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도해 모항 목포희망만들기 인문강좌-6
상태바
다도해 모항 목포희망만들기 인문강좌-6
  • 배현
  • 승인 2016.04.27 16: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배현 목포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배현 목포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바다의 효용성―자원의 보고
‘바다’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원의 보고, 미지의 세계, 모험과 탐험, 대자연 등의 어휘를 떠올리게 한다. 바다는 아름답고 친근한 곳이며 혹자들에게 삶의 터전이지만 동시에 거칠고 사나운 곳이며 언제라도 인간을 파괴할 수 있는 부정적인 힘이다.
바다가 각광을 받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바다의 효용가치에 주목한다. 바다는 인간에서 어패류 등의 어획자원을 제공해왔고 이미 해저 원유 채굴과 같은 자원 개발도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많은 미래학자들이 바다를 인류와 문명의 마지막 보류라고 주장한다. 땅 위에 있는 것들을 충분히 소비한 인류가 이제 의지할 것은 지구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바다라고 보는 것이다.
바다의 효용가치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또한 바다를 산업적으로 활용할 것을 주장한다. 관광산업이 대표적인 예인데 다양한 형태의 해양 스포츠, 스킨 스쿠버, 스노클링, 요트와 마리나, 크루즈 등과 같은 말들이 어느새 우리에게도 익숙한 말들이 되었다.

 
바다―문명의 이동 경로
바다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통로”라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재화와 물류들이 바다를 통해 유통된다. 인류의 문명은 큰 강과 비옥한 땅을 기반으로 형성되었고 현대의 대도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명과 문명의 교류, 다시 말해서 세계사의 변화에는 언제나 바다가 그 통로로 작용해 왔고, 바다의 지배자가 항상 당대 세계사의 주역으로 행세해 왔다.
고대 그리스 문명은 에게해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소위 “팍스 로마나”를 구축했던 로마 제국은 지중해 중심의 세계를 건설했다. 이후 중세를 지나면서 세계사는 대서양의 시대를 열었고 이탈리아와 스페인, 포르투갈 등 남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대서양을 중심으로 각축을 벌이게 된다. 20세기에 인류가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태평양이 세계사의 주무대가 되는데 태평양을 배경으로 한 미국과 중국이 오늘날 세계의 두 축을 형성한 것도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런데 이처럼 물류가 유통되고 문명이 전파되는 경로였던 바다는 침략의 통로로 작용하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일찍 근대화를 이룩한 유럽의 열강들은 군사력에 의지한 침략과 정복을 통해 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을 강점하고 경제적인 착취를 감행하였는데 늘 바다를 통해 이 침략을 성취해 나갔다. 바다를 소재로 많은 소설을 썼던 조셉 콘래드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암흑의 핵심?? 첫 장면에서 내레이터인 말로우는 테임즈강 하류에 정박한 배 위에서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광경을 바라보며 동료 선원들에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랜 세월 동안 이 바다 물길은 오늘까지 보석처럼 명성을 빛내고 있는 많은 선박들을 실어 날랐지.... 그들은 더러는 모험을 하기 위해 또 더러는 식민지에 정착하기 위해 떠난 사람들이었어. 정부의 배도 있었고, 거래소 상인들의 배도 있었지. 금을 찾아서 혹은 명성을 찾아서 저 강물을 타고 떠나던 그들은 허리에 칼을 차고 있거나 더러는 횃불을 들고 있었는데, 모두들 육지에서 무력을 휘두르는 사도가 되거나 성화의 불꽃을 전달한다고 나섰었지.』

테임즈 강은 북해로 흘러들고 북해는 다시 대서양을 통해 전 세계로 벋어나가는데 말로우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바다 물길을 보며 이 물길을 따라 미지의 세계로 나갔던 과거의 위인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위대한 인물들이었지만 또한 침략자들이었으며,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문명의 횃불을 치켜든 채 정복과 식민지 개척의 과업을 수행한 사람들이었다. 이들 침략자들은 비유럽 세계를 미개와 야만으로 간주하고 그 어둠의 세계에 문명의 횃불을 전파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웠다. 이처럼 바다는 인류 역사를 통해 물류가 유통되고 문명이 교차하며 침략이 수행되는 “통로”의 기능을 해 왔다.

 
바다―신비한 모험의 대상
많은 사람들이 생계유지나 부를 쌓기 위해 바다로 간다. 모험을 즐기고 명성을 쌓기 위해 혹은 운명의 전환점을 만들기 위해 바다로 가기도 한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바다의 위험을 무릅쓰고 신대륙으로 간 사람들도 있다. 바다는 미지의 세계인데, 바로 그 신비에 매혹된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로 나간다. 흰 고래를 잡으려는 에이합 선장의 집념을 그린 ??모비 딕??에서 허먼 멜빌은 이스마엘이라는 내레이터를 통해 인간과 바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건강한 신체와 강인한 정신을 지닌 소년들이 언젠가 한 번은 꼭 바다로 가고 싶다는 열망을 품는 것은 무슨 까닭에서인가?... 나로 말하자면, 나는 항상 멀리 있는 것들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에 젖어 있다. 나는 금단의 바다를 항해하고 야만의 땅에 상륙하기를 좋아한다. 안전한 것을 전혀 도외시하지는 않지만, 나는 공포를 감지하는 데에는 누구보다도 빠르고, 할 수만 있다면 그것과 친해지고 싶어 한다.』

바다는 소년들에게 열망의 대상이었고 전율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으며 고대로부터 인간이 신성시해 왔던 공간이다. 여기서 이스마엘은 “멀리 있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하며 금단의 세계인 바다의 경계를 넘어 공포를 즐기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 보인다.  무인도에 고립되어 24년 동안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이야기를 다룬 ??로빈슨 크루소??의 주인공은 중산계층의 안락한 삶을 권유하는 아버지의 충고를 무시하고 바다로 나간다.

“바다에 대한 갈망”과 “세상을 구경하고 싶은 생각”을 쫓아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바다로 나간 크루소는 몇 차례 항해에서 숱한 위기와 실패를 경험하고 마침내 브라질에 기착하여 농장주로서의 삶을 성공적으로 가꾸어간다. 그러나 농장이 번창하여 경제적 풍요와 안락한 삶이 보장되는 순간 아프리카 해안에서 노예무역을 하자는 동료 농장주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그는 “스스로를 파멸시킬 운명을 타고난 자”라고 자책한다.

그러나 스스로 파멸한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던지, 나는 그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처음에도 아버지의 선의의 충고를 듣지 않을 만큼 방랑벽을 누르지 못했거니와 이번에도 그에 못지않은 욕망이 일어나 그 제안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서둘러 이성보다는 본능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했다.
크루소는 바다를 향한 자신의 욕망을 방랑벽으로 치부하고 본능의 명령이라 불렸는데 이 욕망과 본능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다. 인간은 자연을 개발하여 문명을 건설하였고 국가와 도시, 그리고 제도를 만들었지만, 이제 그 사회적 안전망 속에 안주하는 대신 새로운 것, 알려지지 않은 것, 그리고 가보지 않는 곳들에 매력을 느끼고 이를 동경한다는 것이 이율배반적인 것처럼 보인다.

 
바다―성난 운명의 파괴자
성난 바다는 난폭한 파괴자가 된다. 바다에는 늘 예측하기 어려운 폭풍이 불어오고 높은 파도와 소용돌이는 항해하는 배들을 위협하며 성난 바다가 해안을 덮치면 “쓰나미”라는 재앙이 된다. 우리는 최근 <세월호>의 침몰이라는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수백 명의 어린 학생들이 희생되는 경험을 했다.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잔잔해진 바다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유지하며 주인공은“이런 아름다운 광경은 일찍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고 반응한다. 하지만 다음 순간 돌변한 바다는 폭력적인 힘으로 인간을 위협하고 금방이라고 배를 부수고 인간을 파멸시키려는 기세를 과시한다.
20세기 미국 “잃어버린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인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주인공인 산티아고 노인은 바다의 표리부동한 두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바다는 그처럼 잔인해질 때도 있는데 어쩌자고 조물주는 제비갈매기처럼 연약하고 가냘픈 새들을 만들어 냈을까? 보통 땐 바다는 친절하고 무척 아름답지. 그러나 때론 잔인해질 수 있고 그런 변모는 항상 순식간에 일어나는 법인데.』

이 장면에서 산티아고 노인은 날짐승의 처지를 염려하고 있지만 그것은 실은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이야기이며 노인 자신이 장차 겪어나가야 할 역경과 고난에 대한 전조이기도 하다.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많은 문학 작품에서 바다는 인간을 파멸시키는 부정적인 힘, 폭군과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아일랜드 극작가 존 밀링턴 싱의 단막극, '바다로 달려간 사람들'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어부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모리아는 남편과 여섯 아들, 그리고 두 딸을 두었지만 이미 남편과 네 아들이 바다에 나갔다가 사망한 비극을 안고 살고 있다. 막이 열리면 그녀는 바다에 나가 소식이 없는 5남 마이클을 기다리고 있는데 마을에서는 그가 이미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마지막 남은 아들 바틀리마저 바다로 가려는 것을 만류하고 있는 형편이다. 상징주의 전통으로 쓰인 이 짧은 드라마는 결국 모리아가 남은 두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며 끝난다.
남편과 여섯 아들 모두를 바다에 빼앗긴 여인의 비극을 다룬 이 드라마는 일견 부조리하고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일면으로는 이 드라마가 아주 현실적인 그리고 보편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바다가 삶의 터전이고 생계유지의 유일한 방편일 때, 그들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바다를 외면하거나 회피할 수 없다.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가장이, 아버지가 바다에 희생되었다 하더라도, 동생이, 그 아들이 다시 바다로 나가야 하는 운명을 감당해야만 한다.

 
바다―냉혹한 우주의 질서
성난 바다는 인간을 파멸시키는 폭력적인 힘이지만 그 폭력은 파괴의 대상이 되는 인간을 응징하는 힘은 아니다. '구약성서' 에서 요나를 파괴하는 바다는 그가 여호와의 명을 거역한 것에 대한 응징으로 작동한다. 호머의 서사시에서 오디세우스의 재난은 그가 신의 의지를 거슬러 분노를 샀기 때문에 벌어진 일종의 징벌이었다. 이처럼 신화에 등장하는 파괴적인 바다는 응징하고 복수하는 도구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근대 이후에 쓰인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바다의 파괴적인 힘은 징계하거나 복수하는 수단이 아니다. 변덕스런 바다에 의해 파멸을 맞는 인간은 선한 사람일 수도 있고 악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들을 파괴하는 바다는 인간의 불행에 무감각한 냉정한 우주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노인은 바다를 이렇게 설명한다.

노인은 바다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라 마르’란 단어가 떠올랐다. 이 말은 사람들이 바다를 사랑할 때 부르는 스페인어이다.... 노인은 항상 바다를 여성으로 그리고 큰 은혜를 베풀어 주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만일 바다가 사나와지거나 나쁜 짓을 하더라도 그것은 바다로서는 어쩔 수 없는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산티아고 노인은 바다가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든지 사나와져서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든지 그것은 바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달이 여인에게 영향을 미치듯 어떤 우주적인 힘이 바다에 작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테스'의 작가 토마스 하디는 초호화 유람선인 타이타닉호가 1912년 4월 대서양 한 복판에서 빙하와 충돌하여 1,500명의 희생자를 냈을 때 ?쌍둥이의 조우?라는 시를 썼다.

 
『그들〔배와 빙산〕은 어울리지 않는 듯 했다. / 어떤 인간의 눈으로도 알 수 없었다. / 그들이 훗날 친밀한 결합을 맺을 역사를. 혹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에 의해 / 머지않아 한 엄청난 사건의 / 쌍둥이 반쪽이 될 운명의 징조를. 세월을 잣는 / 여신이 / “지금이다!”라고 한 말을 각자가 듣고서 / 둘의 결혼이 이루어져 동서반구를 깜짝 놀라게 할 때까지.』

이 시에서 시인은 인간이 온갖 지혜와 기술, 그리고 사치를 동원하여 건조한 호화 유람선과 북극 어느 지점에서 형성되고 있었던 빙하를 쌍둥이로 부른다. 인간이 지혜를 다해 배를 건조하는 동안 우주의 또 다른 의지가 그 쌍둥이를 은밀히 만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들은 운명의 여신이 “바로 지금이다!”고 외치는 순간, 충돌한다. 인간 하나하나가 작은 우주라고 하는데, 1,500명이 물에 빠져 죽은 순간, 1,500개의 우주가 소멸되었지만 그들의 비극은 그 운명에 아랑곳하지 않는 냉혹하기만 한 우주적 의지―토마스 하디는 이를 “내재적 의지”라고 불렀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일 뿐이다.
 '바다로 달려간 사람들'에서 모리아는 막내아들의 죽음을 확인하는 순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리아: 모두 갔으니, 이제 바다는 나에게 뭔가 더 어쩌지 못할 거야.... 나는 이제 바다가 어찌하든 상관없지만 다른 여인들은 통곡하게 되겠지.... (노라가 건네준 성수를 마이클의 유품 위에 뿌리면서) 내가 너를 위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기도드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바틀리. 내가 밤늦게까지 기도드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내가 뭐라고 했는지 너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푹 쉬어야겠고, 적당한 때가 되었구나.』

이 장면에서 모리아는 두 아들의 운명에 노심초사하다가 마침내 그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확인하고 이율배반적이게도 평안을 찾는 모습을 보인다. 이제는 자신이 더 이상 바다에 잃을 것이 없다며 마이클의 옷가지 위에 성수를 뿌리고 두 아들과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모리아의 이런 모습은 견인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파괴적인 바다, 그 운명의 횡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모리아는 이 결정적인 순간에 운명에 압도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통하여 작가는 인간을 파괴하는 바다는 인간의 과오를 응징하는 힘이 아니고 우주의 냉혹한, 혹은 무감각한 질서의 일부이며 인간의 몫은 자신의 운명을 수긍하면서 영혼의 품위를 영웅적으로 지켜나가는 일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