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林田화배액-자네 성공(成功)할 줄 알았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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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林田화배액-자네 성공(成功)할 줄 알았써어”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3.03.19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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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온 다음해(1976년)에 안국동에 있는 미술회관에서 서울 처녀전(處女展)을 가졌다. 선대들의 작품을 각각 두 점씩 여덟 점과 내 그림 30점을 포함하여 도합 38점을 전시하였는데 처음 하는 서울展에 겁도 나고 자신도 없어 先代들을 등에 업은 초미니 운림산방 4代展을 하였다. 헌데 이게 웬일인가! 일간지는 물론 TV, 라디오, 주간지, 월간지까지, 모든 매스컴이 총동원되어 국내에서 최초로 열린 4代展에 대한 취재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전시 안내 팸플릿 안 보냈다고 화를 내는 기자, 다른 신문 다 났는데 우리만 빠졌다고 혼나고 나온 기자, 그리고 전시 후에라도 내야 된다며 통사정하는 월간지 기자까지- 그야말로 숨 쉴 시간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인터뷰를 하였는데 이러한 매스컴의 엄청난 위력 때문이었는지 전시 기간 내내 수천을 헤아리는 관객이 전시장 문턱이 닳을 정도로 장사진을 이룬 것은 미술회관 개관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이 林田화배액-자네 성공할 줄 알았써어” 하시면서 한 손을 높이 들고 들어오시는 분은 그때 한심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셨던 한양중학교 교감 선생님이셨다. 모든 매스컴이 임전 뉴스로 범벅이 됐다고 너스레를 떠는 선생님과 두 손을 꼭 잡은 채로 그동안을 얘기하면서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서울展을 바탕으로 그 후 부터는 國展 시즌을 겨냥하여 해마다 개인전을 가졌다.
그 전시는 國展에서 볼 수 없는 林田의 작품들을 본 전시회를 통하여 함께 감상하고 평가할 수 있는 대화의 창구였으며 운림산방의 4代 화맥이 시시각각 변모하는 林田의 안개 그림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널리 알리는 홍보적인 성격까지 띤 전시회였다.

이렇듯 해마다 국전(國展)을 대신(代身)(?)하여 치러지는 개인전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林田의 國展”이라는 이름까지 붙이고 아주 쓰디쓴 웃음을 웃었다. 그것은 지난 國展을 회상하며 가슴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서린 긴 휘파람 같은 것이었다.

서울展이 매스컴의 덕으로 성황리에 끝났다.
그리고 그 수입으로 1977년 불광동에 택지를 마련한 후 1979년 검정 벽돌로 2층 집을 지어 전시 장 겸 화실로 활용하였다. 당시에는 화가가 짓는 집이라고 온 동네에 소문이 나서 인근에서까지 구경을 올 정도로 모양이 반듯하고 수려한 주택이었다. 그러나 돈이 부족해 얻은 은행 융자가 생각보다 부담스러워 결국 3년 정도 버티다 팔게 되었고, 1980년 거기에서 남은 돈으로 서울과 인접한 경기도 고양시에 미래의 林田미술관을 설립할 목적으로 1200평(임야포함)의 땅을 구입하였다. 그 후 IMF가 오고 생활의 리듬이 깨지게 되자, 그 넓은 땅을 혼자 관리한다는 것이 무모한 짓이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고, 2005년 급기야는 그것마저 정리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배경에는 珍島와 木浦에 林田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상설(常設)미술관이 두 군데나 있었기 때문에 애초에 계획했던 林田개인의 독립(獨立)된 미술관이 큰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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