엄청난 성공과 부를 가져다주었다. 매일 점심시간이면 20여명이 가게에서 점심을 먹고 머물 만큼 가게는 북적거렸다. 그렇게 성공이 영원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IMF는 또 다시 그의 모든 것을 앗아 가 버렸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나니 빚만 4억 5천이 남았다. 그중 2억 5천은 차용증도 없는 상태였다. 매일 매일 가게를 찾아오는 채권자들에게 열심히 일해서 갚을 것이다. 나 떠나지 않는다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 시키며 재기에 힘썼다. 그렇게 또다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주위의 도움과 가족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두 번의 실패를 교훈삼아 차근차근 자신의 입지를 키워갔다. 하지만 우직스럽게 앞만 보고 달리던 예전의 자신이 아니었다. 주위를 살피며 잠시 쉬어가는 여유를 가질 줄 아는 넉넉한 사람으로 변해갔다. 그때 배드민턴을 시작했고 지금의 위치에 오게 된 것이다. 지난했던 세월을 이겨내고 희망의 아이콘으로 거듭 난 김영섭 회장의 안정된 오늘의 모습은 하면 된다는 긍정의 메시지를 전하기에 충분했다.

김회장의 임기는 2020년 12월까지다. 그는 자신이 꿈꿔 왔던 협회가 된다면 미련 없이 내려올 생각이다. 임기 중 가장 시급하게 불평등한 체육관 대관료를 바로 잡을 생각이다. 타향이지만 제2의 고향이 되어 노후를 보내게 될 목포를 위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계획이다. 뚝심과 끈기, 어려운 환경을 이겨낸 값진 경험을 바탕으로 전문체육인, 생활체육인 모두를 위해 꼭 필요한 전문인이 되기 위해 오늘도 전국 코트를 누비고 있다.

최지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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