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호 교수의 맛으로 읽는 남도 인문학 - 3 장터 국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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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교수의 맛으로 읽는 남도 인문학 - 3 장터 국밥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9.07.04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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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로장 국밥 한 그릇의 무게
594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방시장 

도살하는 채식주의자 백정, 사대부의 나라를 조롱하였던 재인
조선불교의 몸부림을 온몸으로 이어받은 각설이들의 본향   
 
 국밥, 채식주의자 백정으로 인해 탄생한 서민음식 <br> <br>
 국밥, 채식주의자 백정으로 인해 탄생한 서민음식 
 

한 달에 한 번 일로장에서 장터국밥 한 그릇 말아먹는 것이 내게는 큰 기쁨이다. 
‘이 국밥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궁금한 적이 있었다. 국밥에 관한 조리법은 조선 말엽의 ‘규곤요람(閨?要覽)’에 나오지만 우리가 흔히 먹는 백성들의 국밥과는 다르다. 소와 돼지의 선지, 내장, 잡뼈 등 상품성이 떨어지거나 팔고 남은 주변고기로 끓여내므로 도살업에 종사하는 백정들의 음식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보았다. 

그런데 보성 대원사 현장스님은 “조선의 성리학은 불교를 말살시키고 자기모순에 빠뜨리기 위한 수단으로 살생업으로 살아가는 백정의 관리 감독을 승려들에게 맡겼다. 그런 인연으로 천민으로 멸시 당하던 백정들의 의식세계와 생활습관에도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살생을 하는 조선 백정들은 거의 불자가 되어 승려와 같이 육류, 주류, 오신채를 금하고 절제된 생활을 하였다. 백정들은 그들의 도살행위를 신성하게 여겼다.”라고 말한다. 백정은 도살하는 채식주의자이였다. 따라서 국밥은 국밥집 주모들이 백정들에게서 상품성이 떨어지거나 팔고 남은 주변고기를 받아 여러 가지 재료와 섞어 끓여 판 것으로 추정된다. 
백정은 한민족이 아니라 몽골 간섭기에 한반도에 정착했다가 명나라 건국 이후에도 돌아가지 않은 타타르(달단 ??)계 유랑민족이다. 소중화로서 수전농업 중심의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던 조선의 입장에서는 다문화에 대하여 관대했던 고려의 개방적 국가경영방식은 정리돼야 할 난제였다.  
조선은 노비, 기생, 광대, 상여꾼, 무당, 공장, 승려, 백정을 일컬어 8천이라 하고 천민계급으로 대하였다. 그런데 세종실록에서 비롯하여 성종실록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국가적 난제는 불교의 억압과 재인과 백정의 양민화이였다. 

 

대개 백정을 혹은 ‘화척(禾尺)’이라 하고 혹은 ‘재인(才人)’, 혹은 ‘달단(??)’이라 칭하여 그 종류가 하나가 아니니…백정(白丁)이라 칭하여 옛 이름[舊號]을 변경하고 군오(軍伍)에 소속하게 하여 사로(仕路)를 열어 주었으나…본시 우리 족속이 아니므로…
<세조실록 2년<1456> 3월 28일, 양성지의 상소>

조선정부는 불국정토를 꿈꾸는 불교세력이 8천세력과 연합했을 때의 파괴력을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조사에 따르면 갑오경장 이후에 신분제가 폐지되어 면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7,538호, 33,712명의 백정들이 수백 년 동안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하니 그 파괴력과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어찌되었던 조선정부는 1392년 건국이후 130여년이 지난 중종 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재인과 백정을 신분질서 안으로 편입시킨다.   
재인은 백정으로 분류되지만 원래 곡예, 가무, 음악 등에 종사하던 천민으로서 고려시대에는 광대(廣大)로 불렀다. 영화 ‘왕의 남자’에 등장하는 광대 공길의 본명은 공결이다. 광대 공결은 광해군과 사대부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풍자를 함으로써 곤장을 맞고 유배를 간다.  

왕이 지시하기를 “ … 또 배우들이 서울에 떼를 지어 모이면 몰래 물건을 훔쳐서 도둑이 되니 앞으로는 나례를 베풀지 말아 옛날 폐단을 고치도록 하라.”고 하였다. 
<연산군일기 11년, 1505년 12월 29일>

재인들도 백정과 마찬가지로 불교세력과 자연스레 결합한다. 사당패를 조직하여 불사(佛事)를 돕는다는 구실로 사찰(寺刹)에서 내준 부적(符籍)을 가지고 다니며 팔기도 하는데 그 수입의 일부를 사찰에 시주하였다. 주로 범어로 이루어진 불교음악 중 대중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우리말 사설에 민속음악에 붙여 만든 화청(和請)이 있는데 태징과 북을 반주로 엇모리장단에 맞추어 경서도창식(京西道昌式)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걸립패나 탁발승이 마을을 돌며 고사소리·고사덕담·고사반·비나리라고 하는 고사염불을 하였는데 이것이 각설이 타령의 뿌리로 추정되고 있다. 

광대는 전국의 장터와 잔치집을 돌아다니며 판소리, 꼭두각시놀음, 가면극, 줄타기, 땅재주, 풍물 등을 공연하였고, 나례 등의 행사를 할 때에는 공길처럼 궁궐에 불려갔다.…이렇게 떠돌아다니는 무리를 사당패라 하기도 하는데 남자와 여자가 함께 어울려 재주를 부렸다.
<이능화, 『조선해어화사』 동문선 445쪽>

시장을 찾은 어르신들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각설이들 <br><br>
시장을 찾은 어르신들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각설이들 
 

래를 지어 부르며(作樂?乞者) 구걸하는 자를 경외(京外)에서 엄히 금(禁)하여, 그것을 범한 자는 아울러 호수(戶首)를 죄 주고 또 3대(三代)를 범금(犯禁) 하지 않는 자는 다시 백정이라 칭하지 말고, 한가지로 편호(編戶) 하게 하면, 저들도 또한 스스로 이 농상(農桑)의 즐거움을 알게 되어 도적이 점점 그칠 것입니다.
<세조실록 3권, 세조 2년 3월 28일 양성지의 상소>

조선의 공명이라 일컬어지던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가 춘추 대사·오경·문묘 종사·과거·기인 등에 관한 세조에게 올린 상소의 일부분이다. 도대체 ‘서울과 지방에서 노래를 지어 부르며 구걸하는 자들’이 누구였을까? 또 다른 상소문에는 이들을 ‘동냥’하는 무리라 쓰고 있다. 동냥은 원래 불교용어 동령(動鈴)에서 나온 말로 사대부들이 ‘요령을 흔들고 다니며 탁발하는 스님들’을 구걸하는 거지로 폄훼한데서 기인한다. 
성종실록에는 한국 최초의 지방시장을 무안 남창장(일로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순조10년(1810년) 사대부들과 조선불교의 마지막 전쟁(?)이 무안군 몽탄면 총지사에서 있었던 것으로 보면 각설이의 시작이 어디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로장에서 구걸 중인 각설이
 

각설(覺說)이는 ‘깨달음을 설파는 사람’을 뜻한다. 각설이는 위선적인 사대부 세상의 위선을 폭로하고 탄압받던 조선불교를 되살리려는 치열한 몸부림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저항정신이 저잣거리에서 타령과 몸짓 그리고 사설로 세상부조리에 대한 불만과 시대의 아픔을 풍자한 각설이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일로장 인근 천사촌의 마지막 각설이 천자근씨(?~1973년)와 이를 연극적 형태로 발전시킨 일로 출신 김시라(1945~2001)선생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된다. 
일로장은 1일과 6일에 열린다. 가족과 함께 시장과 인근 로컬푸드 매장에서 장도보고 국밥 한 그릇 말아먹으며, 여덟 천민의 한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각설이들의 애환을 위로하는 것이 어떨까.
김대호 전문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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