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광장-김경완 시민기자] 드디어 수돗물을 맘껏 마실 수 있겠구나⑨

“목포는 ‘맑은 물’ 구하는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제” ​​​​​​​70년대까지 시내 수둣물 공급 제대로 안돼 시, 81년 하구언 축조 영산강 상수원 개발 주정공장 나주 이전 반대 범시민 운동 확산

2021-06-03     목포시민신문

[목포시민신문] 목포는 좁은 반도로 이루어져 있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단다. 예전 갯벌이 있었던 곳을 매립해 집과 도로를 만든 대표적인 도시지. 그렇다 보니 땅을 파도 지하수가 나오지 않아 먹는 물이나 생활용수를 구하기 무척 어려웠어.

1970년대 말에는 지금처럼 집집 마다 수도가 있지 않았어. 한 동네에 겨우 몇 개의 공동수도가 있었지. 그나마 격일 급수라고 하루 걸러 하루만 물이 나오는 사정이었으니 서로 물을 받으려고 경쟁하고 심지어 싸우는 일도 있었어.

겨울에도 공동수도 앞에 차례대로 기다랗게 물통을 세워두고 추위에 벌벌 떨면서 기다려야 했단다. 수돗물도 항상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정된 시간에만 잠시 나왔으니까. 유달산 기슭에 사는 사람들은 낮은 지역에서 물을 다 받은 다음인 새벽 1, 2시가 되어야 물을 받을 수 있을 정도였단다. 오죽하면 목포 사람들 중에 물지게 한번 져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라고 했을까.

지금 목포는 관광도시로 알려지면서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오는 곳이 됐어. 그 중 옥단이 길을 일부러 찾아 걷는 사람들도 많더구나. 바로 옥단이는 좁은 골목길 안의 집집마다 물지게로 물을 날라주고 생계를 이어간 젊은 여성의 이름이었단다. 목포만의 문화적인 아이콘이라고나 할까?

지금은 각 가정 마다 수도가 몇 개씩 있으니 너희들은 상상할 수 없을 거야. 그렇게 물 한통씩 받아와 귀하게 사용하는 때였어. 그래서 목포시민들은 깨끗한 물도 좋지만, 맘껏 물을 써 봤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단다.

드디어 1981년 영산강 하구가 둑으로 막히고 커다란 민물호수가 만들어졌단다. 당시에는 동양최대의 호수라고 떠들어댔었지. 목포사람들은 이제 강물, 아니 호수의 물을 값싸고 안정적으로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는 기대에 들떠있었지. 그런데 날벼락 같은 이야기가 들려온 거야.

1983년도 615일이라고 똑똑하게 기억하는데, 그날 목포경찰서의 박형사가 찾아왔어.

형님, 제주에 있는 진로주조공장이 요리 옮길라고 한단디 큰일이요

큰일이라니, 차분하게 말해 보소. ”

주정공장이 나주로 온단께요. 영산강 상류로요.”

오매! 영산강이 먹는 물인디 그라믄 큰일 아닌가

그란께요, 그 공장이 제주도에서 뭔 문제가 있어 쫓겨났다는디, 요리 오면 쓰겄소?”

그라면 안되제. 우리가 먹는 영산강이 오염되면 안되제.”

주정공장이 나주 영산포에 들어선다는 것은 목포 시민들의 먹는 물이 오염된다는 뜻이야. 왜냐하면 영산포 아래쪽에 상수도 취수장이 있었거든. 영산강물을 끌어들여 깨끗하게 정수한 다음 수돗물로 공급해 주는 곳인데, 폐수를 흘려보내는 주정공장이 그 위에 들어선다면 어떻게 되겠어?

그런데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어. 당시는 군사독재 시절이라 정부나 기업이 추진하는 사업을 반대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 곤욕을 치를 때였거든. 그러니 불만이 있어도 용기 있게 말할 사람이 없었지. 이런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박형사가 날 찾아온 거야.

서한태 박사라면 이런 어려운 문제를 깡다구를 가지고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거야라는 판단을 했던 거지.

박형사의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답답하더구나. 진로주정공장은 제주에서 공장을 가동하며 제주항 인근의 전복과 소라, 미역을 오염시켜 주민들로부터 비난을 받아왔단다. 이 때문에 제주도청이 공해업소로 지정까지 했는데, 다시 우리지역으로 옮겨와 우리 땅과 물을 오염시킨다고? 이런 불합리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정말 참을 수 없었고, 막아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단다.

당장 그날 저녁 청호라이온스클럽 이사회에 참석해 긴급안건으로 이 내용을 토의했어. 기대했던 대로 참가자 대부분이 공장건설에 반대 의견을 모아 주었단다. 이틀 후에는 목포YMCA 국제봉사클럽협의회에서도 이 내용을 논의했는데, 참가자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안건이었지. 당연히 주정공장 결사 반대를 결의했고, 지역단체협의회도 반대를 결의해 힘을 모아주었어.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주정공장을 반대 세력이 모아졌지. 목포역 앞 육교와 거리에는 이런 현수막들이 수도 없이 게시되었단다.

영산호를 오염시키는 어떠한 시설도 우리는 결사 반대한다

영산호는 우리의 생명수이다. 오염행위는 결사 반대한다

영산호를 오염시키는 그 어떤 행위도 23만 시민은 용납하지 않는다

박형사로부터 정보를 받고 10일이 지나기 전에 여러 단체들이 힘을 모아 영산호수질오염방지대책위원회를 발족했단다. 드디어 범시민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지.

대책위원장은 내가 맡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의사였기 때문이지. 당시 지역의 유력한 인사들은 대부분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어. 그런 분들이 공해반대 운동에 나서면 정부의 경제성장 정책에 반대한다는 비난을 받게 되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사업에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전문직 의사인 나는 누구에게 불이익을 받을 것이 없거든. 외부 압력에 눈치 볼 일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들 나를 추천했던 거지. 그렇게 해서 주정공장을 반대하는 싸움, 영산강을 살리는 운동이 시작됐단다. 참 이 조직은 나중에 영산호보존회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인 영산강 보전운동을 하게 됐지.

여기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은 환경단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야. 작은 단체라도 있었으니까 어려운 문제에 부딪혀도 바로 대응할 수 있었던 거지. 뜻을 함께하는 환경단체가 없었다면 무척 힘들었거나, 대응조차 할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