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목포를 사랑한 사람들 7인의 이야기Ⅰ-이남규 목사②]신앙수호와 항일을 위한 목숨을 건 치열한 목회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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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목포를 사랑한 사람들 7인의 이야기Ⅰ-이남규 목사②]신앙수호와 항일을 위한 목숨을 건 치열한 목회의 길을 걸었다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2.06.10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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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자 신앙적 동지인 박연세 목사와 함께
“교회는 사회계몽과 변혁을 이끌어야 한다” 일관된 주장
탁월한 지도력 양동교회 질‧양적 성장 후 전남노회 재건

[목포시민신문] 그러나 이남규에게 평양신학교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도록 강력하게 권유한 사람들이 있었다. 고향의 복길교회의 당회장인 W선교사와 동역자인 K와 J장로 등이 강력한 권유자들이 었다. 이남규는 자신이 세운 교회의 지도자들의 권유를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타의에 의해서 내키지 않는 신학공부를 위해 늦은 나이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졸업경위를 살펴보자.

이남규가 12년 이라는 졸업연한의 네 배의 세월을 거쳐 졸업하게 된 저간의 사정은 다 알 수 없지만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타의에 의해 시작한 신학과 목사가 되기 위한 공부가 전혀 의욕이 나지 않았다.

또 하나는 평양신학교를 일제의 감시를 벗어 날수 있는 피난처로 생각하였다. 일제의 감시가 두려웠던 이남규로서는 공부를 앞세우고 신학교에 깊숙이 몸을 숨겨 두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정들이 이남규를 12년 동안 신학교에 남게 하였다. 아무튼 이남규는 생각지 못한 신학교 입학에 예기치 않던 12년만의 신학교 졸업이라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었다.

기독교인이 되다.

이남규는 유교적인 집안에서 성장했고 한문을 전공했다. 유교사상에 젖어 왔기 때문에 기독교에 반대해 왔다. 그러한 이남규가 어떻게 예수를 영접하고 기독교인이 되었을까?

이남규의 회고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일제에 빼앗겼던 주권을 다시 찾겠다는 저항심이 나로 하여금 기독교인이 되게 했다고 말할 수 있다.(온 세상 위하여, p.105 한국기독교장로회 춘곡 이남규 목사 저서 출간위원회) 이남규가 이러한 애국심을 갖게 된 배경에는 광주숭일학교에서 싹텄던 애국심과 신앙심의 씨앗이 항상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다, 내가 예수를 믿기로 결정한 것은 신앙을 위해서라기보다 출세를 하자면 기독교회에 나가야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까운 곳으로 찾아 간 교회가 “기독교 대한감리회 종교교회(기독교대한감리회 종교교회 -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8길 48, 1900년 4월 15일 창립.)다. 당시 담임은 양주삼목사였다. 품위가 있었고 설교에서 얻은 감화도 컸다. 여기서 믿음의 싹이 텄다.

그 후 양주삼목사의 지도에 따라 세례까지 받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기독교인이 된 내력이다.” 이남규가 기독교인이 된 해가 언제인지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양주삼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회고에 의한다면 1920년에 기독교인이 된 걸로 추정된다. 양주삼목사는 1919년 9월부터 2년간 종교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였기 때문이다.

목회자 이남규

-일제강점기 시절의 목회 - 연동교회 초대목사

 

『1)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 어둡던 이땅이 밝아오네 /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니 / 시온의 영광이 비쳐오네

2)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 매였던 종들이 돌아오네 / 오래전 선지자 꿈꾸던 복을 / 만민이 다같이 누리겠네

3)보아라 광야에 화초가 피고 / 말랐던 시냇물 흘러오네 / 이산과 저산이 마주쳐 울려 / 주예수 은총을 찬송하네

4)땅들아 바다야 많은 섬들아 / 찬양을 주님께 드리어라 / 싸움과 죄악이 가득한 땅에 / 찬송이 하늘에 사무치네 아멘,』찬송가 550

 

목회자 이남규는 “교회는 사회계몽과 변혁을 이끌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혁파되어야한다”고 주장한 구약시대의 선지자 아모스와 맥을 같이 한다고나할까? 그러나 이러한 이남규의 신학적 대전제는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이라는 시대 상황으로 인해 잠시 뒷전으로 밀려난다. 따라서 이남규의 목회활동은 일제강점기하의 목회와 광복 이후의 목회가 서로 다른 형태로 나누어지게 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이남규의 일제강점기 시대의 목회 주목표는 “신앙수호와 항일”이였다. 이남규가 이러한 목표를 갖게 된 배경에는 스승이자 동지였던 양동교회 박연세목사의 영향이 컸다. 이남규의 목회의 주목표의 하나인 “항일”의 실천은 1938년 연동교회 초대 목사로 취임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남규는 1944년 2월, 박연세목사가 순교하기 전까지 “항일”을 통한 “신앙적 행보”를 같이한다. 두 사람의 투쟁 실천 방침은 “신사참배거부”와 “일본장로교”와의 통합반대였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 결과는 두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가혹한 것이었다. 박연세목사는 후일에 “순교자”라는 면류관을 쓰게 되나 대구 형무소에서 동사라는 야만적인 악행을 겪으면서 소중한목숨을 잃게 된다. 이남규는 1941년 일제에 의해 목사직에서 해임을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그리고 목포경찰서에 투옥되어 2년여의 옥고를 치르는 등 갖은 핍박과 고초를 겪게 된다.(『목포개항백년사』, p.330) 이남규의 연동교회 목사 재임기간은 불과 4년 남짓했지만. 이 시기는 일제의 탄압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이남규는 스승이자 신앙적 동지인 박연세목사와 함께 신앙수호와 항일을 위한 목숨을 건 치열한 목회의 길을 걸었다.

 

- 광복 이후의 목회(양동교회 제13대 담임목사)

 

『오직 너희는 먼저 그 분의 나라와 그 분의 의를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또한 너희에게 더하여질 것이다.』 -마태복은 6장 33절-

광복 이후의 이남규의 목회는 1945년 8월 25일, 양동교회 제13대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 당시의 이남규의 목회는 한마디로 목회와 정치의 병행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남규가 목회와 정치를 병행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사회계몽과 변혁”을 이끌어야 한다는 평소의 그의 목회철학에 따른 것이다. 우선, 이남규의 목회활동부터 들여다보자. 이남규의 목회는 우선 일제에 의해 훼손된 “교회의 재건”과 “노회 활동”을 주목표로 삼았으며, 또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였다.(『목포새한교회 120년사』, p.232) 이남규가 일제하에서 침체되었던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쏟기 시작하자 많은 교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특히, 박연세목사를 고발해 순교하게 한 사람과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교회에 나오지 않은 채 가정에서 은밀히 예배를 드리던 성도들까지 교회로 차츰 돌아왔다. 이남규는 놀라운 지도력을 발휘해 교회를 안정화시켜가면서 상처 입은 교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영혼을 감싸주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지도력으로 교회를 성장시켜 나간다. 그가 취한 대표적인 조치는 첫째, 적재적소에 인력을 배치 시키는 일, 둘째, 일꾼들을 당회에서 선출토록하고, 셋째, 안수집사제도의 도입등이었다. 이남규의 탁월한 지도력의 결과로 양동교회는 질적, 양적 성장을 거듭했다. 1년에 봄과 가을 두 차례에 나눠 학습과 세례 문답을 실시할 만큼 부흥되었다. 이남규의 이러한 새로운 리더쉽은 양동교회에 그치지 않고 전남노회재건과 총회 재건에도 발휘되었다. 한편으로는 “독립촉성회”를 조직하고 여러 애국청년들의 뜻에 따라 회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들과 더불어 해방공간의 무질서한 목포의 치안 질서 등을 잡는데 힘을 쓰기도 한다.

 

-전남노회 재건과 목포노회 분립

 

탁월한 지도력으로 양동교회를 질적, 양적으로 성장시킨 이남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제에 의해 붕괴된 전남노회를 재건키로 결심한다. 이남규의 주도로 일제에 의해 훼손된 전남노회는 1945년 11월 7일, 광주금정교회에서 열리게 되었다. 재건된 노회에서는 노회장에 김창국목사, 부노회장에 이남규목사, 서기에 성갑식목사, 부서기에 김병두목사, 회계에 선한권장로, 부회계에 서영범장로등이 지도부로 선출되어 전남노회의 새로운 틀이 재건되었다.(목포양동교회 100년사, (1897~1997) p.85) 전남노회가 재건되고 2년여의 세월이 지나자 전남의 교세가 크게 신장되었다. 특히 목포를 중심으로한 서부지역의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에 목포지역의 일부교역자들이 더 큰 발전을 위해서는 전남노회와 목포노회를 분립하자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새로운 목포노회분립은 많은 어려움과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분립의견이 받아 들어져 1947년 4월에 열린 제33회 전국총회에서 전남노회로부터 목포노회를 분립키로 한다는 안이 가결되었다 총회의 결의에 의해 분립을 위한 새로운 목포노회는 이남규를 중심으로 5월 13일부터 17일까지 4일동안 목포양동교회에서 열렸다. 분립된 새로운 목포노회에서는 노회장에 이남규목사, 부노회장에 소집책임자였던 배영석목사(배영석(강진읍교회목사 1950년 순교. 전 목포대교수 배성완의 부))가 선출되었다. 이로써 전남서부지역을 관활 하는 목포노회가 탄생되었다. 목포노회 초대회장직을 맡게 된 이남규는 이후로도 4번이나 전남노회장직을 맡게 된다. 이남규의 헌신적인 목회활동은 1952년 5월 양동교회 제16때 담임목사로 재청빙 되면서 계속된다.

 

-재청빙과 제16대 담임목사(양동교회)

 

이남규가 양동교회 제16대 담임목사로 재청빙 된 사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양동교회가 정식 당회장이 없이 임시 당회장(송암석목사)체제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제헌의원과 초대 전남지사직의 수행을 위해 교회를 떠났던 이남규가 1950년 5월30일에 실시된 제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 서울과 목포를 오르내리며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지냈기 때문이다. 1952년 5월, 첫 주일 예배에서 설교를 시작함으로서 이남규의 두 번째 양동교회 목회가 시작된다. 그가 부임하자 “교회는 더욱 활성화되었고, 세례 및 학습자들이 대폭 증가했다. 그는 또한 교회 일꾼들을 세웠다. 그가 다시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 양동교회 장로3인을 청원하게 되었다.”(『목포노회 제6회 정기노회 회의록(1952.05.13.~16.)』 中 목포노회 회의록, p.173) 이남규는 5월 25일 주일, 정기 당회에서 목회에 대한 세부계획을 발표한다. 세부계획안에는 눈길을 끄는 3가지의 주목할 만한 내용이 있다. 첫째, 당회의 고유권한인 재정문제, 전도문제, 심방문제, 집회문제 등을 각 기관에서 책임제로 관장할 수 있도록 대폭 이양한다. 둘째, 교회의 종을 이용해 교인들의 애경사를 적극적으로 관리하도록 한다. 교인중에 상을 당했을 경우는 종을 두 번 치고 쉬었다가, 경사스러운 일을 알릴 때에는 네 번 종을 치고 다시 쉬었다가, 연속으로 네 번 종을 치기로 한 것이다. 섯째, 장로와 집사들로 당번제를 실시해서 매월 1개월씩 돌아가며 교회 봉사 위원으로 활동하는 것이다.(목포양동교회 100년사, p.92) 이남규의 이러한 치밀한 목회 행정력과 진보적인 당회운영, 그리고 새신자 육성은 교회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진보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이남규의 목회가 꼭 밝은 면만 있었던 것 아니다. 1954년 “기장측 분열”이라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면서 그의 목회는 크게 흔들린다. 그러나 이 분열로 인해, 이남규는 분열된 제 43회 기장측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되는 중책을 맡게 된다. 그렇지만 이 분열에서 이남규는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 후유증으로 목포노회는 반분되었으며, 교단 소속의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가 분리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광복 이후의 이남규의 목회는 목포양동교회, 노회와 총회 활동, 그리고 시대적 상황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재헌의원, 도지사 등 일반인들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괄목할만한 정치경력을 지녔음에도 교회 내에서 목사로서 독재를 휘두른 적이 없는 탈권위주의적인 목회활동의 모습을 보인 점은 참 목자로서 높이 평가받을만하다.

/다음 호에 계속

글/배종덕 위원장

 

-약력

목포 중.고등학교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 MBC PD / ㈜에스콤 대표이사 / 통일민주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목포시지구당위원장 / 한나라당 인재영입위원회 부위원장 / 지역주의타파 범국민실천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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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2022-06-14 12:01:21
高一때
陽洞교회에 친구의 소개로 다니기 시작했다.
新 문명과 세상에 눈(萌)을 뜨기 시작한 시기였는데
우리 담임 목사가 나중에야 그렇게 유명한 인물임을 알았다. 고2때 그러니까
1960(庚子)년 7.29 선거때 참의원 선거에 출마 하신다고 학생예배가 있는 오후에 본당에 찬양대원을 모아놓고 다과를 준비 하시면서 출마의 辯을 하셨는데 그때야 비로소 더욱 똑똑한 인물이라고 확신 했는데 4등으로 당선 되셨던 기억이다.
1位는 寶城의 "황성수"였다.
그해 12월26일날 道知事 선거가 있었는데 해남출신 "閔永南"이 당선된것을 기억한 高2 학생때의 歷史였다.
그때 목포 民議院은"남진"의 아버지
金文玉氏가 당선 되셨다.
영원할줄 알았던 "정중섭"이가 6,000
餘票 차이로 떨어졌다.
우리 똑똑한 후배 "배종덕"이가 목포 인물열전을 출간 한다니 참으로 대단한 일을 하는구나 하는 응원의 갈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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