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 이야기 ⑪] 강수, 설총, 최치원과 문묘종사

문묘종사 국가적 제사로 가장 명예로운 일 조선前 문묘 배향 유학자 최치원 설총 안향

2021-05-07     목포시민신문

이병도 한국유학사서 강수 설총 최치원 통일신라 거유(巨儒) 기록

강수 순덕 겸비한 순유 불구 출신 성분 이유로 문묘종사 배제돼

[목포시민신문] 백제에서는 왕인, 아직기 등의 유학자들이 일본에 경학을 전하였고, 박사 고흥은 서기(書記)를 지었으며, 고구려에서는 태상박사 이문진이 고사(古史)를 요약하여 신집(新集)을 저술하고, 유기(留記)100권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유학사를 살펴볼 때, 태학을 설립하여 박사를 두어 학자를 양성하고, 사서(史書)를 편찬하는 등, 학술, 제도와 같은 것은 삼국통일 이전에도 있었으나, 개개 유학자에 대해서는 기록이나 자료의 부족으로 그 학문이나 사상을 거론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러한 단계는 삼국 통일 이후의 신라 유학자들로부터 비로소 거론할 수 있다고 보여진다. 이때 대표적인 학자로는 삼국사기·열전에서 다루고 있는대로 강수(强首)와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을 들 수 있다.

신라의 유학자 강수와 설총 및 최치원에 대하서는 다들 잘 알 터이니, 여기에서는 다만 후인들의 평을 중심으로 옮겨본다.

이병도는 그의 한국유학사에서, 강수와 설총은 통일신라 시대 초기의 거유(巨儒)로서 마치 당시 불교계에서의 원효·의상의 위치와 흡사하다 하였다. 즉 원효와 의상이 당시 불교계의 최고봉이었던 것처럼 강수와 설총도 당시의 유교와 문학계의 최고봉이었다는 것이다. 김충열 또한 이에 동조하여 그의 한국유학사에서, 이병도가 강수를 바로 원효와 비교하고 있다 하면서, 그도 또한 강수를 해동 유학의 제일인자, 곧 역사상 시단자(始端者)의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며, 특히 강수는 우리 유학 사상 처음으로 불교를 이단시하고 유학을 사문(斯文)으로 받들어 유교를 특수화시킨 사람이므로, 더더욱 해동 유교의 시조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하였다.

최치원은 후일 고려 현종 때 동국 문학(東國文學)의 개산조(開山祖)’로서의 그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문창후(文昌侯)라 추시(追諡)하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는데, 문묘종사의 은전을 받은 것은 최치원이 우리나라 선유(先儒) 가운데 처음이었다. 설총은 고려 현종 13(1022)에 홍유후(弘儒侯)라 추시하고 문묘에 종사하였는바, 이는 대개 이두(吏讀)로써 유교 경전을 해독하여 교수함으로써, 우리나라 유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기 때문이다.

강수는 무열·문무·신문왕의 삼대에 걸쳐 문장으로 보국하고, 유학을 독실이 받들어 신라 통일 초기에 유학의 시단을 연 인물이었다. 또 취처(娶妻)한 내력을 살펴보아도 강수는 학도역행(學道力行)과 의리를 중시하며 지행일치의 천리(踐履)에 독실한 유자였음을 알 수 있고, 한국 유학사상 처음으로 불교에 대한 유학의 우위를 강조한 점에서도 순유(醇儒)라 함이 마땅하다 하겠다.

최치원은 유학자이면서도 도(()에 심취하였다고 하여 이황으로부터 崔孤雲乃全身是侫佛之人(최고운내전신시영불지인)’이란 혹평을 받기도 하였다. 설총은 고승 원효의 아들로 처음에는 사문(沙門)에 들어가 불교 서적을 탐독하다가 환속해서는 유학 공부에 힘썼다.

이로써 비교 고찰해보면 강수는 정학(正學)에 문장(文章)에 순덕(淳德)을 겸비한 순유(醇儒)라 할 것인데도, 순유라기에는 다소 흠결이 있는 최치원과 설총은 문묘종사라는 은전을 입었는데, 강수는 왜 문묘에 종사될 수 없었을까. 그 선대가 임나(任那) 가량(加良) 사람으로, 경주계(慶州系)가 아닌, 중원경(中原京) 사량부(沙粱部)의 한미한 집안 출신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당시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인이 보기에 강수가 불교를 배척했기 때문이었을까. 애석할 따름이다. 마땅히 해동 유학의 시조로 추숭함은 물론이거니와, 수기경세(修己經世) 실천유학의 전범을 궁행으로 열어 보여준 해동 최초의 순유(醇儒)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한 인물이 백성을 위한 공이 있으면 사()에 모셔 향사(享祀)하고, 나라를 위한 공이 있으면 종묘(宗廟)에 모셔 향사하며, 학문과 도()를 위한 공이 있으면 문묘(文廟)에 모셔 향사하는 것이 유교 사회에 통용되던 제사의 원칙이었다. 따라서 도()와 관련하여 한 인물이 문묘에 종사되기 위해서는, 앞 세대 학문의 참 정신을 이어 다음 세대에 열어 주는 학문적 공이 있거나, 관직에 나아가 도덕 정치의 이상을 현실 속에서 구현했던 사업의 공이 있거나 아니면 도덕과 절의(節義)를 몸으로 실천하여 후세에 도덕적 전범이 되어야만 했다. 학문’ ‘사업’ ‘절의는 한 인물이 도를 제대로 구현했는가에 대한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것이며, 이러한 기준을 충족시켰다고 평가되는 지식인들은 세상을 떠난 후에 유림(儒林)의 공론과 조정의 논의를 거쳐 문묘에 배향됨으로써 도통(道統)의 반열에 들게 되었던 것이다.

도통은 학통과는 다른 개념이다. 학통은 학문이 전해 내려온 계통을 의미하는 말로, 학파에 따른 학문 경향과 학맥의 분위기에 따라 여러 학통이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통은 앞서간 한 인물이 유학의 참 정신을 이론과 실천을 통해 제대로 구현했는지에 대한 절대평가가의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나라 전체의 공론이나 조정의 의견이 하나로 일치하지 않으면 도통으로 인정받기 힘든 것이다.

문묘종사는 국가적인 제사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가장 명예로운 일이었다. 조선 이전에 문묘에 배향된 유학자는 최치원, 설총, 안향이다. 조선에 들어서는 중종 때에 이르러 정몽주를 배향하고, 이어 광해군 때에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숙종 때에 이이, 성혼, 김장생, 영조 때에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정조 때에 김인후, 고종 때에 조헌, 김집이 배향되었다. 이들을 세칭 승무명현18(陞廡名賢十八人)’이라 하며, 또한 국반(國班)’이라 자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묘종사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도통관의 전개도 그 기준과 근거가 시대의 추이에 따라 중점을 달리하는 가운데 시비 또한 많았다. 도통관 논의의 중점이 조선 전기에는 절의와 명분이 학문보다 중시되었고, 사림 정치의 시대가 열리면서는 학통을 내세우다가, 당쟁의 기운이 격화하며 학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시비와 논쟁의 와중에 배향(配享)과 출향(黜享), 복향(復享)이 반전되는 가운데 문묘종사의 위엄과 권위는 차츰 빛을 잃고 정치권력화 되어감으로써, 급기야는 서인(西人)이 독점 독식하기에 이르러, 서인의 학통이 곧 도통으로 변질되어 문묘종사도 그 의미를 잃고 말았다.

춘추좌전양공 24년에, ‘삼불후(三不朽)’(몸은 죽어도 이름은 불후한 것 세 가지), 가장 뛰어난 것은 덕을 세우는 일이고(立德), 그다음 뛰어난 것은 공을 세우는 것이며(立功), 그 다음은 말을 세우는 일(立言)이다. 이 세 가지는 비록 오래되어도 없어지지 않으니 이 때문에 썩지 않는다는 것이라 하였다. 예를 들어, 입덕(立德)은 성덕(聖德)을 세우는 것으로, 요임금 순임금이나 우왕·탕왕처럼 만세에 백성들이 그 덕을 흠모하는 것과 같다면, 입공(立功)은 크게는 후직이나 이윤, 부열처럼 민생을 두텁게 한다든지 나라를 흥성케 하고, 작게는 민족과 국가의 존망지제(存亡之際)에 사공(事功)을 세우는 것에 비할 수 있을 것이며, 입언(立言)은 공자 맹자처럼 만세에 가르침을 드리우는 것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조선에서는 도학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순덕(淳德) 고절(高節) 정학(正學), 혹은 도학(道學) 절의(節義) 문장(文章), 또는 학문 사업 절의를 꼽았던 것으로 보인다. 유학의 본령은 수기이안인(修己而安人) 즉 안으로는 수신(修身)으로 성인(聖人)에 이르는 것이요, 밖으로는 경세치용(經世致用)으로 민생을 도탑게 하고 세상을 평안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는 도학 또는 도통을 논의하는 데에 절의가 도학자를 평가하는 중요한 덕목이 된 것은 이채로운 것이라 하겠다.

어찌되었던 조선 후기의 도통론은 사림의 공론을 통합하기보다는 분열시키는 역기능이 많았다. 지식인의 순정성과 도덕정치의 구현보다 당파의 이익에 치중하고, 현실보다 이론에 집착하며, 민중의 권리보다 사대부들의 권력에 매몰되었던 것이다.

원래 도통과 문묘종사의 참뜻은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히고 지식인의 양심을 진작시키며, 모든 사회 성원이 숭상할 바를 알게 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이처럼 양심적인 지식인과 정치 지도자들이 갖춰야할 도덕적 순정성과 학문과 행실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유교 사회에서 도통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오늘날 되새겨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이야기 12번째로 '고려 초기의 유학'이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