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도의 닻별들-❷차남수②]왕진가방 든 목포의 명의, 대한민국 외과 전문의 1호 되다

대구·제주서 8년간 공공의료 첫발…가난한 조선인 환자 돌봐 아버지가 일군 대안동 땅에 외과의원 열고 20년간 인술 펼쳐 1955년 외과 전문의 면허 제1호…목포·전남 의료 발전 앞장

2026-10-13     목포시민신문

■역사에세이스트 배종덕 작가의 ‘항도의 닻별들’

목포시민신문은 목포항 개항 130주년을 앞두고 역사에세이스트 배종덕 작가의 기획연재 ‘항도의 닻별들’을 연중 게재한다. ‘닻별’은 밤바다에서 항해의 방향을 알려주는 별처럼 목포의 미래를 비추는 인물을 뜻한다. 이번 연재는 언론·정치·의료·영화·문학·미술·산업 등 각 분야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한 목포 인물 12명의 삶과 업적을 총 3부로 나눠 조명한다. 단순한 성공담을 넘어 시대적 한계와 도전, 좌절과 성취를 살피며 개방성과 창조성, 문화예술성으로 이어진 ‘목포정신’의 뿌리를 찾아간다. 목포 출신인 배 작가는 목포중.고등학교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하고 MBC PD와 제일기획(삼성그룹) 기획국장 등을 지냈으며, 저서 『나는 일하고 싶다』와 『매향노라 불러온 사람』을 펴냈다. 본지에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을 35회 연재한 그는 이번 연재를 통해 잘못 알려진 기록을 바로잡고 잊힌 인물들의 삶을 오늘의 시민과 미래 세대에게 전할 예정이다.<편집자주>

<글 게재 순서>

■제1부 시대의 길을 연 사람들

①김철진(1900~1971)

②차남수(1903~1990)

  • 인사와 유년기
  • 첫발
  • 의료 파수꾼
  • 마지막

③이남규(1901~1976)

④최병우(1924~1958)

■제2부 문화의 항로를 연 사람들

■제3부 생활과 문명을 바꾼 사람들

연재 대상 인물 12인 소개

■ 제1부 시대의 길을 연 사람들

① 김철진(1900~1971)

목포 최초의 조선인 언론인으로 평가받는 사회운동가이자 교육가다. 언론과 교육을 통해 지역사회의 변화와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② 차남수(1903~1990)

대한민국 최초의 외과의사 전문의 면허 1호로, 한국 근대 외과의학의 출발점을 연 의료인이다. 목포 의료 발전과 시민의 건강 증진에 이바지했다.

③ 이남규(1901~1976)

제헌국회의원과 초대 전라남도지사, 참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건국과 헌법 제정, 지방행정 및 지역 교육 발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④ 최병우(1924~1958)

대한민국 최초의 종군기자로 불리며 전쟁 현장을 기록한 언론인이다. 언론인 연구·친목단체인 관훈클럽 창립을 주도했으며 취재 현장에서 순직했다.

■ 제2부 문화의 항로를 연 사람들

⑤ 이화삼(1911~미상)

목포 최초의 영화배우로 평가받는 근대 대중예술의 1세대 인물이다. 목포와 서울의 연극·영화 무대에서 활동했으며 6·25전쟁 중 납북된 것으로 알려졌다.

⑥ 이가형(1921~2001)

한국 추리문학과 장르문학의 기반을 넓힌 문학가다. 창작과 번역, 평론 활동을 통해 한국 대중문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⑦ 강대진(1935~1987)

한국영화의 예술성과 가능성을 세계 무대에 알린 영화인이다. 국제영화제 수상을 통해 한국영화의 세계화에 앞장섰다.

⑧ 김영자(1922~2015)

호남 여성 서양화가의 길을 개척한 미술인이다. 여성 예술가의 활동이 제한적이던 시대에 꾸준한 작품 활동으로 지역 미술의 지평을 넓혔다.

⑨ 오순택(1933~2018)

헐리우드에 진출한 최초의 한국인으로 평가받는 배우다. 영화와 연극, 방송을 넘나들며 한국 배우의 세계 진출 가능성을 보여줬다.

■ 제3부 생활과 문명을 바꾼 사람들

⑩ 정재현(1906~1998)

독창적인 ‘심령서체’를 창시한 서예가로, 체육과 기업 경영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예술과 생활, 사회활동을 아우르며 목포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⑪ 김준형(1914~2008)

대한민국 식기문화와 생활문화의 변화를 이끈 산업인이다. 새로운 제품과 경영 방식으로 시민들의 일상과 식생활 개선에 이바지했다.

⑫ 홍순기(1927~2012)

어망 수출을 통해 세계시장에 도전한 해양산업 혁신가다. 목포 수산업의 기술 발전과 해외시장 개척을 이끌며 지역 산업의 가능성을 넓혔다.

의료인 차남수

의료인 남수의 의료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공공의료 활동이며 또 하나는 개업 의료 활동이다. 공공의료 활동부터 살펴보자.

1) 공공의료 활동(제1차 1933~1941)

남수의 공공의료 활동의 첫 일터는 대구 의학전문학교 교수 자리였다. 이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남수가 대구 의학전문학교에 가게 된 연유는 규슈대학 교수들의 권유와 추천 때문이었다. 1933년 대구 의학전문학교에 부임한 남수는 교수 생활도 좋았지만, 특히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이 마음에 들었다. 남수는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면서도 주민들의 건강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하여, 대구 도립병원 내에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무료 병실을 개설하였다. 그러나 대구에서의 공공의료 활동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1935년 제주 도립병원 외과 과장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다. 새로 둥지를 튼 제주 도립병원은 이름만 도립병원이었지 의료환경은 대구의 의학전문학교보다 훨씬 열악했다. 도립병원이라는 곳이 의사는 4명에 불과했으며, 외과 과장인 남수가 병원장 업무까지 대행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남수는 환경에 실망하지 않고 6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제주도의 가난한 조선인 동포들의 진료와 치료에 전념했다. 의사로서의 소임을 다한 것이다. 악몽의 1937년이 되었다. 일제가 “지나사변”을 일으켰다. 그리고 4년이 지난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지나사변”과 “태평양전쟁”은 남수의 의료 활동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의약품 부족과 일제 감시가 남수 스스로 의료 활동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남수의 공공의료 활동이 막을 내렸다.

일제강점기하의 남수의 공공의료활동은 대구에서 2년, 제주도에서 6년, 모두 8년이었다. 이상이 남수의 제1차 공공의료활동의 전말이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끝난 제1차 공공의료 활동은 남수에게 어떤 의미의 시간이었을까? 남수에게 이 기간은 의사는 ‘공공재’라는 사회적 요구에 충실히 부응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일깨워준 소중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2) 개업의료 활동(1941~1960)

“당시 목포에는 죽동 성산교회 밑에서 제중병원(현 춘화당 찻집)을 개업했던 최섭(최섭(1905~2000) 의사, 미군정기 목포부윤, 교육자)씨 등 한국인 개업의가 9명 있었고, 일본인 개업의도 5명가량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이 의학전문학교 출신인 까닭도 있었으나 병원에서 침식을 하며 야간에도 환자를 돌보았던 내 열정에 환자들이 그렇게 많이 몰려오고 있었다. 눈, 코 뜰 새 없는 가운데서도 8년간의 의료 활동을 통해보아 왔던 가난하고 병든 동포들에 대한 기억은 결코 잊혀질 수 없다.”(김수진, 목포복음교회40년사, p.78)

위 글은 남수가 1941년 고향 목포시 대안동 12번지(행정구역개편 전에는 창평동 17번지였음)에 “차남수 외과의원”을 개원했던 당시를 회고한 글이다. 개원 당시 남수 자신은 인지하였는지 모르겠지만, 남수가 외과의원을 대안동에서 개원하게 된 사실은 남수에게나 목포 시민 모두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연유는 이렇다. 의원이 들어선 그 자리는 바로 남수의 부친 차성술이 바다를 메워 일군 땅이며, 1922년 10월에는 차성술이 마실 물 때문에 고생하는 주민들에게 우물을 만들 수 있도록 자신의 땅 4평(당시 시가 120원)과 굴정비용 15원을 기부해서 우물을 만들도록 한 그 자리이기 때문이다.(배종덕,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 p.85) 이러한 의미 있는 자리에 남수가 개업의로서 닻을 내렸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가 일구고 자선을 베푼 땅 위에 아들이 의원을 개원하고 인술을 펼치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특별한 일이 전남 목포시 대안동에서 일어난 것이다. 특별한 의미가 존재한 곳에서 시작한 남수의 개업의 활동은 장남 우균(나중에 종석으로 개명)이 원장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20여년간 지속된다. 그 사이에 8.15 해방, 여순사건, 6.25 한국전쟁 같은 큰 사건이 있었지만, 남수는 사건들을 겪으면서도 의사로서, 선량한 지역 주민으로서 모범적인 삶의 자세를 실천했다.

남수의 왕진가방

개업의 남수는 의료활동의 목표를 주민들과 함께 한다로 설정하고 이의 실천을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인지 지금도 목포시민들 중에는 남수가 왕진 가방을 들고 왕진을 다니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떄문에 왕진가방은 자연스럽게 남수의 “시그니처”로 인식되었으며, 오랫동안 목포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실제 목포 사회에서 남수의 왕진가방은 의료기구가 들어있는 가방 그 이상의 존재였다. 의술의 신 “아스클래피오스”가 들고 다니는 치유의 지팡이였으며, 의료 접근성을 높여준 상징물이었다. 이제 개업의 남수는 시냇가에 뿌리내린 나무처럼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이 당시 남수의 명성은 상상 이상이었다. 남수의 명성과 위상이 만들어낸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동양화가 남농 허건의 다리 절단 수술에 관한 이야기다. 목포지역에서는 남농 허건의 다리 절단 수술을 남수가 집도했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지금은 고인이 된 남농의 장남 허경씨는 “동상이 악화된 부친께서는 처음에 차남수 외과의료원에서 진찰을 받았다. 그러나 차남수 원장께서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으로 가도록 권유를 하셔서 1944년, 부친 연세가 37세 때에 세브란스 병원에서 왼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라고 증언한 바가 있다. 그리고 남농이 저술한 “남종회화사”의 간행의 말에서도 이 사실을 밝힌 바 있다. 남수의 남농 다리 절단 수술 사건은 명성이 만들어낸 오해다. 이번에는 남수의 위상에 관한 이야기다. 남수는 1990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목포의 명문가 중의 하나인 차씨 가문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남수가 의사로서 명성을 쌓기 전에는 큰형님 용강 차남진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남진은 가업을 물려받은 장남이었으며, 일본유학을 다녀온 인테리였으며, 일제 강점기하에서 부의회 의원 같은 사회 활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남진이 차씨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 인식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남진이 해방 이후로는 사회활동을 자제하고 칩거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의사로서 명성과 주민 밀착도가 높은 남수가 자리를 대신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차씨 가문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남수가 세상을 떠난 뒤로는 큰형님(남진)의 둘째 아들인 조카 범석(극작가, 1924~2006)이 그자리를 대신했다. 그러나 지금도 목포에서는 차씨네 가문 이야기가 나오면 으레 남수 얘기가 먼저 나온다. 두 가지 이야기를 통해 의사 남수의 명성과 달라진 위상을 잘 알 수 있었다. 개업의 남수는 목포 지역사회에서 의사로서 잘 박힌 못처럼 확고 부동하게 자리잡았다. 한편 남수는 개업의로서 본업에 충실하면서도 외과의사로서 외과의사가 감당해야 할 수술 기술과 위생관리를 포함한 서구식 의료 지식을 도입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리고 후학 양성을 위한 근대 의학교육 체계 구축과 지역 의료계 발전을 위한 의권신장에도 앞장섰다. 하여 목포 의사협회를 탄생시키고 제2대와 제22대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광주와 전남을 아우르는 전남의사협회 회장을 지냈다.

대한민국 외과의사 전문의 면허 제1호

목포시에서 발행한 『목포시사④ 터전 목포』에는 목포 출신 주요 인사 95명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의 한 사람인 차남수를 시사는 “의사, 우리나라 외과 전문의 면허 제1호”라고 소개하고있다. 개업의료 활동을 하는 동안에 남수는 많은 것을 얻었다.

주민들로부터는 신뢰와 명성을 얻었으며, 동료 의사들로부터는 목포시 의사협회 회장, 그리고 광주·전남 의사협회 회장 등 명예스러운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에 남수가 받은 가장 영광스런 칭호는 대한민국 외과의사 전문의 면허 제1호 칭호다. 남수는 1955년 대한의학협회로부터 대한민국 최초인 “대한민국 외과의사 전문의 면허 제1호”라는 빛나고 영광스러운 면허장을 받는다. 목포시민의 경사이자 대한민국의 경사다.

남수는 어떤 연유로 대한민국 외과의사 전문의 면허 제1호의 보유자가 되었을까? 당시 대한민국에는 남수보다 선배되는 백인제, 최상채 같은 쟁쟁한 외과의사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수가 전문의 면허 제1호 취득자가 된 것이다.

어떻게 향촌의 개업의사가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면허 제1호 취득자가 될 수 있었을까?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의구심을 해소하기 위해 외과전문의인 (고) 최태옥 박사(85, 전 목포의료원 원장)를 비롯한 몇몇 외과의사들께 자문을 구했다.

돌아온 답변이다. 첫째는 의학협회가 남수의 꾸준한 의과의료기술 개발에 대한 연구를 인정한 것이며, 둘째는 백인제(당시서울대학교 의과대학장)와 최상채(당시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장)씨는 대학에서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업의로 활동하고 있던 남수가 면허 취득이 용이했을 것이다는 내용의 답변이다. 대한민국 의과의사 전문의 면허 제1호인 남수와 얼굴을 마주한채 진료와 치료를 받은 목포시민들은 늘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