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제대로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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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제대로 알자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5.12.1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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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 저우언라이는 문화혁명기간 실각한 덩샤오핑 등 고급 간부들을 복권시켰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의 복권은 지금의 G2 중국이 있게 한 주춧돌이 됐다. 저우언라이는 세상을 뜨기 1년 전인 1975년 1월 13일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앞으로 중국의 발전과 개방을 위한 광범위한 정책인 4대 현대화 계획을 발표했다.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떠난 2년 뒤인 1978년 덩샤오핑은 중앙인민협상회의 주석직을 겸하면서 중국의 개혁개방을 진두지휘했다.
 

‘영원한 2인자‘ 주은래가 없었다면 모택동도 없었을 것
‘오뚝이’ 등소평 추천해 오늘의 G2중국 초석 만들어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홍군과 장제스(蔣介石)의 국부군과의 내전은 게임이 될 수 전쟁이었다. 장제스의 입장에서는 결코 질수 없는 게임이었고, 마오쩌둥의 입장에서는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미국과 영국의 지원으로 폭격기까지 갖춘 장제스의 막강한 군대는 마오쩌둥의 홍군을 괴멸시키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았다.

일본 육군사관학교까지 나온 장제스는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반면에 후난사범학교를 졸업해 베이징대학교 도서관 사서보조를 했던 마오쩌둥은 총 한번 잡아보지 못한 문장가였다. 20세기 세계사의 최대의 사건 중의 하나는 문장가가 군인을 제압하고 성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이다.

장제스를 타이완으로 몰아낸 마오쩌둥이 1949년 10월 1일 오후 3시 베이징 천안문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는 개국대전(開國大典)을 거행하기로 돼 있었다. 타이완의 장제스 관저에는 이날 아침부터 베이징 천안문 행사장 공습명령을 내려달라는 국민당 공군사령관 저우즈러우(周至柔)의 전화가 빗발쳤다. 그는 “전투기 출격이 지체되면 제시간에 폭격이 어렵다”며 장제스에 명령하달을 재촉했다.


장제스, 천안문 폭격명령 취소

몇 시간째 “기다려라”라는 말만 되풀이하던 장제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임무를 취소하라”고 단호하게 명령했다. 폭격명령을 취소한 장제스를 두고 훗날 “천안문과 자금성 등 귀중한 문화재가 파괴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또 마오쩌둥이 행사장을 천안문으로 정한 것은 “장제스가 다른 곳이면 몰라도 천안문을 절대로 공습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는 해석도 이어졌다. 그러나 장제스가 공습계획을 취소한 주된 이유는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한 대륙인으로서의 기질 때문이 아니었을까?

마오쩌둥이 국공내전 과정에서 지도자로 세워지고 결국은 승리할 수 있었던 내막을 들여다보면 저우언라이(主恩來)가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후난성 샹탄현 샤오산구 출신인 마오쩌둥은 장쑤성 화이안 출신인 저우언라이보다 나이가 5살이나 많다. 

1919년 3월 1일 조선민중들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해 독립투쟁의 깃발을 올리며 봉기했던 그해였다. 두 달 뒤인 5월 4일 중국대륙에서도 5·4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일본 유학에서 막 돌아온 저우언라이는 텐진에서 5·4운동을 주도한 학생 가운데 한명이었다. 그 때 영원한 동지이자 동반자 덩잉차오를 만났다.


상하이 쿠데타로 장제스와 결별

1921년 7월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서 감시를 피해 역사적인 중국 공산당이 탄생할 때 마오쩌둥은 13명의 대표 가운데 한명이었지만 주도적인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이 때 저우언라이는 프랑스 유학 중이었고, 또 다른 유학생 덩샤오핑(鄧小平)도 만나게 되고 중국유학생들을 규합해 유럽에서 공산당 조직을 만들게 된다. 코민테른 등의 지원으로 설립된 광저우에 황푸군관학교가 개교한다. 1924년 11월 중국 공산당의 지시로 4년의 유럽유학을 끝내고 돌아온 저우언라이는 황푸군관학교 정치부 주임을 맡게 된다. 이 학교는 1911년 신해혁명이후 군대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국민당 쑨원이 주도로 개교했으며, 혁명 간부 교육이 목적이었다. 1925년 쑨원이 지병으로 세상을 뜨고 다음해인 1926년 장제스의 주도로 군벌들을 제압하는 북벌전쟁이 진행됐을 때만해도 불안한 국공합작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1927년 4월 11일 장제스는 국민당을 깨끗하게 한다는 청당운동을 명분으로 상하이에서 2만5천여명의 공산당원과 진보인사들을 살해한다. 이른바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로,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아 황푸군관학교 졸업생들을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만든 장제스는 공산당과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대신 미국과 영국을 대변하는 상하이 재벌들과 비밀협약을 맺어 그들로부터 자금지원을 받게 된다.

장제스에 맞선 중국공산당은 난창 우한 등지에서 봉기하지만 실패한다. 마오쩌둥은 장시성 징강산으로 숨어 들어가고 본격적인 국공내전이 시작된다. 1934년부터 1936년까지 역사적인 사건 ‘대장정’이 이어진다. 대장정은 중국 남쪽 장시성(江西省)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앙정부와 중국 공산당이 장제스의 국부군의 포위 공격을 뚫고 홍군의 호위를 받으며 1만 2,500km를 강행군하여 샨시성(陝西省) 북부 옌안(延安)까지 이동한 것을 말한다.


대장정 과정에서 마오쩌둥을 리더로 세우다

1934년 10월 17일 홍군이 장시성 위두하를 건너면서 시작된 대장정은 장제스 국부군의 막강한 공군력 등 군사력에 포위당해 전멸 위기에 몰린 중국 공산당의 대탈출이었다. 그러나 출발 당시 8만6천여명이었던 홍군은 그해 11월말 후난성 샹강 전투에서 전력의 3분의 2를 손실되는 참담한 패배를 하게 된다. 국부군의 추격과 포위 공격에 당해내지 못한 채 전멸 위기에 놓였다. 전투기에 탑승해 전투를 직접 지휘하던 장제스는 승리를 자신했다.  

해를 넘겨 1935년 1월 7일, 홍군은 대장정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구이저우성(귀주성) 쭌이에서 역사적인 회의를 연다. 바로 이 자리에서 저우언라이는 참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전략상의 잘못을 있었다며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다. 그러면서 저우언라이는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마오쩌둥을 홍군사령관으로 추천한다. 이 날 회의에는 마오쩌둥을 당 중앙 상무위원으로 임명됐고 저우언라이와 주더(主德)은 군사지휘권을 계속 맡기로 했다.

이날 회의를 계기로 드디어 마오쩌둥은 군대와 정치 등 모든 최고 지휘권을 맡게 되는 운명적인 날로 기록됐다. 저우언라이 주도로 열린 쭌이회의에서 중국혁명의 운명을 가늠하게 된 것이다. 회의가 끝난 뒤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 뜻이 아니었다면 쭌이회의는 열릴 수 없었다”고 말했다. 홍군은 압박해 오는 장제스 군대에 쫓겨 처절한 전투를 치러야 했고 윈난(雲南), 쓰촨(四川), 깐수(甘肅)를 거쳐 샨시(陝西)에 도착함으로써 1년이 넘었던 죽음의 행군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저우언라이와 장쉐량의 시안사변

1936년 12월 시안사변(西安事變)은 국민당 소속 동북군총사령관이었던 장쉐량(張學良)이 장제스를 감금해 놓고 공산당과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울 것을 요구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장제스는 마오쩌둥의 홍군을 소탕(?)하기 위해 시안에 왔지만 결국 여론과 명분에 밀려 홍군 제압에 포기하고 대륙을 침략한 일본군에 맞서 항일전쟁을 하게 된다. 이른바 2차 국공합작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건 또한 저우언라이가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장쉐량이 거사를 실행하기 8개월 전인 1936년 4월 9일 옌안 근처에서 그는 장쉐량을 만나 ‘내전을 중단하고 일본에 대항해야 한다’고 설득시켰고, 장쉐량은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1993년 1월 14일 노년의 장쉐량은 타이완에서 일본 <도쿄신문>과 인터뷰에서 저우언라이에 대해 “그는 성격이 민첩하고 과감했고, 우리는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는 오랜 친구 사이처럼 되었다. 공산당은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두 사람에 의해 발전한 것이다”고 말했다.  
마오쩌둥을 추대함으로써 영원한 2인자 역할만을 담당했던 저우언라이 총리는 1976년 1월 세상을 뜰 때까지 불문율과 같은 집안의 규칙을 정해놓고 있었다.


친척들에게도 특권과 특혜 금지

집안의 큰 형이지만 자녀가 없었던 그는 조카들에게는 큰 아버지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총리와 외교부장이라는 권위와는 다르게 친척들에게 총리의 친척이라는 특권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어디를 가든지 저우언라이 총리의 친척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친척들이 특권과 특혜를 누리는 것을 금지시켰다.  
 
▲ 조카들은 자기 일을 버려 둔 채 베이징까지 우리를 만나러 와서는 안되며, 출장으로 지나는 길에만 들를 수 있다. ▲ 방문객은 모두 국무원 초대소에서 묵는다. ▲ 모든 사람은 식당에 가 줄을 서서 밥과 반찬을 산다. 직장이 있는 자는 자신이 식권을 사며, 직장이 없는 자는 총리가 대신 식비를 낸다. ▲ 극을 볼 때는 가족신분으로 표를 사서 입장하며. 초대권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 공무용 차를 사용해서는 안된다. ▲ 생활은 반드시 고생스럽고 소박해야 한다. ▲ 어떤 장소에서도 총리와의 관계를 말하여 자신을 과시해서는 안된다. ▲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거나 특권화 해서는 안된다.


덩샤오핑을 거듭 추천한 마지막 편지

많은 이들은 오늘날 G2국가로 부상한 중국을 설명할 때 덩샤오핑(鄧小平)의 등장을 꼽는다.
1840년 영국과 아편전쟁을 계기로 100년 간 계속된 반제국주의 해방투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마오쩌둥이었다. 저우언라이는 국공내전과 항일전쟁 때 자신은 1인자 자리를 양보하고 마오쩌둥을 리더십으로 세웠다.

1966년부터 10년 동안 계속된 문화혁명의 광풍 속에서 덩샤오핑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저우언라이의 힘이 컸다. 1978년부터 시작된 중국 개혁개방 정책의 초석은 저우언라이가 만들었다. 영원한 2인자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을 마오쩌둥에게 부총리로 천거했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숨을 거두기 70여일 전인 1975년 10월 24일 병실을 찾아온 덩샤오핑 부총리의 손을 잡고 “지난 1년간의 일들이 자네가 나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네.”라고 말했다. 입원한 자신을 대신해 총리대행을 맡은 덩샤오핑을 인정했으며, 세상을 뜨는 병상에서도 마오쩌둥에게 마지막 투혼으로 직접 편지를 써서 ‘덩샤오핑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 것’을 부탁했다.

저우언라이는 외교가로서 수완 뿐 만 아니라 차세대 지도자를 찾고 길러내고 준비하는데 탁월한 자질과 능력을 갖고 있었다. 결코 1인자 자리를 넘보거나 비위를 맞추는데 급급한 2인자가 아니라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기 위해 진정으로 인민과 국가를 위해 충성한 인물이었다.
20세기 중국을 이끈 인물을 압축한다면 저우언라이가 없었다면 마오쩌둥도, 신중국도, 지금의 부상하는 중국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지나친 표현이 아닌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말은 결코 빈발이 아님이 나중에 현실로 입증된 것이다. “마오쩌둥이 없었다면 중국의 혁명은 결코 불붙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우언라이가 없었다면 그 불길은 다 타서 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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