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이야기 7] 백제의 유학과 남당 제도

왕인 일본에 논어 10권·천자문 1권 전해… 일본 문화 시조

2021-04-07     목포시민신문

국사 논의한 남당제도 ‘예기’기록에 남은 명당제도와 유사 
일상적 예법과 풍속, 행정제도, 정치, 교육 등 폭넓게 수용
아직기, 진손왕 등 유학자들 일 경학 전파 일본서기에 기록

삼국사기에 실린 백제의 사실(史實)은 신라나 고구려에 비해 매우 소략하다. 더욱이 유학과 관련된 것은 보잘것없어, 중국 측 사실(史實)을 통해 그 대강을 약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일본의 고대사기(古代史記)일본서기고사기등에 백제의 유학이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였음을 알려주는 기록들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백제는 북방에 살던 부여족 일파가 남하하여 세운 나라로 고구려와 같은 족속으로 전해진다. 백제를 구성하고 있던 백성들은 마한(馬韓) 계통의 사람들로 예부터의 토속적 풍속과 신앙을 지니고 있었으나, 점차 나라가 발전해 감에 따라 대륙과의 잦은 접촉과 유교의 영향을 받아 국속(國俗)이 차차 바뀌어 갔다.

삼국 시대 이전의 삼한(三韓) 시대 사람들은 초월적 존재를 신봉하고 제사(祭祀)하였다. 최치원은 지증국사비에서 마한에는 소도지의(蘇塗之儀)가 있었다고 기록하였으며. 삼국지마한조에서도 귀신을 신봉하고 소도(蘇塗)를 두었던 일에 대하여, ‘귀신을 섬기어 국읍(國邑)에 각기 한 사람을 세워서 천신(天神)을 주제(主祭)하였으니, 이름하여 천군(天君)이라 하였다. 또한 제국(諸國)이 각기 별읍(別邑)이 있었으니 소도(蘇塗)라 이름하였다. 그 소도를 둔 의의는 불교와 같으나 선악을 평가하는 기준이 다르다하였다. 이와 같은 것은 고대에 있어서 고유한 신앙으로서의 고신도(古神道)를 알려주는 것이다.

중국 사료 주서(周書)백제조에 실린 백제의 예법과 풍속을 살펴보면, 당시 백제인들의 엄숙 단정한 예법 질서를 볼 수 있고, 특히 여자들의 경우 미혼과 기혼에 따라 옷과 머리 모양을 달리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백제인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예의와 절도, 질서와 방정함이 생활화되어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 따라서 유교가 이미 백제인의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백제는 국가의 금령과 법제를 엄격히 제정하여 국가적 자주 역량과 기강을 확립하였다. 이 또한 주서를 통해 알 수 있으니, 반역자나 전쟁에서 뒤로 물러나는 자,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도둑은 유배시킴과 동시에 훔친 것의 두 배를 배상시켰다. 또 간음한 부인은 남편의 집으로 대려다 종으로 삼았다. 남녀의 혼례법은 중국의 풍속과 거의 같았으며, 부모와 남편이 죽으면 삼년상을 치렀다. 이러한 예속은 기자(箕子)의 팔조금법(八條禁法)을 연상케 하거니와,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양속(良俗)을 이루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삼한 시대에는 소도, 천신, 귀신 등 신비적 대상에 대한 신앙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러나 백제인들은 처음부터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면이 있어서, 하나의 제왕으로서, 지도적 통치자로서 천지에 제사하고, 새로운 왕이 즉위할 때마다 동명왕의 사당에 제사를 올렸으니, 이는 유교적인 조상숭배 정신과 종묘(宗廟)의 의미가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백제의 행정단위와 군사조직이 5분법으로 구성된 데서도 유교적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백제는 수도 경내 구역을 5부로 나누고 5부는 다시 5항으로 나누었으며, 지방은 5방으로 나누어 행정을 관할하였다. 이는 유교의 오행 사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의 정치기구로서 유학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 바로 남당제도(南堂制度)이다. 남당이란 본래 왕이 고관 대신들을 거느리고 조회를 받으며 정령(政令)을 하달하는 정청(政廳)을 의미한다. 남당은 삼국 시대 부족집회소가 발전한 중앙정치기구로서 백제나 신라에서는 이러한 남당 제도를 두어 임금과 신하가 모여 국가의 대사를 의논하고 결정했던 것이다. 특히 백제의 남당 제도는 예기의 명당(明堂) 제도와 관련하여 유교적 색채가 짙은 제도이다. 이 남당 제도를 달리 도당(都堂)이라고도 부르며, 고려 시대에 도평의사사라 하여 그 제도가 계승되기도 하였다. 또 조선 시대에 와서는 의정부라 하여 조선 초기부터 실시되었으며, 특히 군무를 결의하는 기관으로 비변사라 하는 기관으로 계속된 적도 있었다.

남당 제도는 백제나 신라 때부터 일찍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지만, 이 제도는 중국의 명당 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형식을 모방하기에 앞서서 백제나 신라에는 재래의 국속(國俗)이 있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원시적 의회제도로서 신라의 화백회의나 신라 초기의 육부 촌장들이 영산에 모여 국사를 결정했다는 것이라든가, 백제의 선주민인 마한에 소도(蘇塗)의 의식이 있어, 천신을 숭배하는 국중 대회를 열고 단합 정신을 기르며 신상필벌을 행했던 것이라든지, 또 백제의 지도자 선출의 한 방법으로 정사암(政事巖) 사적 같은 것은 남당 제도 이전의 원시 사회로부터 전래하는 중의를 모아 의결하는 옛 풍속의 한 제도라 하겠다. 이 같은 원시 사회의 재래 유속(遺俗)이 중국의 선진 제도를 수용하여 그 형식과 내용이 갖추어진 상태로 발전하여 남당 제도가 수립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기명당편에, 명당은 고대에 상제(上帝)를 제사하고 선조를 제사하며, 제후들을 조회 받고 노인을 양로하며, 어진 사람을 존경하는 것 같은 큰 예전(禮典)에 관한 것은 모두 명당에서 행하였다고 하였다. 이렇듯 명당에서 행하는 일과 남당에서 행하는 일이 같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고이왕 때 왕이 남당에서 정사를 보았다든가, 남당에서 동성왕이 군신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었다든가, 눌지왕이 남당에서 양로하였다고 하는 것들은 모두 명당의 제도와 상통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역설괘전의 기록을 보아도, ‘성인(聖人)이 남면하여 천하의 사정을 밝게 듣고 정사를 펴는 것이니, 곧 밝은 곳을 향하여 다스리는 것이라 하였다. 이곳에서도 남면(南面)과 향명(向明)의 관계를 알 수 있고 남()과 명()은 같은 뜻으로 사용한 것이니 남당 제도는 고대 중국의 명당 제도를 수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백제의 고신도적(古神道的) 정치 형태가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발전해온 것이다.

예기월령편을 보면, 명당은 남향(南向)한 집을 가리키는 것이니, 즉 남실(南室)이 다름 아닌 남당인 것이다. 남향(南向) 또는 남면(南面)이라는 용어는 제왕(帝王)이 만민을 다스리는 말로 쓰이고 있다. 논어위령공편에 공자가 말하기를, ‘억지로 함이 없이 다스린 이(無爲而治者)는 그 순임금이로다. 어떻게 하셨겠는가? 공손히 자신의 몸을 바르게 하여 남면(南面)할 따름이었다고 하였다. 이렇듯 남면이란 말은 왕도(王道) 정치의 이상을 상징하는 용어로, 밝은 곳을 향하여 밝게 살펴 밝은 정사를 편다는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남당제도에서 우리는 공명정대(公明正大)한 정치, 곧 공정과 정의를 구현하며, 국정 현안과 국가의 주요 정책에 지혜와 중론을 모아 합의를 도출하고, 독선(獨善)과 편당(偏黨), 독단(獨斷)과 전제(專制)의 유혹을 떨쳐 내며, 주의나 이념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동심동덕(同心同德)으로 국정을 운영함으로써 우리 민국(民國)의 미래를 새롭게 모색하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이 시대의 위정자들에게도 크게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또한, 일본에 유교를 전한 백제의 유학자들을 통해 백제의 유교적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서기(書記)를 쓴 고흥이나 일본에 학문을 전한 왕인을 통해 백제에 이미 박사의 칭호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그 밖의 문헌들을 통해 성왕 때 이미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의 오경박사(五經博士)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인은 일본에 논어10권과 천자문1권을 전해주어 일본 문화의 시조가 되었으며, 일본서기에 의하면 아직기, 진손왕, 단양이, 고안무 등 백제의 유학자들이 일본에 경학(經學)을 전파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백제 역시 일상적 예법과 풍속, 행정제도, 정치, 교육 등 각 분야에서 유교가 폭넓게 수용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백제의 유학자들이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유교 문화를 전파한 것은 백제 유학의 수준을 잘 말해주는 것이고, 역사적 의의 또한 크다 할 것이다.

 

/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이야기 8번째로 '고구려의 선배와 경당'이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