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도의 닻별들-❸이남규①]한학자의 꿈 접고 신학문 길로…이남규, 신앙과 민족의식에 눈뜨다
복길리 서당의 한학도, 목포·광주·서울 오가며 새로운 학문 탐색 숭일학교서 3·1운동 정신 만나 애국심 키워…일본 유학은 병마로 좌절 기독교 입문 후 평양신학교서 12년 수학…목회자의 길로 나아가
배종덕 작가 역사에세이스트 ‘항도의 닻별들’
[목포시민신문] 목포시민신문은 목포항 개항 130주년을 앞두고 역사에세이스트 배종덕 작가의 기획연재 ‘항도의 닻별들’을 연중 게재한다. ‘닻별’은 밤바다에서 항해의 방향을 알려주는 별처럼 목포의 미래를 비추는 인물을 뜻한다. 이번 연재는 언론·정치·의료·영화·문학·미술·산업 등 각 분야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한 목포 인물 12명의 삶과 업적을 총 3부로 나눠 조명한다. 단순한 성공담을 넘어 시대적 한계와 도전, 좌절과 성취를 살피며 개방성과 창조성, 문화예술성으로 이어진 ‘목포정신’의 뿌리를 찾아간다. 목포 출신인 배 작가는 목포중.고등학교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하고 MBC PD와 제일기획(삼성그룹) 기획국장 등을 지냈으며, 저서 『나는 일하고 싶다』와 『매향노라 불러온 사람』을 펴냈다. 본지에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을 35회 연재한 그는 이번 연재를 통해 잘못 알려진 기록을 바로잡고 잊힌 인물들의 삶을 오늘의 시민과 미래 세대에게 전할 예정이다.<편집자주>
<글 게재 순서>
■제1부 시대의 길을 연 사람들
❶김철진(1900~1971)
❷차남수(1903~1990)
❸이남규(1901~1976)
①출생과 성장 신앙의 길
②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의 목회
③정치 입문과 제헌 국회의원 당선
④제헌의정과 초대 전남지사
⑤도정 마무리와 참의원 활동
⑥교육자의 길과 마지막
❹최병우(1924~1958)
■제2부 문화의 항로를 연 사람들
■제3부 생활과 문명을 바꾼 사람들
이남규(1901~1976)
- 종교인, 정치인, 교육인 -
“항도의 닻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의 업적과 헌신이 컸음에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에게 기억되지 않거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춘곡 이남규다. 종교인, 정치인, 교육인으로서 한국 기독교계와 대한민국의 건국과 헌정사에 한 획을 긋고 큰 족적을 남겼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남규가 누구지? 아! 그 목사.” 정도로 개념 없이 반문하고 그저 그런 목사 중의 한 사람 정도로 기억한다. 인간의 기억력의 한계를 탓해야 할지, 무관심을 원망해야 할지 심히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2026년, 금년은 춘곡 남규의 탄생 125주년(1901년), 서거 50주년(1976년)이 되는 매우 뜻깊은 해이다. 그러나 이남규의 고향(출생은 무안군 청계면 복길리이나 소년 시절 목포로 이주하였음), 우리의 고향 목포에서는 남규를 추모하고 기리는 어떠한 모임이나 행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심히 유감스럽고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목포시민신문 지면(개항130주년 기념특집연재)을 통해 춘곡을 재조명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 상심이 다소나마 가라앉는 듯하다. 그렇다면 과연 이남규는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떤 유산을 남겼을까? 궁금하다.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75년 동안 그가 남긴 족적을 탐사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해답을 찾기 위한 탐사의 순서는 ①출생과 성장, ②종교인 이남규, ③정치인 이남규, ④교육인 이남규, ⑤이남규의 마지막과 연보, 다섯 장으로 구성했다. 그럼, 탐사의 첫 번째 순서인 춘곡 이남규의 출생과 성장부터 알아보자.
출생과 성장
남규는 을사늑약이 맺어지기 5년 전인 1901년 2월 28일, 전라남도 무안군 청계면 복길리에서 석제 이재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청계면 복길리는 이남규의 9대조인 홍주님께서 임진왜란 때 남쪽으로 피난 오셔서 숨어 사시던 곳으로 깨끗하고 한적한 곳이다. 이남규의 가정은 부유하지도 않고 가난하지도 않은 중산층 살림에 조모님, 부모님, 그리고 형님 한 분과 누님 두 분이 함께 살고 있었다. 남규는 막내 손자, 막내 아들, 막내 동생으로 온 집안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고 한다.(온 세상 위하여, p.32 한국기독교장로회 춘곡 이남규 목사 저서 출간위원회)
남규는 어려서부터 할머니 등에 업혀서 서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서당에서는 한시를 잘 짓는다고 어른들께 칭찬과 귀여움을 받았다. 12세 때 병풍이란 제목의 시를 지어 주위의 어른들을 놀라게 했으며 집에서는 장원례를 치른다고 떠들썩하기까지 했다. 19세가 되던 가을, 남규는 한학자가 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전간제라는 선생을 찾아 계화도라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가던 도중 어찌된 셈인지 떠날 때의 목적과는 달리 신문학의 세계가 기다리는 목포로 발걸음을 돌렸다.
신학문에 입문(영흥.목포공립보통.숭실.중등학교)
목포에 도착한 남규는 곧바로 목포의 영흥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막상 학교에 들어가 보니 영흥학교는 그때 사람들이 말하는 예수학교였고, 선생님들은 너무 젊어서 선생 같아 보이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공부하는 것조차 어린아이들의 장난같이 보였다. 그리고 제일 비위에 맞지 않는 것이 예배시간이요, 귀찮은 것이 성경공부였다. 남규는 학교에 대해 싫증이 났고, 양이 차지 않았다. 남규는 얼마 되지 않아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북교초등학교)로 옮겼다. 그러나 남규는 새로 옮겨온 학교에서도 만족을 느낄 수 없었다. 예배시간과 성경공부 시간이 없을 뿐 영흥학교와 다른 것이 없었다. 대관절 학교라는 것이 이런 것이고 신학문이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규는 그렇다고 해서 다시 서당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져 번민에 사로잡힌 신세가 되었다.
이때, 남규의 속사정을 알게 된 담임선생께서 “자네는 나이도 많고 한문에 능숙하니 속성과를 거쳐 바로 고등보통학교(현중·고등학교)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를 해주셨다. 그리고 속성과가 있는 서울에 있는 학교로 갈 수 있는 소개편지까지 써주셨다.
그러나 시대상황이 남규의 서울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서울에서는 3.1운동의 여파가 또다시 일어났고, 그에 따른 소란으로 학부형들이 염려와 근심에 빠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뿐만아니라 항상 남규를 후원하던 그의 형님도 서울 가는 것을 만류했다. 얼마 후 남규는 서울로 가려던 유학의 발길을 광주의 숭일학교로 돌렸다. 숭일학교에 입학한 남규는 처음에는 숭일학교가 영흥학교와 같은 예수학교여서 다소 불편했다.
그러나 숭일학교에서 생각지도 못한 민족의식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숭일학교에는 3.1만세를 부르다가 옥중에서 고생하는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많았으며, 예배시간에 국가, 민족과 옥에 갇힌 사람들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마음을 파고들었다. 남규는 자신도 모르게 애국심이 가슴에 벅차오름을 느꼈으며 자연히 고개가 수그러지기까지 했다. 게다가 일제의 폭정에 항거하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그러나 남규에게 민족의식을 눈뜨게 한 숭일학교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남규가 영문도 모른 채 가담한 동맹 휴학사건으로 숭일학교의 문을 나와 당초 목적했던 서울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도착한 남규는 중동학교에 입학했다. 남규가 중동학교에 입학하게 된 동기는 당시 중동학교는 뒤늦게 학교 나온 사람들을 위하여 2년 동안 속성과에서 중등학과를 맞춰 주었기 때문이다. 남규에게 잘 맞는 학교였다. 남규는 학업에 몰두하였다. 주야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배우고 익혔다. 낮에는 중동학교에 나가고 밤에는 강습소까지 다녔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넉넉지 못한 학비로 추운 삼동에 자취생활을 하다 보니 영양실조에 걸리는 일이 생겼다. 결국은 병이 나서 눕게 되어 학업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열심과 욕심이 화를 부른 것이다.
미완의 일본 유학 시절
1924년이 되었다. 남규가 24세 되던 해이다. 병마에서 회복된 남규는 이번에는 신학문에 뜻을 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 도착한 이남규는 오사카, 히로시마, 마루가메시 등을 전전하며 정착을 시도했다. 하지만 뜻대로 쉽지가 않았다. 신학을 공부해야겠다는 높은 뜻을 품고 일본에 왔지만 일본생활은 녹녹지 않았다.
경제적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의 신학공부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형편이었으며 어떻게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가느냐가 급선무였다. 고민 끝에 이남규는 시코구 지방의 섬 지역인 마루가메시로 갔다. 마루가메시에는 목포에 와서 일본인교회를 담임하였던 일본인 D목사가 목회를 하고 있었다.
D목사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도 아닌 그저 안면정도 있었던 사이였다. 하루하루가 힘들었던 적수공권의 남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일본에서도 섬 중의 섬으로 알려진 마루가메시의 D목사를 찾아간 것이다. 마루가메시에 도착한 이남규는 D목사의 도움으로 숙식과 일자리가 해결되어 호구지책은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루가메시의 생활은 미래에 대한 비전이라는 것은 바랄 수도 없는 생활이었으며 신학공부는 완전히 뒷전이었다. 그러나 남규는 이에 굴하지 않고 취직생활을 통해 학비를 마련해서 기어이 신학공부를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1년도 못되어 큰 시련이 왔다. 남규가 병에 걸렸다. 병명은 “심장성각기”로 일반 각기와는 달리 악성으로 백약이 무효였다.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서는 치료될 수 없는 위험한 각기병이라는 것이다.
의사의 그 한마디 말에 목적 삼고 온 신학의 길은 산산이 무너져 버렸는가 하면, 학비 마련에 튼튼한 보루가 되었던 큰 꿈이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온 세상 위하여, p.99 한국기독교장로회 춘곡 이남규 목사 저서 출간위원회) 남규는 발길을 고국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남규는 1년이 넘도록 각기병 치료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각기병은 쉽게 물러가지 않고 일생의 고질병이 되고 말았다.
기독교인이 되다
남규는 유교적인 집안에서 성장했고 한문을 전공했다. 유교사상에 젖어 왔기 때문에 기독교에 반대해 왔다. 그러한 이남규가 어떻게 예수를 영접하고 기독교인이 되었을까?
남규의 회고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일제에 빼앗겼던 주권을 다시 찾겠다는 저항심이 나로 하여금 기독교인이 되게 했다고 말할 수 있다.(온 세상 위하여, p.105 한국기독교장로회 춘곡 이남규 목사 저서 출간위원회)
남규가 이러한 애국심을 갖게 된 배경에는 광주숭일학교에서 싹텄던 애국심과 신앙심의 씨앗이 항상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다, 내가 예수를 믿기로 결정한 것은 신앙을 위해서라기보다 출세를 하자면 기독교회에 나가야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까운 곳으로 찾아간 교회가 “기독교대한감리회 종교교회(기독교대한감리회 종교교회 -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8길 48, 1900년 4월 15일 창립.)다.
당시 담임은양주삼목사였다. 품위가 있었고 설교에서 얻은 감화도 컸다. 여기서 믿음의 싹이 텄다. 그 후 양주삼 목사의 지도에 따라 세례까지 받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기독교인이 된 내력이다.” 이남규가 기독교인이 된 해가 언제인지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양주삼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회고에 의한다면 1920년에 기독교인이 된 걸로 추정된다. 양주삼 목사는 1919년 9월부터 2년간 종교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였기 때문이다.
평양신학교 시절
남규가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해는 1926년이다. 졸업한 해는 1938년이다. 입학한 지 12년만에 평양신학교 34회 졸업생이 되었다. 남규의 평양신학교의 입학과 졸업은 이상했다. 입학은 순전히 타의에 의한 결정이었고, 졸업은 졸업 연한의 네 배의 세월을 거친 기이한 졸업이었다. 입학과 졸업이 모두 정상이 아니었다.
입학경위부터 살펴보자. 이남규는 원래부터 신학은 물론 목사가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때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까지 갔던 남규가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일본에서의 신학공부 실패의 트라우마에서 기인한 듯하다.
그러나 남규에게 평양신학교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도록 강력하게 권유한 사람들이 있었다. 고향의 복길교회의 당회장인 W선교사와 동역자인 K와 J장로 등이 강력한 권유자들이었다.
남규는 자신이 세운 교회의 지도자들의 권유를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타의에 의해서 내키지 않는 신학공부를 위해 늦은 나이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졸업경위를 살펴보자.
남규가 12년이라는 졸업 연한의 네 배의 세월을 거쳐 졸업하게 된 저간의 사정은 다 알 수 없지만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타의에 의해 시작한 신학과 목사가 되기 위한 공부가 전혀 의욕이 나지 않았다. 또 하나는 평양신학교를 일제의 감시를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로 생각하였다. 일제의 감시가 두려웠던 남규로서는 공부를 앞세우고 신학교에 깊숙이 몸을 숨겨 두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정들이 이남규를 12년 동안 신학교에 다니게 하였다. 아무튼 남규는 생각지 못한 신학교 입학에 예기치 않던 12년만의 신학교 졸업이라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