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엮은 조선 선비들의 매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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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엮은 조선 선비들의 매화 사랑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5.12.16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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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매화시를 읽다

매화! 그 이름만 들어도 향기롭다. 옛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이육사의 시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가 떠오른다.
매화 향기는 듣는다(聞香)고 한다. 저 멀리 아득히 눈 내리는 광야에서 달려오는 초인의 말발굽소리처럼 봄소식의 전령사 매화 향기가 아련하게 들렸다. 신익철 교수의 『조선의 매화시를 읽다』를 접하니 책에서도 매화향이 들리는 듯하다.
서둘러 집에 있는 시집들을 뒤져 한국 근현대의 시에서 매화시를 찾아보지만, 이육사의 「광야」 말고는 발견할 수 없다. 난초와 국화, 목련을 노래한 시들은 간간히 눈에 띄는데. 이른바 사군자(四君子), 매(梅) 란(蘭) 국(菊) 죽(竹)의 으뜸인 매화는 현대인에게서 멀어졌는가?

매화를 조선시대 지식인 문인 유학자들은 매우 애호(惑愛)했다. 매화를 일컫는 말 가운데 ‘빙설옥질(氷雪玉質)’ 혹은 ‘빙기옥골(氷肌玉骨)’이 있다.
얼음과 눈처럼 맑고 깨끗한 모습에, 옥 같이 곧고 고결한 정신을 말한다. 차가운 추위 속에서 꽃을 피우고 고결한 향기를 지니려면 옥처럼 여윈 모습으로 얼음과 눈처럼 매섭고 순결한 정신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매화는 친근하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

매화는 “달 떠오르는 황혼 무렵 그윽한 향기를 풍기다가(暗香浮動月黃昏)”, 옥처럼 여윈 자태를 차가운 달빛에 흐릿하게 비추고, 새벽이 가까워오도록 성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니, 오직 달만이 짝하는 고고한 자태이다. 달빛 속 어두운 밤길을 배회한 끝에 매화를 만난 시인이 던진 웃음에도 매화는 찬 꽃망울 성긴 가지에 반쯤 열린 미소로 답한다.
이것이 ‘탐매(探梅)’이다. 매화의 참모습을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내의 분매(盆梅)나 마당의 정매(庭梅)가 아니다. 찬바람불고 눈 내리는 대지에 뿌리박은 지매(地梅)를 직접 찾아나서는 것이 ‘탐매’였다. 생육신(生六臣) 김시습은 유달리 달빛에 비친 매화를 사랑했고 매화 찾는 길이 험한 것을 꺼리지 않았다. 방안에 두고 찬바람을 막으면서 애지중지 키운 매화를 종일 대하는 것은 ‘외로운 절개(孤節)’의 상징인 매화를 만나는 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보았다. 이른바 완물상지(玩物喪志)를 경계한 것이다. ‘매월당(每月堂)’, 매화와 달을 호로 삼은 김시습은 눈길 속에 찾은 매화를 달이 기울도록 지키며, 시간도 잊고 너와 나의 경계도 사라진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즐겼다. 무심한듯한 매화도 시인의 지취(志趣)에 동병상련으로 공감했으리라.

매화의 맑고 진실함을 칭송하고 그 이름을 무겁게 생각하던 옛날에도 월하매(月下梅)와 설중매(雪中梅)를 찾아 산길을 헤매는 ‘탐매’는 드물었다.
옛 시인들은 눈과 얼음으로 가득한 겨울철 집안에서 정성껏 가꾼 작은 분매(盆梅)를 지켜보았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만물이 허무의 정적에 싸여 있는 겨울, 매화가 꽃망울을 키우고 마침내 터드리는 모습에서 음이 다하고 양의 기운이 돌아오는 봄의 태동을 느끼고, 하늘이 만물을 낳은 마음을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창협은 매화를 감상하는 방법을 논했다. 꽃 한 송이에서 태극의 이치를 즐기는 현인(賢人), 고결하고 차가운 운치를 취하여 지취(志趣)가 같음을 즐기는 은사(隱士), 매화의 빛깔과 향기를 즐기며 시흥을 돋우는 문사(文士), 아름다운 여인과 매화를 옆에 함께 두고 귀한 술을 마시는 귀족 자제, 눈 속에서 봄을 혼자 차지한 듯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는 매화를 신기롭게 바라보는 속인(俗人)들이 있다고 하였다. 저자는 매화를 즐기는 다양한 방식에 대하여 분에 올려 함께하는 분매(盆梅), 집 안에 매화를 기르고 보는 공간(龕室)을 별도로 마련해서 즐기는 감매(龕梅), 화병에 꽃을 꽂아놓고 즐기는 병매(甁梅), 나아가 비단을 오려 매화의 모습을 본 뜬 조화매(造花梅), 꽃에서 밀랍이 나오고 밀랍이 꽃이 된다는 이치를 취한 윤회매(輪回梅)를 소개한다.

매화를 즐기는 풍조는 조선 후기 서울을 중심으로 유행하여 여항(閭巷) 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역시 매화의 표상은 여전히 옥설(玉雪) 청진(淸眞)의 은사(隱士)이다. 은사의 정신을 퇴계는 “군옥산 머리 제일 신선이여. 얼음 살 눈 빛깔이 꿈속에 고와서, 달 아래 일어나 서로 만나는 곳에, 완연한 신선 풍채 한번 살짝 웃네”(퇴계 「매화시첩」의 시 ‘溪齋夜起對月詠梅’, p.197)하고 읊었다. 수많은 매화 사진과 도판을 활용한 이 책을 통해 지은이는 바쁜 현대인에게 매화를 사랑하는 조선 시인의 정신을 매화 향기처럼 들려주고파 하는 듯하다.


<김덕현 경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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