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 이야기 16] 고려 불교의 성쇠와 배불론의 대두

무소불위 불교의 타락… 정도전 ‘불씨잡변’서 멸륜해국의 도라 공박

2021-06-10     목포시민신문

[목포시민신문] 고려시대에는 상하가 모두 불교를 신봉하여 국교로 삼았다. 그 가운데 유교와 불교는 초기·중기에 있어서는 별로 충돌이 없었고, 도리어 표리가 되어 문화의 융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일반인의 관념에서 본다면, 유교와 불교는 모두 인간의 교학(敎學)에 절실한 것이었다. 다만 유교는 인간의 외적생활, 즉 실제생활에 치중하여 집과 나라를 바르게 하는 것이며, 불교는 인간의 내적생활, 즉 정신생활을 주안으로 하여 인심을 위안하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유교는 제가리국(齊家理國)의 학(), 즉 정치경제(政治經濟)의 학()이요, 불교는 수신치기(修身治己)와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교()로서 곧 내세생활과 관계되는 교리라고 생각하였다. 이는 성종 때의 유신 최승로의 시무소와 현종 때의 유신 채충순의 현화사비문에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불 양교는 실로 이러한 관념에 의하여 병립하고 또 표리가 되어 그 관계가 비교적 밀접하였다. 때문에 유자·문인으로서 불교를 깊이 믿는 사람과 불교도로서 유학을 겸통하는 사람도 대대로 많아서, 후일 성리학자들이 배타적, 교조적인 벽이단론에 매몰되어 이 시대 유자의 순정성(醇正性)을 평가하려 드는 것은 편협한 독선이자 집일(執一)의 폐단 또한 면하지 못한다 할 것이다.

삼국시대나 신라통일의 시대는 다 같이 중국에서 유행되는 불교를 조선으로 수입하여 온 시대인데, 삼국시대는 주로 경교(經敎)가 수입된 시대이고, 신라시대(통일이후)는 주로 선()이 수입된 시대였다. 고려시대는 그 초기에 있어서는 신라시대에 이어 계속 선()이 주로 수입되고 전래하였으나, 3대 정종 이후로는 대체로 교선양파(敎禪兩派)가 병립하는 가운데, 순전히 중국의 것을 수입하여 모방하는데 그치지 않고, 일단 받아오고 배운 것을 다시 연구하고 발달시켜, 내 것을 새로 창조하여 되갚아주고 또 가르쳐 주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예를 들면 광종 때에 체관화상이 오월왕 전숙의 초청에 응하여 천태의 교경을 가지고 중국으로 가서 당시 중절되었던 중국의 천태종을 다시 중흥케 한 일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불교가 우리 동토에 들어온 지 오늘날까지 대략 그 시간이 약 1,600년인데, 그중에서 이 고려시대는 통일이후의 신라시대와 아울러 그 발전에 있어서 가장 절정을 보여주는 전성시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의 불교는 그 세력과 지위가 바로 조선의 유교와 흡사하니, 조선의 유교가 조선시대의 사상계에서 가졌던 지위를 잘 알면, 고려조의 불교가 고려시대의 사상계에서 가졌던 세력과 권위를 넉넉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고려의 불교를 종파별로 보면 오교양종(五敎兩宗)이었는데, 그중에서 5교라는 것은 소위 경()을 위주로 하는 교문(敎門)의 종파이고, 또 양종이라는 것은 소위 심인(心認)을 위주로 하는 선문(禪門)의 종파이며, 또한 구산선문(九山禪門)이 있었다.

고려는 태조 이래 불교를 국교로 숭상함으로써 정치·사회의 지도이념이 되었다. 고려 불교의 성격은 호국적(護國的현세구복적(現世求福的귀족적(貴族的) 불교로 보호 육성되었다. 따라서 역대 군왕들은 국가의 대업(大業)이나 안태(安泰)를 위하여 대사찰의 건립, 연등회 행사, 대장경 조판 등 국가적 불교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와 같은 불교행사, 사탑의 건립 등으로 또한 많은 재정이 소모되었다.

불교계는 후기로 내려오면서 점차 세속화하여 그 폐해가 속출하였다. 고려 왕실과 당시 집권세력인 권문세족의 보호·후원을 받으면서, 국가에서 지급한 막대한 농장을 소유하고, 장생고 등을 통한 고리대업과 양주(釀酒목축 등의 음성적 식리(殖利)로 인해 경제적인 부를 누림으로써, 서민생활의 자립을 크게 저해하였을 뿐 아니라, 국가의 조세수입을 감소케 하여, 고려 왕조의 재정을 파탄의 지경에 까지 이르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승려가 면역(免役면세(免稅)의 특권을 갖는 관계로 그 수효가 해마다 격증하여 점차 막대한 국력의 소모를 초래하였으며, 이후 사원(寺院)에서 노비를 소유하고 사병을 양성함에 이르러서는 그 경향이 더욱 심각하였다. 게다가 재정파탄에 못지않은 것이 바로 정신적 타락으로 인한 폐단이었으니, 승려들의 많은 비행은 사회적으로 지탄받기에 이르렀고, 현세구복적인 것으로 변질되거나 미신화한 민간불교 역시 잦은 물의를 빚었던 것이다.

한편 대각국사 의천, 보조국사 지눌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교계는 여전히 현실 사회의 요구와는 동떨어진 타락의 길로 빠져들게 되어, 마침내 정신적 지도력을 거의 상실하였는데, 이때 새로이 전래한 성리학(정주학)은 새로운 학풍과 건전한 정신을 요구하는 우리 사상계의 여망에 부응하여, 새 국면을 열고 불교에 대신하는 지위를 차근차근 다져나가게 되었다.

고려 일대의 중심사상이요 지도사상이던 불교는 과연 국민으로 하여금 계법(戒法)을 지켜 사악(邪惡)을 피하며 대자대비의 불심을 본받아 선을 행하고, 모든 미집(迷執)을 버려 안심입명의 길을 얻게 하며 힘써 공덕을 베풀어 불은(佛恩)의 만일에 보답케 함에 있어서, 얼마 동안은 그 공적이 자못 볼만한 것이 있었으나, 시일의 경과함에 따라 자연 인심 교법이 해이하게 되어 여러 가지의 폐풍(弊風)이 점차로 생기게 되었다.

폐풍 중의 첫째는 불교의 방만이니, 역대 왕들의 봉불과 정부의 불사가 너무 과도하여 정치 경제상 여러 가지 곤란과 파탄을 가져오게 한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경쟁적 원찰 건설, 잦은 반승(飯僧)의 폐, 기양(祈禳) 불사의 폐, 도승(度僧)의 과다 등을 들 수 있다.

둘째는 승려의 부패이다. 고려 일대에는 명승고각(名僧高覺)의 수가 적지 않으나, 그러나 시대가 강하함에 따라 승려가 점점 타락하고 부패하여, 악승패곤(惡僧敗髡)이 처처에 출현하여 법풍(法風)을 더럽히는 자가 심히 많게 되었다. 그리하여 혹은 음주탐색(飮酒貪色)하며, 또 혹은 정권을 농락하고 민심을 현혹케 하며 재화를 사취(詐取)하여 그 망상(妄狀)이 실로 통탄을 금치 못할 것이 있었다. 특히 공민왕 시대의 요승 편조(遍照신돈)의 사행(邪行)에 이르러서는 그 부패가 절정에 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공민왕 때에 자은종의 승려 영욱이 남의 처를 간음하였으므로 대관이 죄주고자 하니, 욱이 말하기를 나를 죄주고자 하면 승려 전부를 죄주라 하였으니 당시 종문(宗門)의 추상(醜狀)을 알 수 있다.

셋째는 단도(檀徒)의 미신이다. 불정(佛政)의 문란이나 승려의 타락에 발걸음을 맞추어 신도들의 신앙이 또한 독실한 맛을 잃고 일로저하하여 거의 미신에 가까울 정도로 쇠퇴한 것이 그것이다. 당시 신도들의 신앙은 오직 구하고 힘쓰는 것이 복을 빌고 재난을 물리치는 일이어서 선인(善因)을 짓지 아니하고 오직 선과(善果)를 바라며 또 그 기원을 마음에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형식에 구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복을 구하고 재난을 피하는 일념에 불탄 나머지 종종의 망신(妄信)도 서슴지 않았다. 그 일례로 명종 시절에 승() 일엄(日嚴)이라는 자가 있어서 신앙으로 병을 다스리는데 신자가 그 목욕한 물방울을 사서 마셨다는 기록이 있으니, 그 어리석음과 사망(邪妄)의 정도가 여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오랫동안에 걸쳐 민중의 사상을 지도하던 불교가 점점 부패하게 됨에 따라서 국가에는 재정의 파탄, 경제의 피폐가 있고 사회에는 풍기의 문란, 도덕의 퇴패가 있어서 인심은 나날이 불교를 떠나고 또 불교의 사상은 다시 세도(世道) 인심(人心)을 광구(匡救)할 권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그 부패가 심해지자 점차로 배불(排佛) 척법(斥法)의 소리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도처에서 들리게 되고, 고려 말 신흥사대부층의 성리학자들로부터 배척당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특히 정도전은 그의 불씨잡변에서 불교를 멸륜해국(滅倫害國)의 도()라고 공박하였다.

갇히고 고인 물이 썩듯이, 자시(自是) 독존(獨尊)의 학문 사상도,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도, 자정(自靖) 능력을 잃고 독주(獨走)하게 되면 모두가 부패하고 마는 것이다. 후일 조선에서의 성리학 또한 이러한 길을 걷게 된다.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17번째 이야기로, '고려시대의 도교사상과 그 추이'가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