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의 이름 : 영산강과 다도해

목포대 강봉룡 교수

2017-06-08     목포시민신문

도시의 인문정체성이란 그 도시가 처한 독특한 지리환경과 역사경험이 상호작용하면서 오랜 기간 형성되어온 무언가를 말한다. 목포라는 도시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먼저 목포의 지리환경적 특징은 바다로 나가는 항구라는 점과 그 앞 바다가 수많은 섬들로 이루어진 다도해라는 점이다. 목포의 역사경험에서 두드러진 것은 1897년 개항과 함께 도시로 급성장한 근대도시라는 점이다. 목포의 정체성을 ‘다도해의 모항 목포’로 설정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을 숙고한 결과물임을 밝히면서, 그 내력을 간략히 소개하기로 한다.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강봉룡 원장의 ‘인문도시 목포 : 다도해의 모항 목포의 희망 만들기 인문담론’편에서 목포의 역사적 정체성을 담아내는 부분을 발취해 4회에 걸쳐 연재한다.

‘목포’의 이름 : 영산강과 다도해

‘목포’란 이름은 ‘강과 바다가 만나는 길목의 포구’란 의미에서 연원한다. 강은 영산강이고 바다는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서남해이다. 따라서 목포는 원래 특정 지명이 아니었고 강과 바다가 만나는 막연한 지점을 가리켰다. 고려시대에는 나주 영산포 인근의 지점을 목포라 불렀다. 그 당시엔 그 지점을 영산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으로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영산강 하구의 무안반도 남쪽 끄트머리 지점도 목포라 부르면서 두 개의 목포, ‘나주 목포’와 ‘무안 목포’가 공존하기도 했다.

영산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 복수화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던 것이 1439년(세종 21) 4월 ‘무안 목포’에 만호진이 설치되면서 ‘나주 목포’는 잊혀지고 ‘무안 목포’만이 기억에 남게 되어, 목포는 막연한 지점이 아닌 고유명사의 지명으로 획정되었다. 영산강 하구의 ‘무안 목포’가 마침내 목포의 ‘지명권’을 획득하여 오늘날의 ‘목포’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목포의 앞 바다는 서해와 남해가 만나고 수많은 섬들이 밀집하여 우리나라 최대의 다도해 해역을 이룬다. 서해와 남해를 연결하는 국내 해상교통로의 요지일 뿐 아니라, 서해를 통해 중국으로, 남해를 통해 일본으로 통하는 국제 해상교통로의 결절점에 해당하기도 한다.

서남해의 다도해 섬들은 국내외 해상교통로의 징검다리로 기능하였다. 일찍이 백제 등의 고대세력은 서남해의 여러 섬들에 고분과 성곽 등을 조영하여 고대 해상교류의 흔적을 남겼고, 9세기 전반에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하여 예의 해상교통로를 통해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주름잡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장보고 해상활동의 유산을 계승하되 교류의 거점을 완도에서 영산강변으로 옮겨와 나주의 회진포와 영암의 상대포가 국내와 동아시아로 통하는 해상교통로의 중심 포구로 부상하였다. 당시 흑산도는 한중 해상교통로의 거점 섬으로 기능하였다. 이즈음에 잘나가던 나주 회진포 인근의 지점을 ‘강과 바다가 만나는 길목’으로 인식하여 ‘목포’라 불렀던 것이니, 이것이 앞에서 말한 ‘나주 목포’인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 목포 만호진 설치를 계기로 영산강 하구의 ‘무안 목포’가 지명권을 획득하게 되었지만, 목포는 포구도시로 시원스럽게 성장하지 못했다. 이는 조선이 국제 해상교류를 금지한 ‘海禁정책’과 섬에서 사람을 살지 못하게 한 ‘空島정책’을 지속적으로 강행했던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또한 목포에 넓은 배후 공간이 없었던 것 역시 목포가 큰 도시로 발전하는데 제약 요인이 되었을 수 있다. 결국 조선시대 목포는 국내외 교역의 거점 포구로 발달하지 못하였고 목포 만호진도 조운선이 경유하는 요해처를 지키는 군사적 요새에 가까웠다. 만호진의 수병들은 주로 병선을 타고 해상을 방어(‘船上守禦’)하는 임무를 수행하였고, 만호진은 병선의 기항지 및 보급처의 역할만을 수행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목포는 유달산 기슭에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일개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목포대 강봉룡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