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나쁜 고양이는 없다, 상처받은 고양이만 있을 뿐

김인숙 칼럼니스트

2019-02-20     목포시민신문

인간은 본디 양면적이기 마련이라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고 해도 만인에게 선인일 수는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일 인내하고, 고뇌하며 살아간다. 웃으며 건네는 안부 한 번에 수많은 속 뜻을 담고 있지 않은가. 나의 말 한마디가, 혹은 문장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악의 가득한 속삭임으로 바뀔 수도 있기에. 그러한 우리의 삶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함께 어우러야만 하는 우리의 관계 속에서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조금 피곤하지 않은가?

외롭고, 쓸쓸하지는 않나?

진정한 마음을 숨겨야 한다는 사실이 가끔은 끔찍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관계에서 오는 고독을 위로해주고, 때로는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고 위로해주는 존재도 있다.

바로 고양이다.

필자는 세상에 나쁜 고양이는 없다고 믿는다. 아니, 믿는 게 아니다. 세상에 나쁜 고양이는 없다 감히 단언할 수 있다. 당연하다. 고양이의 악의적인 행동을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던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은 고양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악질과 손톱을 세울 뿐이다. 그 조차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지 누군가를 상처 입히기 위함이 아니다. 누군가 보호해주지 않으면 상처받아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 누군가의 다정에 기대지 않으면 버림받아도 어찌할 도리 없는 연약한 존재.

이다지도 작은 생명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그 작은 손톱과 몸 부풀리기 뿐이라는 것이 가끔은 바보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자신을 버리고, 상처 입힌 인간에게 또다시 다가가는 것이 한심할 때도 있다. 조금 더 영악하고 이기적이게 굴었으면 좋겠다 바랄 때도 있다. 하지만 고양이는 늘 그렇게 살아간다. 영리하지도, 맹악하지도 못하면서 꿋꿋하게. 또, 그렇게.

고양이는 꿋꿋하게 살아가기에 가련하지 않다. 나약하고, 연약하지만 가련하지는 않은 것은 고양이는 바보같고 한심하게 살아가는 대신 단단하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의심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은 채로 매일매일을 살아내는 작은 생명. 그 작은 생명은 우리를 보다 더 용감하게 만들기도 한다. ‘나’를 위해서는 살 수 없던 하루가, 이 약하지만 가련하지 않은 존재를 위해서 내일을 살아가게 만든다.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우리의 추한 진실을 알고 있다. 또한 인간은 모두 그렇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믿고 마는 것이다. 이 작은 존재가 갖고 있는 힘을, 용기를, 미래를. 그것을 동경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그래서일까? 고양이의 그 투명하고도 맑은 눈을 마주보고 있으면 울컥할 때가 있다. 존재만으로 감사한 존재가, 위로까지 해주고 만다는 것에 감사해 기도하고 싶을 때도 많다. 그 수많은 상처 속에서도 그저 묵묵하게 버텨내고야 마는 작지만 강한 생명들은 분명하게 오늘도 살아있다.

피곤하고, 외롭고, 쓸쓸하고도 끔찍한 자신을 보다가 고양이를 볼 때면 스스로의 위선에 치가 떨릴 때도 분명 있다. 그렇게 눈물이 나올 때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위로를 얻는다. 인간이 평생을 바라지만, 차마 행할 수 없는 그 단단하고 꿋꿋한 모습에 위로를 얻고 마는 것이다. 고양이의 삶의 태도는 뭐라 형용할 수 없게 아름답기 때문이다.

모든 모순을 뒤집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

하지만 그렇기에 상처 받는 영혼.

우리의, 위대한 고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