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칼럼-김종수 목사]그 로고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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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칼럼-김종수 목사]그 로고스 때문에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2.06.09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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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 목포산돌교회 담임목사

[목포시민신문]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을 둔 어머니가 있었다. 이 어머니가 예수를 찾아와 자기 딸에게서 그 귀신을 내쫓아달라고 청한다. 신약성서 마가복음 7장 24절 이하의 이야기다. 우여곡절 끝에 이 딸에게서 귀신이 축출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딸을 예수에게 데려오지 않았는데 이 딸에게서 더러운 귀신이 나간 것이다. 귀신 들린 당사자인 이 어머니의 딸은 집에 있고, 이 장면에는 등장하지 않았는데 치유된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다. 마태복음 8장 5절 이하의 이야기인데 로마군대 장교인 백부장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고통이 심하였다. 그래서 그 백부장은 로마의 식민지인 이스라엘의 한 청년 예수를 찾아가 집에 있는 자기 하인을 고쳐 달라고 한다. 그래서 예수는 가서 고쳐주겠다고 한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오실 것 없다고 하면서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마 8:8)라고 명령만 하시라고 말한다. 예수는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면서 백부장의 믿음 대로 집에 있는 이 하인이 치유되었다고 하신다.

어떻게 당사자를 데려오지도 않았는데 집에 있는 당사자에게서 더러운 귀신이 나가고 중풍병이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인가? 오랫동안 교회는 이 이야기를 예수의 능력에 초점을 맞췄다. 예수는 메시아로서 원격치유의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기에 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믿겠다는 데에는 할 말이 없다. 그 속을 누가 알겠는가? 더욱이 이 딸과 하인은 예수님과 대면하지도, 대화하지도 않았다. 이들의 삶과 마음이 새로워졌거나, 이들의 믿음이 깊어져서 치유된 것도 아니다. 더러운 귀신이 나가고 중풍병이 치유된 것은 당사자인 이들과 전혀 관련이 없다.

딸에게서 더러운 귀신이 나간 이유로 예수는 이 어머니의 ‘말’을 언급하신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내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막 7:29) 그리고 하인의 중풍병이 치유된 이유로 백부장의 ‘믿음’을 꼽았는데(마 8:10, 13) 그 믿음은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는 그의 말에 근거한다. 딸의 어머니인 이 여인의 ‘말’, 하인의 주인인 백부장의 ‘말씀’이 그 원인이다. 그러니까 당사자인 딸과 하인과는 무관하게 딸의 어머니와 하인의 주인 때문에 이들이 낫게 된 것이다. 여기 ‘말’과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 말의 ‘정’(情)이나 ‘한’(恨)처럼 번역하기가 쉽지 않은 헬라어다. ‘근본’, ‘깨달음’을 담고 있는 단어 ‘로고스’다. 이 어머니와 주인의 로고스 때문에 더러운 귀신이 나가고 중풍병이 치유된 것이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창조를 말씀의 창조임을 말하면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다”(요 1:1)고 말한다. 여기서 ‘말씀’도 ‘로고스’다. 어느 한문 성경은 이것을 ‘太初有道’(태초유도)라고 했다. 즉 로고스를 ‘도’(道, 길)이라고 번역했는데 이 말이 원뜻에 가장 가깝지 않나 싶다.

그렇다면 여인의 로고스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백부장의 로고스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서는 여인의 이야기에만 집중해보자. 이 여인은 이방 여자다.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막 7:26)이라고 했다. ‘헬라인’이라는 말은 당시 사회로 보면 상류층에 속했다는 말이고, ‘수로보니게 족속’이라는 말은 옛 시리아 제국의 페니키아인 후예라는 말인데 보통 집안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여인의 딸이 귀신 들린 것이다.

그것도 그냥 귀신이 아니라 ‘더러운’ 귀신이다. 귀신이라는 말 때문에 우리는 이 ‘더러운’이라는 말을 미친 사람의 상태 혹은 신접한 빙의(憑依) 현상이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귀신’은 헬라어로 ‘프뉴마’인데 ‘귀신’이라는 뜻도 있지만 ‘영’, ‘마음’을 의미한다. 이 사건 직전, 성서는 ‘더러운’ 것에 대한 예수의 말씀을 전한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막 7:18) 하시고 이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0) 하시면서 사람 마음에서 나오는 더러운 것을 열거하신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간의 더러운 심성과 악한 행위를 말한 것이다. 일그러진 사람됨과 삶을 말한 것이다. 이것이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의 현실이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그 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전부 어머니에 대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문제의 당사자인 이 딸은 등장도 안 한다. 이 딸의 어머니는 이방 여자지만 부유하고 지체 높은 가문의 여인이다. 이 여인이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더러운 마음(영)에 사로잡혀 헤매는 딸을 바로 잡아달라는 간청을 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평소의 예수의 태도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신다. 적어도 귀신을 쫓아내려면 그 딸이 있는 집으로 가는 게 순서이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 평상시의 예수님이라면 그랬을 터인데 이 장면에서 우리의 예상을 빗나간다.

예수는 딸의 상태는 묻지도 않는다. 그 어머니만 상대한다. 그런데 평소의 예수 같지 않다. 이 이방 여인, 지체 높은 여인을 개 취급한다. 예수는 그녀에게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 7:27)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자녀는 예수의 동족 유대인을 말한다. 원래 유대 율법은 이방인과의 상종을 금지한다. 이방인 자체가 더러운 것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예수님마저 여기서는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뭔가 이 여인을 시험을 하시는 것 같다. 이 여인에게서 뭔가를 확인하고 싶은 예수의 태도다.

여기 ‘개’는 헬라어로 ‘쿠나리온’인데 개를 뜻하는 ‘퀴온’의 지소사로 강아지, 쉽게 말하면 ‘개xx’이다. 헬라 상류층 페니키아 여인의 자긍심을 뭉개 버린 욕설이다. 그런데 이 여인의 반응 역시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 예수가 준 모욕적 언사에 그녀는 말한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 7:28) 기가 막힌다. 여기 떡 부스러기는 사실상 가르침을 상징한다. 그 가르침을 얻기 위해 자신의 높은 신분, 가문이 주는 자존심 등을 버린 것이다. 그녀는 왜 이 자존심을 버리고 자기와는 전혀 다른 식민지 이스라엘, 그것도 상놈 취급을 받는 갈릴리, 그것도 찢어지게 가난한 흙수저의 불온한 나사렛 출신 예수에게 가 엎드려 그 모욕을 받고 있는가? 금수저가 흙수저에게 가르침을 절실히 구하고 있는 모양새다. 답은 여기에 있다. 이것이 그녀가 깨우친 로고스다. 여인은 귀신들린 딸을 구하기 위해서 여인은 상류층의 문벌 좋은 기득권을 예수 앞에서 여지없이 내동댕이친 것이다. 떡 부스러기 같은 작은 가르침이라도 딸을 위해서는 절실하게 받아들인다. 그 부스러기 떡에 딸을 위한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나를 개xx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우리 딸에게서 그 귀신이 나갈 수만 있다면 어떤 가르침도 받겠나이다”라는 그녀의 로고스다. 그 로고스, 그녀의 깨우침 때문에 예수는 그 여인에게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막 7:29)고 말씀하신다.

도대체 이 딸은 무슨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혀 있는가? 성서는 이 딸에 대해 더러운 귀신 들린 것 외에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로고스를 아는 사람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안다. 이 딸의 치유는 이 어머니에게 달려있었다. 혹 우리 식대로 말하자면 이 딸은 엄마 찬스라는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혀 있던 것은 아닐까? 여인은 엄마 찬스를 쓸만한 기득권을 내려 놓았다. 이 어머니가 제 정신이 되어야 이 딸이 바로 서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오늘 우리 자식들의 미래는 오늘 부모인 우리에게 달려 있다. 오늘 경쟁 귀신 들린 우리 아이들이다. 불평등 양극화라는 귀신 들린 우리 젊은이들이다. 오늘 사교육 귀신들린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오늘 스펙 귀신들린 금수저 자녀들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막아야 할 금수저 부모들이 오히려 자식을 위한답시고 더 부추긴다. 아빠 찬스, 엄마 찬스는 기득권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러나 자식을 더럽게 만드는 기득권이다.

그 자식을 이렇게 만든 것이 누구인가? 예수는 그 원인을 당사자인 딸에게서 보지 않고 그 어머니에게서 본 것이다. 그 딸을 둔 여야의 법무부 장관에게서 본 것이다. 그들은 금수저의 기득권으로 자식을 경쟁의 승리와 지배라는 귀신에 사로잡히게 했다. 상류층 헬라 여자, 혈통으로도 문벌 좋은 페니키아인이기에 갖고 있는 금수저 기득권이 그녀의 딸을 더럽게 만든 것이다. 그 기득권을 내려 놓지 않으면 경쟁귀신, 스펙귀신은 딸을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부모 잘 만난 것도 실력이라고 말할 것이다. 세상에 이런 더러운 귀신이 어디 있겠는가?

기득권, 그것이 재력이건 권력이건 선악과처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게도 하다”(창 3:6) ‘선악과’는 모든 것을 선과 악, 좋고 나쁨, 높음과 낮음, 많음과 적음으로 나누어 보는 인간의 지혜, 분별지(分別智)다. 인간은 이렇게 갈라놓고 좋고 많고 높은 것을 선택한다. 선택은 욕망이다. 하와는 남편 아담에게 까지 주었고 남편은 뭔지 물어보지도 않고 좋은 것이려니 하고 받아 먹었다. 거기 자식이 있었더라면 당연히 주고 먹였을 것이다. 그 기득권으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자식에게 해주었을 것이다. 고액 과외도 시키고 일류대학도 보내고, 그럴싸한 스펙도 쌓게 하고, 이상한 학술지에 논문도 내게 하는 등 이름을 날리는 온갖 것들을 해주었을 것이다. 나라도 그런 기득권을 가졌다면 그 유혹을 떨쳐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수로보니게 이방 여인은 떨쳐냈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다. 욕망의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히게 하지 않게 위해서다. 사람다운 사람의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다. 그녀에게는 이것이 절실한 로고스였다.

이 기득권을 잘라내지 않고서는 이 나라는 경쟁, 불평등, 불공평, 양극화라는 더러운 귀신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기둑권을 내려 놓을 부스러기 가르침이라도 준다면 그것이 교육이다. 그래야 우리의 아들 딸이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 된다.

정신도 얼도 내팽개치고 資(자)가 本(본)이 되는 자본주의 귀신 들린 이 나라다. 사교육에 미친, 더러운 귀신 들린 나라도 우리 나라다. 교육에 교육의 논리가 없고 시장의 논리, 자본의 논리만 가득하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서 무엇이 되겠는가? 기득권을 쥐기 위해 혈안이 되지 않겠는가?

기후 변화로 선한 연대를 해도 모자랄 판에 군대 귀신에 사로 잡혀 더 큰 군대 귀신과 동맹하며 전쟁 연습하는 이 나라다. 여전히 기득권이 힘의 메시아로 나부낀다. 기득권을 내려 놓아야하는 절실한 로고스가 없는 우리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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