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동 법무사 칼럼

관매도 향연 (1)

2017-09-20     최지우

[목포시민신문=최지우기자]1995. 9. 28. 새벽. 목포에서 진도군 조도면 관매도로 향하는 유일한 선박인 신해 호를 향하여 수상한 두 사나이가 손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 어둠속을 서서히 다가서고 있었다.

앞에 선 사람과 뒤에 줄을 잡아당기며 따라가는 사람이 올망졸망한 가재도구들에 가려 도무지 형상을 알아볼 수가 없었는데, 경사가 심한 철다리를 건너는 동안 뒤따라가던 사나이는 여지없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줄을 잡고 미끄럼을 타고 있었다.

그 많은 짐을 신해 호 앞 공간에 차곡차곡 쌓는데 상당한 시간이 경과하였고, 둘이는 아무 말 없이 선술집에 들러 아침부터 술잔을 기울였다.

앞에 계신 분은 이제는 하늘나라에 집을 지으신 병윤 형이었고 뒤따라가던 사나이는 불초한 소생이었다.

그날 9시경 출발한 배는 해남 부근 산천을 이리저리 지나고 진도의 크고 작은 섬들과 마을을 느린 비디오처럼 보여주며 하염없이 가고 있었는데, 오후 2시 반경에서야 겨우 관매도 선착장에 도착하였다.

93년 제주도에서 시작된 이산의 연장선인 관매도 생활이 시작되었고,  초등학교 2년 철부지 딸과 유치원생 아들, 허리가 온전치 못하였던 장모님과 처를 남겨두고 다음날 새벽 진도에 있는 팽목항으로 되돌아 나서는 발길에 한없이 무너져 내리는 가슴을 달랠 길이 없었다.

모두가 내 부덕의 소치였다.

이후로 교통수단이 원만하지 못하여 이따금 토요일 근무를 마치면 진도의 팽목항으로 숨 가쁘게 달려 상 조도까지 가는 철부도선에 승선하였다가, 올망졸망한 짐들과 함께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 배에서 내려, 또다시 택시를 타고 읍구 선창으로 이동을 하였다.

그곳에서 전화를 하여 관매도에서 운행하는 개인 배를 불러 섬으로 가는 여정이 말이 쉽지 물때가 맞지 않으면 짐을 지고 몇 개의 바위를 타고 넘어 오가며 짐을 실어내려야 했다.

수심이 얕아 2구 선창에 배를 대노라면 손수레를 끌고 운전석에는 조 여사가 있었고 양옆에는 나의 어린 딸과 아들이 팔짝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은 흑백영화 속의 한 장면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그 무렵 운전도 할 줄 모르던 나를 몇 차례나 팽목까지 데려다 준 동생들과 병윤 형은 너무나 고마워 지금까지 그 은혜를 잊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정작 당사자인 조 여사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훗날 관매도의 생활이 너무도 즐겁고 보람 있었다고 술회하였다.

몇 주 정도의 간격으로 이따금 찾아간 관매도의 풍광은 정말 환상적 이었다.

시원하게 펼쳐진 백사장과 해안선을 따라 켜진 가로등과 평균 수령 400년인 송림, 들어서는 뱃길에 늘어선 기암괴석, 주변의 각흘도, 영등도, 관매초등학교, 눈 덮인 설경, 2구 선창, 오가는 고깃배와 갈매기 등은 한없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밤 깊은 해수욕장에서의 방게 잡이. 백사장을 몽둥이로 때려 모래 속에 숨어있던 것을 자극하여 깜작 놀라 물기둥을 뿜어 올리면 호미로 모래를 파헤쳐 잡아내는 모시조개, 2구 바닷가 바위틈에 자리 잡은 청색 게 잡이 등은 너무도 재미있는 추억이었다. 

다음해 여름철에는 관매도 전체가 외부 관광객으로 가득 찼었는데 마을 주민 만나기가 오히려 힘들던 시절이었으며, 조 여사는 환자들 돌보느라 동분서주 하면서 아이들 점심도 먹이지 못하였고, 아예 애들도 해수욕장에서 하루해를 꼬박 보내고 집에 들어오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들었다.

그해 해수욕장 목욕탕에서 만취한 상태로 실신하여 심장 박동이 멎었던 20대 초반의 아가씨는 용케도 조 여사의 심폐소생술에 의하여 극적인 삶을 연명하였고, 옷까지 빌려 입고 육지로 나간 뒤 소식이 아예 끊어졌다.

마침 동문 권투부 후배들이 야영 훈련을 왔다 하여 나름대로 음료수와 포도를 비롯한 과일 등 10여 가지를 고생고생 하면서 가지고 갔었는데, 딸이 햐얀 원피스를 입고 고무 줄 놀이를 하고 있었고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 했다.

강렬한 햇볕과 바닷물에 의하여 온몸이 까맣게 착색이 된데다 눈동자만 유난히 하얗게 보이는데 무어
라고 표현을 해야 할지 만감이 교차하였다.

정작 식구들 몫의 과일 등은 챙기지를 못하였는데도 딸이 다짜고짜 가져다 놓은 포도를 보고 먹으려
고 손을 내밀자 큰소리를 쳤더니 영문을 모른 채 눈물을 펑펑 흘리며 서럽게 울었다.

나의 답답하였던 지론은 이왕에 주는 것이라면 포도 한 송이라도 건드리지 않고 깨끗하고 아낌없이 그대로 주어야 공덕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권투부 야영 훈련장에 캠프파이어가 있어 온 가족이 참석하였고 여기저기 포도가 굴러다니고 있는데도, 딸은 자존심을 세워 끝내 포도를 먹지 않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때 늦은 후회로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다.

스스로 선택하였던 계율이지만 나의 사랑하는 딸에게는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을 멍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염려로 정작 흘러간 세월을 거꾸로 돌려놓고 싶은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