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강봉룡 역사작가 목포대 명예교수] 김대중은 왜 장보고를 다시 불러냈을까
라이샤워의 책 한 권에서 시작된 해양 국가의 꿈 설계하다
[목포시민신문] 김대중 대통령은 왜 1200년 전 장보고를 다시 불러냈을까. 그 배경에는 미국 역사학자 라이샤워의 연구와 이를 한국 사회에 소개한 김성훈의 노력이 있었다. 본지는 강봉룡 국립목포대 명예교수의 특별기고를 통해 한 권의 역사서에서 시작된 장보고의 재발견이 국가의 해양 비전으로 이어진 과정을 살펴본다. 학문과 정치, 역사와 정책이 만나는 경로를 따라가며 바다를 국경이 아닌 사람과 물자, 문화가 오가는 통로로 바라본 장보고의 의미를 되짚는다. 항구도시 목포 역시 이 이야기에서 바다를 통해 세계와 연결하고 지역의 미래를 개척할 길을 함께 묻고자 한다.<편집자주>
1. 12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1998년 7월 10일, 김대중 대통령은 해양수산부의 국정과제 추진상황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장보고의 업적을 재조명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듬해에는 해양수산부에 장보고 관련 기획단이 설치되었고, 1999년 11월에는 장보고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같은 해 12월 해군 제2함대사령부를 방문한 김대중은 장보고의 이름을 다시 불러내며 “다시 한 번 해상왕 장보고 시대를 열어가자”는 취지의 메시지를 던졌다. 1200년 전 동아시아의 바다를 누볐던 신라의 장군이자 무역가가 20세기 말 대한민국 대통령의 입을 통해 되살아난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김대중은 왜 하필 장보고였을까? 우리 역사에는 수많은 영웅이 있다. 나라를 지킨 장군도 있고, 백성을 위해 헌신한 정치가도 있으며,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일으킨 학자도 있다. 그중에서도 장보고는 특별하다. 그는 바다를 단순한 국경이나 방어선으로 보지 않았다. 바다를 사람과 물자, 정보와 문화가 오가는 통로로 만들었고, 그 통로를 통해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웠다. 9세기 장보고의 활동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해양교통과 국제무역, 해외 거점과 인적 네트워크를 결합한 경영의 선구자로 읽을 수 있다.
김대중에게 장보고는 단지 과거의 위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국제무역과 해운, 해양산업을 통해 국가의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반전이 있다. 장보고를 현대적인 의미의 ‘해상왕’으로 재발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의 역사학자였다. 그리고 그 학자의 연구를 읽고 장보고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한국의 학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김성훈이었다.
이야기는 김대중의 대통령 취임보다 훨씬 앞선 시기, 태평양 건너 미국의 대학에서 시작된다.
2. 장보고를 세계사의 인물로 바꾼 미국인
에드윈 올드파더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 1910~1990). 그는 도쿄에서 미국인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하버드대학교에서 동아시아사를 연구한 학자였다. 훗날 존 F. 케네디 대통령 시절인 1961년부터 1966년까지 주일 미국대사를 지냈고, 전후 미국의 동아시아 인식과 대일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라이샤워는 외교관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장보고와의 인연은 외교가 아니라 학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중국 여행 기록에 주목했다. 엔닌은 9세기 당나라에 건너가 불교를 공부하고 귀국한 승려였다. 그가 남긴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당나라에서 생활한 일본 승려의 일상뿐 아니라, 중국 연안에 형성되어 있던 신라인 사회와 그들의 활동도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을 연구하던 라이샤워는 엔닌이 당나라에서 체류하고 불교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신라인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그 배후에 장보고의 지원과 영향력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엔닌에게 장보고는 먼 나라의 역사책에 나오는 인물이 아니었다. 낯선 땅에서 공부하고 살아남아야 했던 외국인 승려에게 장보고와 신라인 사회는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존재였다.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을 연결하고, 그들이 이동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힘이 있었다.
라이샤워는 1939년 엔닌의 여행기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했고, 그 연구를 발전시켜 1955년 《Ennin's Travels in T'ang China》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장보고를 설명한 표현이 유명하다. “The Machant Prince of the Maritime Commercial Empire.” 우리말로 옮기면 ‘해상상업제국의 무역왕’ 또는 ‘해양상업제국의 무역 군주’ 정도가 된다.
이 표현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장보고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장보고를 신라의 장군이나 지방 세력가라는 범주에 가두지 않고, 바다를 무대로 국제무역을 조직하고 주도한 인물로 해석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물론 ‘해양상업제국’이라는 표현은 9세기 당시의 공식적인 국가 명칭이나 제도가 아니다. 장보고의 활동을 현대적인 역사 인식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표현은 장보고를 한국사 내부의 인물에서 동아시아 해양교류사의 인물로 바라보게 하는 강력한 관점을 제공했다. 장보고가 동아시아의 바다에서 무엇을 했는가를 묻는 질문은 이제 어떻게 바다를 통해 사람과 상품을 연결하고, 그 연결을 바탕으로 경제적·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했는가를 묻는 질문으로 확장되었다.
라이샤워의 책은 장보고를 새롭게 바라보는 창이었다. 훗날 이 창을 통해 장보고를 발견한 한국인 가운데 김성훈이 있었다.
3. 학자의 책에서 발견한 장보고
김성훈은 농업경제학을 전공한 학자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1년까지 하와이대학교 동서문화센터에서 공부하면서 국제적인 학문 환경을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라이샤워의 《Ennin's Travels in T'ang China》를 접하고 장보고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농업경제학자가 왜 천여 년 전의 해상무역가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그 연결고리를 이해하려면 장보고를 단순히 군사적 영웅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장보고의 진정한 강점은 바다에서 싸움을 잘했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았다. 그는 바다를 통해 사람과 물자를 움직였고, 서로 다른 지역에 흩어진 신라인들을 연결했으며, 당나라와 신라와 일본을 잇는 교역의 흐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활동을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국제무역, 물류, 해외 거점, 인적 네트워크, 해양안보가 결합된 경영체계라고 할 수 있다. 농업경제학을 공부한 김성훈이 라이샤워의 연구에서 발견한 장보고 역시 이런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중요한 것은 그 관심이 책을 읽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988년 김성훈은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아시아·태평양 지역 자문관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이때 산둥반도의 적산법화원을 찾았다. 적산법화원은 당나라에서 활동하던 신라인 사회와 장보고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장소다. 엔닌의 기록을 통해 책 속에서 만났던 장보고의 세계가 실제 역사 공간과 연결되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이듬해인 1989년 11월 11일, 김성훈은 김문경·손보기·김정호·윤내현·최광남 등과 함께 장보고대사해양경영사연구회를 발족했다. 이 움직임은 의미가 있었다. 장보고를 단순히 기념하거나 추앙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해상활동과 국제경영을 연구하는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장보고를 과거의 위인으로 기억하는 것과 그의 활동에서 오늘날의 과제를 찾아내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다. 연구회는 후자를 지향하는 출발점이었다.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된 관심이 현장 답사로 이어지고, 다시 연구자들의 모임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장보고를 연구하는 일과 장보고를 국가의 정책으로 끌어올리는 일 사이에는 여전히 큰 간격이 있었다. 그 간격을 이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김성훈에게는 다행히도 그를 통해 장보고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정치적 인연이 있었다. 바로 김대중이었다.
4. “장보고는 어떤 분이냐?”
김성훈과 김대중의 인연은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이어졌다. 김성훈은 민주당 총재 시절의 김대중을 일산 자택에서 만나 장보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의 면담은 약 세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김대중은 김성훈에게 장보고가 어떤 인물인지 물었다. “장보고는 어떤 분이냐?” 짧은 질문이지만, 이 일화는 이야기 전체에서 중요한 장면이다.
장보고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존재하고, 일부 연구자들이 그의 해양경영에 주목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정치적 의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 인물의 역사적 의미가 국가의 정책으로 발전하려면, 그 의미를 이해하고 공공의 과제로 받아들일 사람이 필요하다.
김성훈은 장보고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라이샤워의 연구를 통해 장보고를 국제적인 해상무역가로 바라보았고, 관련 연구자들과 함께 그 활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려 했다. 김대중은 그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정치적 통로였다.
이 만남은 장보고 재조명 사업의 중요한 배경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김성훈이 연구자의 언어로 장보고의 역사적 의미를 전달하고, 김대중이 이를 국가의 미래와 연결해 생각할 수 있었다면, 학문과 정치가 만나는 접점이 마련된 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김대중과 장보고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덧붙일 필요가 있다. 김대중은 이미 1970년대부터 라이샤워와 개인적인 인연을 맺고 있었다. 따라서 김대중에게는 장보고를 설명하는 학자와 연결될 수 있는 별도의 통로도 있었다. 그 인연은 장보고 사업과는 무관하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훗날 장보고를 국가적 차원에서 재조명하는 이야기를 이해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배경이 된다.
5. 민주주의를 지키려던 학자와 정치인
라이샤워와 김대중의 인연은 1971년 김대중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게 패배한 뒤에도 한국 정치의 민주화를 위해 활동했고, 미국의 학계와 정치권에서도 그의 행보에 관심을 기울였다.
라이샤워는 김대중을 하버드대학교로 초청해 연구할 기회를 제공하려 했다. 1973년 여름에는 김대중이 하버드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초청을 추진했다. 그러나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하면서 계획은 중단되었다.
라이샤워는 이 사건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김대중이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으며, 1973년 11월 직접 서울을 방문해 김대중의 미국행을 다시 추진했다. 당시 하버드대 신문 《하버드 크림슨》은 라이샤워가 김대중의 출국 허가를 얻기 위해 한국 정부 관계자들과 접촉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라이샤워의 시도는 정권의 방해 공작으로 불발했다.
국내에서 김대중의 민주화 활동은 계속되었고 고난도 계속 이어졌다. 1980년 신군부 정권 아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도 라이샤워는 그를 자신의 ‘personal friend’, 즉 개인적인 친구라고 부르며 사형선고 철회를 요구하는 활동에 나섰다. 하버드대 교수들을 비롯한 미국의 지식인들이 김대중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1982년 말 김대중은 미국으로 떠났고, 라이샤워의 알선으로 1983년 하버드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의 방문연구원으로 활동했다. 1973년 라이샤워가 김대중을 초청하려다 불발된 지 10년 만에 이루어진 바였다. 라이샤워는 1985년에 김대중이 귀국할 때도 그의 안전한 귀국을 요구하는 미국의 유력 인사들과 함께 연대했고, 1987년 출간된 영문판 《Prison Writings》에는 서문을 썼다. 그리고 라이샤워는 1990년 세상을 떠났다.
이 인연을 장보고 이야기와 연결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라이샤워가 김대중을 도운 것은 장보고를 소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기 위한 학자와 정치인의 연대였다. 또한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뒤 추진한 장보고 재조명 정책이 라이샤워의 직접적인 제안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도 현재의 자료만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라이샤워와 김대중 사이에 형성된 신뢰와 인연은 분명히 존재했다. 한편으로는 김성훈이 라이샤워의 장보고 연구를 읽고 장보고를 재발견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라이샤워와 김대중이 오랜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 두 갈래의 인연이 김성훈과 김대중의 만남에서 어떤 방식으로 만났는지, 그것이 장보고 정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
6. 대통령이 된 김대중, 국가의 과제가 된 장보고
1997년 12월 18일,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1998년 2월 25일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는 외환위기라는 거대한 국가적 위기 속에서 새 정부를 이끌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장보고를 재조명하는 일은 단순한 역사문화사업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국가가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국제경쟁력을 회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국내 시장만 바라보는 데서 벗어나 세계와 연결되어야 한다. 사람과 상품이 국경을 넘어 움직이는 흐름을 이해하고, 해운과 항만, 수산업과 해양산업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바다를 국가의 변방이 아니라 새로운 성장의 무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장보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역사적으로 상징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첫해인 1998년,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은 《장보고 해상활동의 재조명과 21세기 해양사상 고취방향》이라는 연구보고서를 발간했다. 보고서는 장보고가 청해진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주요 지역을 연결하는 해상교역 체계를 구축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그의 활동을 현대 해양경영의 관점에서 재검토했다.
이 연구는 장보고를 기념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활동을 오늘날의 해양정책과 연결하려는 움직임이 당시 이미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같은 해 7월 10일, 김대중은 해양수산부의 국정과제 추진상황 보고에서 장보고의 업적을 재조명할 필요성을 직접 강조했다. 이듬해인 1999년 6월에는 해양수산부에 해상왕장보고기획단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1999년 11월 12일, 재단법인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장보고와 해양문화에 관한 연구를 추진하는 한편, 그 성과를 대중에게 알리고 문화예술 콘텐츠로 확산하는 일이 사업의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뮤지컬과 창극, 드라마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장보고를 대중에게 소개하려는 구상도 이 흐름 속에서 나왔다. 드라마 해신이 방영된 것도 그 일환이었다.
장보고는 이제 몇몇 역사학자들이 연구하는 인물에 머물지 않았다. 국가가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기관이 자료를 축적하며, 문화예술계가 대중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대상으로 변모했다.
1999년 12월 김대중은 해군 제2함대사령부를 방문해 장보고를 다시 언급했다. “다시 한 번 해상왕 장보고 시대를 열어가자”는 메시지는 장보고를 단순히 과거의 영웅으로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의 해양강국을 지향하는 상징으로 삼으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물론 이 사업이 김대중 개인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장보고 연구를 축적해 온 학자들, 해양정책을 담당한 공직자들, 관련 연구기관과 문화계의 노력이 함께 작용했다. 김성훈의 역할도 이 전체 과정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김대중 정부의 장보고 재조명은 한 개인의 관심이 국가정책으로 곧장 옮겨간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학문적 재발견과 사회적 관심, 정책적 판단과 제도적 추진이 만나면서 만들어진 결과였다.
7. 한 권의 책에서 시작해 다시 바다로
이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보자. 1939년, 한 젊은 역사학자가 일본 승려의 여행 기록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논문을 작성했다. 그 기록 속에서 그는 9세기 동아시아의 바다를 오가던 신라인들의 세계를 발견했고, 그 세계의 중심에 장보고가 있었다. 1955년 정식 단행본으로 출간된 그의 책은 장보고를 ‘해상상업제국의 무역왕’이라는 인상적인 표현으로 세계에 소개했다.
그 책을 읽은 김성훈은 장보고를 새롭게 바라보았다. 1988년에는 중국 산둥반도의 적산법화원을 찾아갔고, 1989년에는 여러 연구자와 함께 장보고대사해양경영사연구회를 발족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관심을 연구와 사회적 실천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김성훈은 민주당 총재 시절의 김대중을 만나 장보고를 설명했다. 김대중은 1997년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듬해 장보고의 업적을 국가적 차원에서 재조명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1999년에는 장보고를 연구하고 알리기 위한 기구가 만들어졌으며, 해양강국의 미래를 장보고의 역사적 경험과 연결하려는 구상이 공공의 과제로 떠올랐다.
여기서 라이샤워와 김성훈, 김대중의 관계를 단순히 일직선으로 그려서는 안 된다. 라이샤워가 김대중에게 장보고를 직접 전수했다거나, 김대중의 정책이 오직 라이샤워의 연구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라이샤워의 연구가 김성훈의 장보고 인식에 영향을 주었고, 김성훈이 장보고의 역사적 의미를 김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은 이 이야기의 중요한 연결고리다.
한 사람의 연구가 다른 사람의 관심을 일깨우고, 그 관심이 또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거쳐 공공의 과제로 발전하는 과정. 역사가 오늘의 현실과 만나는 방식은 때로 이렇게 뜻밖의 경로를 거친다.
장보고는 9세기 동아시아의 바다에서 활동했다. 라이샤워는 20세기에 그를 세계 해양사의 관점에서 재발견했다. 김성훈은 그 연구를 바탕으로 장보고를 우리 사회에 다시 소개했고, 김대중은 대통령으로서 그를 국가의 해양 비전을 상징하는 인물로 끌어올렸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은 누구일까? 장보고를 재발견한 라이샤워일까, 그 연구를 이어받은 김성훈일까, 아니면 장보고를 국가정책의 무대로 불러낸 김대중일까. 어쩌면 세 사람을 연결하는 더 중요한 주인공은 따로 있을지 모른다. 바로 바다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다.
바다를 육지의 끝으로 바라보면 장보고는 변방의 군사 지휘관에 머문다. 그러나 바다를 세계와 연결되는 통로로 바라보면 장보고는 국제무역과 해양경영을 선도한 인물이 된다. 라이샤워는 그 가능성을 역사 연구에서 발견했고, 김성훈은 그것을 한국 사회에 전달했으며, 김대중은 국가의 미래를 위한 상징으로 활용했다.
한 권의 역사서에서 시작된 작은 변화가 연구자의 열정과 정치인의 선택을 거쳐 국가적 사업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은 장보고라는 인물의 의미뿐 아니라 역사가 오늘날의 사회에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1200년 전 장보고가 바다를 통해 세계와 연결되었다면, 20세기 말 그의 이름을 다시 불러낸 사람들은 역사를 통해 미래와 연결되고자 했다. 장보고를 다시 불러낸 까닭은 과거를 찬양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가 바다에서 보여준 가능성을 오늘의 대한민국이 다시 묻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