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2월 미군정 정권 인도 위한 입법기관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출
이승만 단독정부 제헌의원 당선…5개월 후 전남지사 임명 의정할동 마감
본지는 지역주의타파범국민실천위원회 배종덕 위원장이 집필한 ‘목포 7인의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을 기반으로 ‘7인의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란 주제로 연재한다. 이번 연재는 배 위원장이 출간한 책에서 저자가 직접 작성한 글로서 6월 1일 발행되는 신문부터 독자를 찾아간다. 총 30회에 걸쳐 보도될 이번 연재는 일곱 분의 인사 중 첫 번째 순서로 종교 정치분야로 이남규 목사 편이 총 4~5회에 보도된다. 두 번째는 행정분야의 하동현 전) 목포시장, 사회‧복지분야 윤학자 여사, 산업‧경제분야 임광행 회장, 문화‧예술분야 차재석 전)목포예총지부장, 사회‧봉사분야 박길수 씨, 사회‧봉사분야 김환 전 백년회 이사장 순으로 보도될 예정이다.<편집자 주>
■7인의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Ⅰ-이남규 목사③
정치인 이남규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장 24절 -
이남규의 정치활동은 두 가지의 특징을 갖고 있다. 하나는 활동기간이 해방공간과 정부수립 전후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활동기간에 비해 맡았던 직책은 굉장히 비중 있는 자리였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활동을 연대순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건국준비위원회 목포지부 위원장(1945년 8월 17일), 2)독립촉성국민회 목포지부장(1946년 4월 15일), 3)남조선과도입법의원(1946년 12월 12일), 4)대한노총 목포지구연맹조직 준비위원장(1947년 12월 17일), 5)제헌국회의원(1948년 5월 10일 ~ 10월 19일), 6)초대전남지사(1948년 10월 18일 ~ 1950년 4월 30일), 7)제5대 국회의원(참의원)(1960년 7월 29일 ~ 1961년 5월 16일), 이상이 이남규가 정치활동을 통해 맡았던 자리다. 이중에서 주목해야할 활동은 1)건준위원장, 2)독립촉성국민회 지부장, 3)남조선과도 입법의원, 4)제헌 국회의원, 5)초대전남지사, 6)참의원(제5대 국회의원)
건준위원장 시절
목포의 건준은 45년 8월 17일을 전후해서 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남규가 건준에 참여하게 된 경위는 목포 개항백년사의 “해방과 목포건준”이 잘 설명하고 있다.
“해방이후 건준(인민위원회)의 주축이 된 인물들은 기독교 계통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반일적인 태도를 끝까지 견지한 이남규(당시 45세)와 1930년대 이후 등장한 신진사회주의자들로서 친일의 길에 들어가지 않은 자들이었다.”(『목포개항100년사』, p.331)
이상의 설명에 따른다면, 일제강점기 내내 항일을 목회의 목표로 삼았던 이남규가 건준의 중심에 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남규의 건준 활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건준이 좌익세력들에 의해 장악되고 인민위원회로 변질이 되는등, 특히 미군정과 갈등을 보이자 곧바로 결별한다. 이남규가 탈퇴한 건준은 이후 9월 중순경 인민위원회로 개편이 되고 부위원장 국순홍을 위원장으로 추대한다.
독립촉성 국민회 지부장 시절
건준과 결별한 이남규는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양립할 수 없다는 평소의 지론에 따라 반공, 박탁을 가치로 내세운 독립촉성 국민회에 참여한다. 독립촉성 국민회에는 일제치하에서 항일 운동을 함께 하였던 개신교 목회자들이 다수 참여하게 되어 이남규는 든든한 우군을 많이 갖게 된다. 이때 참여한 개신교 목회자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①평양 남산현 교회 담임목사였던 이윤영(이윤영(1890~1975). 재헌의원. 독립촉성 국민회 부위원장.), ②전주서문교회 담임목사 배은희(배은희(1888~1966). 독립촉성 국민회 의장. 제 2대 국회의원.), ③청주 제일교회 담임목사 구연직(구연직(1891~1967). 독립촉성 국민회 충북지부장. 세광 중고교 설립자.), ④제주 모슬포교회 담임목사 조남수(조남수(1914~1997). 광복 당시 제주도 유일 목사. “4.3진상”저자.) 등이다. 이밖에 이남규를 비롯한 10여명의 개신교 목회자들이 이 대열에 동참한다. 반공과 반탁을 가치로 내세운 이남규는 1946년 4월 15일 목포극장에서 개최된 목포지부 결성식에서 지부장으로 선출된다. 집회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목포상업학교의 일부 좌익 학생들의 습격으로 큰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였지만, 결성식은 무난히 끝났다. 독립촉성회 목포지부장에 취임한 이남규는 소속 젊은 청년동지들과 함께 치안유지와 좌익척결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이 당시 특기할 만한 일은 공생원(고아들을 양육하는 복지시설)을 운영하던 윤치호의 도움을 받은 일이다. 독립촉성 국민회 지부장 활동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남규는 1946년 12월 미군정이 정권을 인도하기 위해 설립하였던 입법기관인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의원으로 선출된다.
입법의원시절
미군정기에 존재하였던 입법의원의 공식명칭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다. 이남규는 1946년 10월 21일부터 31일에 걸쳐 실시한 민선의원(간접)선거에서 목포시 대표로 선출된다. 여기서 잠시 입법의원의 성격과 역할에 대해 알아 보자. 이남규의 진술이다. “입법의원은 대내외적으로 한국민족을 대표한 공적인 기구요, 군정을 민정으로 대체하여 독립정부수립을 밑받침해 주는 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구성은 관선의원(45명)과 민선의원(45명)으로 구별하여 관선의원은 미군정이 직능대표와 같이 종교계, 학계, 실업계 인사 중에서 임명하고, 민선의원은 문자 그대로 미국의 간접선거와 같이 각 시.군에서 투표할 자를 선거하고 그 투표자들이 도에 모여서 선거 단을 조직한 후 비밀투표로서 선출했다.”(온 세상 위하여, p.197 한국기독교장로회 춘곡 이남규 목사 저서 출간위원회)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남규는 민선으로 선출된 45명중의 한명으로 입법의원이 되었다. 입법의원으로서 이남규의 활약상으로 두 가지 사건은 기억할 만하다. 첫 사건은 이남규가 의원전원 중에 첫 발언을 한 사건이다. 첫 발언은 미군정장관 하지의 “개원정족수에 대한 개원법 개정”선포의 부당성을 지적한 발언 사건이다. 두 번째 사건은 유엔에 보낼 “신탁통치 반대와 민주독립정부 수립을 위한 대유엔 결의안을 통과시킨 사건이다. 이남규가 좌익세력의 극심한 반대를 극복하고 대 유엔결의안을 통과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점은 높이 평가 받아야 할 사건이었다. 이남규는 이 사건을 한국독립정부의 수립을 위한 터전을 마련하였다고 자평하였다.( 온 세상 위하여, p.202 한국기독교장로회 춘곡 이남규 목사 저서 출간위원회) 이남규가 맹활약한 과도입법의원은 미군정 주도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한계는 있었지만 한국근대사상 최초의 대의정치기관이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제헌국회의원 시절
독립촉성 국민회 지부장을 거쳐 입법의원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남규에게 대망의 48년이 도래하였다. 1948년이 시작되자 5월 10일로 예정된 제헌국회의원선거가 남한만의 단독으로 준비되고 있었다. 공산주의 척결을 위해서는 조속한 정부 수립이 우선이라고 생각한 이남규는 5월 10일에 치러지는 제헌국회의원선거에 나가기로 결심한다. 당시 목포에서는 좌익측의 “5.10 선거저지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5.10 선거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이때의 상황을 목포개항 100년사의 “목포의 5.10 선거”편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3월 30일부터 유권자 등록이 시작되었는데, 목포부내 유권자는 약 4만여명에 달하였다. 4월 16일 입후보자 등록이 마감되었는데, 등록하는 사람은 정영소, 이남규, 천동환, 김유기, 강선명, 김동신 등 6명이었다.”(『목포개항100년사』 中 “목포의 5.10 선거”, p.339) 선거결과 독립촉성 국민회로 출마한 이남규가 10,361표를 얻어 5명의 입후보자 중에서도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다. 총투표수 35,243(무효 1,324, 기권 419)표 중에서 30.5%를 획득한다. 이남규가 신생대한민국의 헌법을 제정하고 초대대통령을 선출하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른 것이다. 여기서 잠시 이남규의 정치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입후보 당시의 이남규의 정견에 대해 살펴보자. 모두 6개항의 정견을 내놓았다. ①국민정부 수립후의 조속한 남북통일 ②국방충실로서 자주권 확보와 선진외교정책 ③개인의 자주권 확보 ④균등교육과 최대한의 의무교육 실시 ⑤경제균등을 원칙으로 하는 특수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관리 ⑥일제 잔재인 통제경제 배제와 자유경제 체제에 의한 근로 대중의 복리증진(『목포개항100년사』 中 “목포의 5.10 선거”, p.339) 등이다.
반공, 자유경제, 그리고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정견이라는 느낌이다. 이남규의 이러한 정견의 배경은 보수주의자이면서도 동시에 진보주의자 면모를 갖추고 있는 이남규의 목회철학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남규는 이러한 정견을 제대로 펼치질 못하고 의정생활 5개월만인 48년 10월 19일 의원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새로 수립된 이승만 정부가 이남규를 초대 전남지사로 임명하였기 때문이다. 이남규의 의정활동 기간은 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이남규의 제헌 의회진출은 그냥 간과할 수 없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첫째, 일본사람들이 판을 치고, 일본색이 강한 목포에서 일제에 의해 핍박받고 고난을 당한 대표적 항일인사인 이남규가 신생대한민국의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것은 이남규 개인의 영광을 떠나 목포시민의 자존심을 크게 높인 쾌거이자 오래 기억될 만한 일이다. 당시 이남규가 득표했던 30.5%의 득표율이 시민들의 여망이 어떠했는지 그대로 보여준 결과다.
둘째, 이남규는 선거운동 기간 동안이나, 당선된 이후에도 좌익세력의 극심한 테러위험을 견디어 냈다.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 목포사회를 발칵 뒤집은 남교동 공설시장 모퉁이에서의 권총암살미수사건, 양동의 속칭 미국병원에서의 암살 미수사건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으면 이남규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좌익의 테러위험 속에서 이남규는 자연스럽게 목포사회의 우익세력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셋째, 이남규는 비록 5개월이라는 짧은 의정생활이었지만 제헌의회의 법사위원으로써 헌법제정에 참여한 일과 단군신전 건립제안을 저지시킨 괄목할 만한 활동을 하였다. 헌법제정에 참여한 이남규의 소회다. “국가의 기초가 될 헌법을 제정하는데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 무척 기뻤다. 그리고 자신이 제정한 그 헌법에 따라 국가원수인 대통령을 선출하고, 세계만방에 우리나라가 민주공화국으로서 독립했다고 선포할 때 맛보았던 그 기쁨은 무어라고 표현 할 수 없었다. 다만, 감사, 감격할 뿐 이었다.”(온 세상 위하여, p.204 한국기독교장로회 춘곡 이남규 목사 저서 출간위원회) 단군신전 건립제안 저지에 대한 이남규의 회고다. “한 의원이 국민정신을 앙양하는 방법으로 일제의 신사참배와 같이 단군신전을 건립하고 국민들로 하여금 참배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 건의안은 이미 법에 의해 상당수 의원의 서명날인을 받고 정식으로 본회의에 상정할 단계에 이르렀다. 그것을 결의안에 올리게 되면 비기독교인 의원은 누구나 그 안에 찬성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일반 국민들도 해방과 독립의 환희에 사로잡혀 애국이라는 말만 나오면 아무런 비판도 없이 맹종했기 때문에 그 건의안은 무사히 통과 될 가능성이 높았다. 때문에 나는 그 건의안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기독교출신 의원들과 함께 그 안에 서명날인한 의원들을 찾아 그것을 취소하도록 권유하였다. 따라서 그 건의서 안은 법정인원부족으로 취하되고 말았다.”(온 세상 위하여, p.204 한국기독교장로회 춘곡 이남규 목사 저서 출간위원회) 제헌의원으로서 신생대한민국의 헌법을 제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초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영광스러운 소임을 마친 목포시 최초의 국회의원 이남규는 신생대한민국의 초대전남지사라는 새로운 길을 가게 된다.
/다음 호에 계속
-약력
목포 중.고등학교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 MBC PD / ㈜제일기획(삼성그룹) 기획국장 / ㈜에스콤 대표이사 / 통일민주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목포시지구당위원장 / 한나라당 인재영입위원회 부위원장 / 지역주의타파 범국민실천위원장/저서 '나는 일하고 싶다', 매향노라 불리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