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 이야기 30]조선 불교의 쇠퇴와 삼교합일론

조선 왕조 억불숭유책에 따라 불교 은둔 도피하며 쇠퇴 원천석의 삼교일리론, 휴정의 삼교통합론 등 출현 유·불·도 삼교 조화 노력

2021-10-17     목포시민신문

[목포시민신문] 유교불교도교의 세 종교 사상은 모두 외래 종교 사상이면서 한국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일찍이 우리나라에 토착화되었다. 이들 세 종교 사상은 상당한 갈등 관계도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삼교회통(三敎會通)과 삼교협력(三敎協力)을 이루었으며, 또한 삼교합일론(三敎合一論)이 대두되었다. 특히 대부분의 한국 신종교(新宗敎)에서는 삼교(三敎)를 융섭(融攝) 활용하는 사상적 특징이 발견된다.

유교지상주의의 사회에서 불교가 위축할 수밖에 없는 것은 물론이다. 태조는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의 증가를 방지하고 사원의 남설을 금했다. , 기존의 불교 세력은 승인하되 그 이상의 확대를 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태종은 가혹한 탄압을 가하여 전국에 242()만을 남겨 두고 그 이외의 사원을 폐지하였으며, 동시에 거기에 소속된 토지와 노비를 관()에 몰수하였다. 이것은 불교계의 재기를 불가능하게 할 정도로 큰 타격을 가한 것이었다.

태종의 강압 이래로 기를 펴지 못하던 불교는 세종과 세조의 개인적 신앙을 얻게 되었다. 세종은 유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궁내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기도 하였다. 또 세조는 원각사(탑골공원)를 지었고, 간경도감을 두어 불경의 언해를 간행하였다. 이러한 결과 불교는 다시 활기를 띠어 사찰의 재흥과 승려의 증가도 상당히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성종은 또다시 강력한 억제책을 써서 도첩제를 전폐하고 출가(出家)를 일절 금하였으며, 더욱이 중종은 승과(僧科)마저 폐지하였다. 이것은 불교와 국가와의 공적인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명종 때에 문정왕후가 섭정하면서 명승(名僧) 보우(普雨)를 중용하여 불교를 장려하였으므로 불교계는 일시 생기를 띠게 되었다. 이때 봉은사를 선종의 본산, 봉선사를 교종의 본산으로 삼아 선교양종(禪敎兩宗)을 두고, 이어 승과를 다시 설치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죽음으로써 불교는 다시 탄압을 받아 주로 부녀자의 신앙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왕조 초기 불교억제책의 시행으로 종래의 불교 사원의 세력 기반과 불교의 교세가 크게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에 대한 연구 또한 쇠미하게 되었다.

자초(自超溪月軒 無學)과 기화(己和涵虛 得通) 등 명승이 있었으나, 특히 후자에 있어서는 유학자의 배불론에 대하여 불교가 유교의 교리와 배치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도덕적 이상의 실현에 있어서 유·불은 서로 일치되는 것이라는 주장까지 하게 되었다.

승과 제도의 폐지는 승려에 대한 국가적인 관심과 보장을 전적으로 거부한 것을 의미하며, 일반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저락하게 마련이었다. 불교는 위신을 잃고 승려는 흔히 요역에 징발되는 수가 많아서 특히 하급 승려는 사회에서 천시하게까지 되었다. 한편 양반 사류(士類)들은 승도(僧徒)를 학대하고 사찰을 분략(焚掠)하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유학자의 학대의 그늘에서 승려가 유불합일론(儒佛合一論)을 내세우게 되었으며, 그것이 다시 확대되어 유··도 삼교의 합일론이 대두된 한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 휴정·사명대사 유정과 같은 승려가 승군을 조직하여 항전함으로써 공훈을 세워서 승도들의 위신을 일시 높인 것도 사실이었으나, 휴정은 유··도 삼교가 그 교의의 궁극적 목표는 서로 일치한다고 주장하였다.

불교는 신라와 고려 일천여 년을 통하여 장구한 세월에 걸쳐 인심(人心)을 장악하고 지도하였던 만큼 그 근저도 깊고 세력도 커서 마땅히 그 저항도 크고 반향도 컸을 것으로 상상되나, 고려 말의 불교는 자체 내의 부패와 타락이 심하여 비록 외부의 압력을 빌지 않고서라도 마치 냉시사회(冷屍死灰)와 같이 하등의 생기와 반발력을 가지지 못하였으며, 또 조선 초의 불교계에는 학덕이 있고 명망이 있는 명승 고납(高衲)이 마치 없는 것 같아서 일언반구의 저항운동도 일으키지 못하고 오직 굴종퇴둔(屈從退遁)의 길을 취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저 무학(無學)과 같은 법승도 쓸데없이 풍수설의 이용을 받아 한갓 태조의 우롱을 당하였을 뿐이고, 법문의 대수난에 대하여는 하등의 보효(報效)를 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유도 삼교는 일찍부터 합일론과 조화론이 크게 대두되었다. 고구려 말 연개소문은 왕에게 당나라에서 도교의 수입을 건의하면서 삼교는 비유하자면 정족(鼎足)과 같으므로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됩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함께 번성하나 도교는 아직 성하지 못하니 천하의 도술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사신을 당에 보내어 도교를 구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게 하소서라고 한 것에서도 삼교합일의 조화사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신라말 최치원이 난랑비서문에서 풍류도(風流道)에 대해 밝힌 바와 같이, 도 이전의 우리 고유의 ()사상속에 삼교의 종지가 모두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민족에게는 삼교(三敎)를 융합 일치시켜 보려는 사상이 자연스럽게 대두된 것 같다.

삼교합일론은 원천석의 삼교일리론, 함허 기화의 현정론에 나타나는 삼교일치사상, 서산 휴정의 삼가귀감에 나타나는 삼교동근(三敎同根)과 삼교일치사상, 무경 자수의 삼교화융 등을 들 수 있다.

이후 수운(水雲최제우)의 동학(東學) 이래 우리나라에서 창립된 대부분의 신종교 사상 속에는 삼교합일은 물론 우리의 민속무속 그리고 서양 종교인 기독교의 사상까지 융섭 활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최제우는 유도는 이미 죽은 종교요 선천(先天)의 종교라 진단하고, 자기의 천도(天道)는 원래 유()도 아니요, ()도 아니며, ()도 아닌, 선 삼합(三合)이라 하였다.

증산(甑山강일순) 역시 유선을 낡은 종교, 선천의 종교로 보면서도 삼교의 진액(眞液)을 거두어 모으고 정수를 뽑아 통일신단(統一神團)을 형성, 후천선경(後天仙境)을 건설한다고 하였다.

소태산대종사는 일원상(一圓相)의 진리를 우주만유의 근원으로 보고 유가에서는 이를 일러 태극 또는 무극이라 하고, 선가에서는 이를 일러 자연 또는 도라 하고, 불가에서는 이를 일러 청정법신불이라 했으나, 원리에 있어서는 모두 같은 일원(一圓)의 진리라고 하였다.
한편 유학자 사이에 있어서도 혹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자가 없지는 않았다. 유학자였던 김시습은 세조가 왕위를 찬탈했을 때, 유서(儒書)를 버리고 승려가 되어 한동안 방랑 생활을 했으나, 한때 세조의 불경번역사업을 돕기도 하여, ·불 양교에 이해가 깊었던 것이다. 유명한 유학자인 이이도 한때 사원에 들어가 선학을 익힌 일이 있어 불교에 대한 이해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에서의 도교와 유교는 불교에 대한 갈등 속에서도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된다. 도교는 불교를 받아들여 더욱 심오한 교리와 사상을 형성했고, 신유학(新儒學)은 선진유학(先秦儒學)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리기론과 심성론을 발전시켜 형이상학적 면모를 갖추는데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교가 회통하여 조화를 이루기도 하며 서로 배척하지는 않았지만, 고려 말에 성리학이 유입되면서부터 배불론(排佛論)이 대두되었고, 조선 왕조에서의 억불숭유책(抑佛崇儒策)에 따라 배척과 억압 속에 불교는 산간 벽처에 은둔(隱遁) 도피(逃避)하여 쇠퇴의 일로를 걷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원천석의 삼교일리론(三敎一理論), 기화의 유석질의론, 휴정의 삼가귀감과 삼교통합론, 무경자수(無竟子秀)의 삼교설 등이 출현하여 유··도 삼교를 조화시키고자 하였으나 쇠퇴의 교세를 만회할 수는 없었다. 한마디로 한국 불교사상에 있어서 조선 시대는 불교의 수난시대이며 쇠퇴시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31번째 이야기로, '조선 후기 유학의 개관'이 연쟤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