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이야기-6] 원효와 하쟁사상

회통과 조화사상 원효에 이르러 원융회통의 화쟁사상으로 전개돼

2021-03-31     목포시민신문

화쟁(和諍)의 조화(調和)사상 모든 사상과 종파 묘합 도달
포용할 수 있는 넉넉함과 창신적(創新的) 원융회통 길 열어
우리 민족의 현실 타개와 민국(民國) 대동화합(大同和合) 이끌어

6. 원효와 화쟁 사상

[목포시민신문] 신라는 중국에서 들어온 유··(··) 삼교(三敎)를 포용하면서 이를 회통하고 조화시킴은 물론 이상적인 국가 건설의 이념과 정신으로 집약하여 승화시킴으로써 마침내 삼국을 통일하는 강력하고 번영한 나라가 되었다. 최치원이 鸞郎碑序(난랑비서)에서 밝힌 풍류도(風流道)나 원광의 세속오계(世俗五戒 : 화랑오계)에서도 이러한 회통과 조화의 정신이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회통과 조화의 정신은 원효에 이르러서는 불법(佛法)의 모든 이론과 종파를 묘합(妙合)한 원융회통(圓融會通)의 화쟁사상(和諍思想)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원융(圓融)이란 막힘이 없으며, 회통(會通)이란 하나로의 만남인 것이다. 그 결과 한국 불교는 통불교적(通佛敎的) 전통을 확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폭넓은 원효의 원융회통적 화쟁사상의 성격은 불법(佛法)을 넘어, 널리 민족의 고유신앙은 물론 여타 외래의 학문 사상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넉넉함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민족의 미래에 창의적인 통합적, 대동적(大同的) 대안(代案)을 제시하고 수립하는 바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 유학이 유입된 이래 유··도 삼교가 우리의 고유사상과 융합 회통하며 각각의 장점을 드러내고 상호 보완하며 국가를 경영하고 민중을 지도하던 것이, 고려 말 성리학(性理學)이 유입되면서부터는 성리학 자체에 내재한 배타적인 모습을 드러내어 우리의 고유사상 및 도교·불교 등을 이단 사설 미신으로 몰아세워 비판·배척·말살하고 독존적으로 사상계를 지배하여, 조선에 들어서는 유교입국(儒敎立國)을 국시(國是)로 하였으나, 초기의 경세실천적(經世實踐的) 유학은 중엽을 넘어서며 이론적 사변유학(思辨儒學)으로 변질되어 갔던 것이다. 사화(士禍)를 거듭하며 선비들이 원기를 상실하여 조정에 나아가 경세제민(經世濟民)에 힘쓰기보다 산림(山林)에 물러나 고답자수(高踏自守)하며 리기심성(理氣心性)의 성리(性理)를 논하는 것을 학자의 일로 아는 사풍(士風)이 일더니, 거기에 더하여 당쟁(黨爭)이 심화하며 유학의 폐풍은 나날이 더하여가고, 정권을 담당한 양반사대부들은 무능과 탐학(貪虐), 부패와 정쟁(政爭)으로 치달아 종말에는 그 말폐로 말미암아 기울어 가는 국운을 돌이키지 못하고 밀려드는 외세에 나라가 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특히 조선에 있어서는 주자학 자체에 내재한 공소(空疏)한 관념적인 문제와 사대부의 그에 대한 교조적 추종 및 배타성의 문제가 함께 야기한 잘못으로 볼 수밖에 없다. 본디 유학 사상에 내재된 벽이단론(闢異端論)에 더하여 주자학의 비판적 배타성이 여타 사상과의 조화나 견제를 이루지 못하고 독주하는 데서 오는 오만과 독선이 결국 스스로 자정할 능력을 잃자 그에 따라 집권 사대부 또한 부패와 탐학으로 치달아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구학(溝壑)에 몰아넣어 지탄과 원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경학(經學) 중심의 원시유교의 실천적이며 경세치용적(經世致用的)인 학문과 민생(民生)을 경시, 외면하고 관념적·사변적·이론적인 공소한 성리학, 즉 주자학의 철학적 탐구에 열심이었으나 당면한 국가와 민생의 문제에 하등의 실공(實功) 실적(實績)도 없이 공리공담을 일삼으니, 선비사회의 풍조가 자연 독선기신(獨善其身)과 문약(文弱)으로 흘러, 저 송나라에 문운(文運)이 성대하게 열리어 주자학을 꽃피워 냈지만 이민족에 허구한 날 시달리다가 결국 망했던 전철을 망각한 점이다. 이 또한 우리에게 은감(殷鑑)’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비록 한국유학 이야기라고는 하나 유교가 이 땅에 가르침을 편 이후 우리의 고유사상과 외래의 불교, 도교 사상 및 서학(西學) 등과의 사이에서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으며 우리만의 한국유학으로 발전하게 되는가를 살펴보는 일 또한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유학을 이야기하면서 신라 고승 원효의 화쟁사상을 언급하려는 것도 이를 바탕으로, 교조적 배타적 공리공담의 사변유학의 길을 버리고 개방적 포용적 경세 실천 유학으로 나아가며, 여타 인근 학문 사상과의 원융회통을 통한 대승적(大乘的) 통유학(通儒學)으로 창신 발전하여, 수시처변(隋時處變)의 시중지도(時中之道)를 구현하는 대안(代案) 유학의 길이 여기에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 우리가 처한 경제 안보 외교 정치 등 냉혹한 국제 질서 아래에서, 국민적 화합을 이루고, 국가적 역량을 결집시켜 민족국가의 번영을 이루어가야 하는, 중차대한 시대정신(時代精神)을 망각한 채, 편당(偏黨)과 분열, (, 우리만 옳고 너, 너희는 그르다는) 자시인비(自是人非), (내 편은 다 옳다며 그른 것도 서로 감싸며 돕고, 저들 편이 하는 일이나 의견은 옳은 것도 그르다며 배척하는) 동당벌이(同黨伐異)를 일삼는 망국적인 풍조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화쟁(和諍)은 신라의 고승 원효가 제시한 불교사상으로, 원융회통사상이라고도 한다. 다양한 종파와 이론적 대립을 소통시키고 더 높은 차원에서 통합하려는 사상으로 한국 불교의 가장 특징적인 사상으로 계승되었다.

원광과 자장에 의하여 싹이 튼 화쟁사상은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원효에 의하여 집대성되었고, 일찍이 그 어떤 불교인도 이루지 못하였던 화쟁의 논리를 확립시켰다.

부처가 지향한 이론이 온갖 모순·대립과 쟁론이 끊어진 절대조화의 세계인 무쟁(無諍)의 세계임에 비해, 원효는 모순과 대립이 있는 현실에서 모든 대립과 모순·쟁론을 조화·극복하여 하나의 세계로 지향하고자 했는데, 이것이 원효의 화쟁사상이다. 원효는 인간세계의 공()과 유(), ()과 속(), ()과 정() 등 대립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모두 일심(一心), 일리(一理), 일법(一法)이라는 것을 체득함으로써 대립되는 것을 동화시켜 나가는 원리를 전개시켰다.

갖가지 부처의 몸이 오직 하나의 법신(一切諸佛身 唯是一法身)’이라는 화엄경의 구절처럼, 원효는 불법(佛法)을 놓고 대립하는 다양한 이론들도 결국은 하나의 마음(一心)과 하나의 지혜(智慧)를 표현하고 있다고 보았다. 상대의 이론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서로 자신의 이론에만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쟁론이 그치지 않는 것이며, 편견과 집착에서 벗어나 마음의 근원을 향하면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여기서 각 이론이 집착에서 벗어나 다른 이론과 서로 소통하는 것이 곧 회통(會通)이며, 이를 통해 대립을 극복하고 더 높은 차원의 지혜로 나아가는 것이 곧 화쟁(和諍)이다.
원효는 학설과 이론을 나타내는 언어의 형식이나 표현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보았으며, 이론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논리를 통해 그 이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원효는 그 어느 교설이나 학설을 고집하지도 버리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나 분석하고 비판하고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논리를 융합하여 보다 높은 차원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았다. 모순과 대립을 한 체계 속에 하나로 묶어 담은 이 기본구조를 가리켜 그는 화쟁(和諍)’이라 하였다. 통일·화합·총화·평화는 바로 이와 같은 정리와 종합에서 온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기도 하였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고려 시대 의천과 지눌 등에게 계승되어 한국 불교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혜심의 유불일치설(儒佛一致說)이나 휴정의 삼교조화론(三敎調和論) 등에도 영향을 끼쳤다. 또한, 중국 화엄종을 체계화한 법장과 징관, 일본의 불교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러한 폭넓은 성격의 화쟁(和諍)의 조화(調和) 사상은 더 나아가 민족의 교유 신앙이나 유교 불교 등 여타 종교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넉넉함과 창신적(創新的) 원융회통을 이루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는 데에서도 그 의의가 자못 큰 것이다.

화쟁의 입장에서 보면 나(우리)의 생각과 의견, 주의나 주장, 정의와 진리가 모두 옳기도 하고 다 그르기도 한 개시개비(皆是皆非)’인 것이다. 작금에 사상과 이념, 종교와 학문이 혼재, 난무하여 서로 각립(角立), 갈등을 빚고 있는 우리 민족의 현실을 타개하여 민국(民國)을 대동화합(大同和合)으로 이끌어 나아갈 수 있는 길 또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이야기 7번째로' 백제의 유학과 남당제도'가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