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목포를 사랑한 사람들 7인의 이야기Ⅱ-하동현①]부정 부패의 경찰 출신 시장이 불러낸 청백리 하동현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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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목포를 사랑한 사람들 7인의 이야기Ⅱ-하동현①]부정 부패의 경찰 출신 시장이 불러낸 청백리 하동현 시장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2.07.07 15:10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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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행정 입문 1946년 재무과장 1950년 목포부시장 임명
5대(관선), 7대(민선간선), 8대(민선직선) 역임 7년 4개월 재임
20여년 걸친 풍부한 행정경험 청렴성, 불편부당한 처신 장점

본지는 지역주의타파범국민실천위원회 배종덕 위원장이 집필한 목포 7인의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을 기반으로 ‘7인의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란 주제로 연재한다. 이번 연재는 배 위원장이 출간한 책에서 저자가 직접 작성한 글로서 61일 발행되는 신문부터 독자를 찾아간다. 30회에 걸쳐 보도될 이번 연재는 일곱 분의 인사 중 첫 번째 순서로 종교 정치분야로 이남규 목사 편이 총 4~5회에 보도된다. 두 번째는 행정분야의 하동현 전) 목포시장, 사회복지분야 윤학자 여사, 산업경제분야 임광행 회장, 문화예술분야 차재석 전)목포예총지부장, 사회봉사분야 박길수 씨, 사회봉사분야 김환 전 백년회 이사장 순으로 보도될 예정이다.<편집자 주>

7인의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하동현 전 목포시장

하 동 현(1903 ~ 1969)

1957511일 오전, 목포중앙초등학교 전교생 아침 조회 시간에서 있었던 일이다. 교단에 올라선 이수동 교장선생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였다. 영산강 상수도 물을 왜 가까운 몽탄이나 명산에서 가져 오지 않고 멀리 나주에서 가져 오는 이유를 아는 학생 있으면 손들어 보라고 하였다.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몽탄이나 명산의 물은 바닷물이 들어와 강물과 섞이기 때문에 상수도용으로는 부적합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 정확한 답변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목포시는 어쩔 수 없이 160리나 떨어진 머나먼 나주로부터 상수도용 물을 가져 오기로 하였다. 1957511일 오전 11, 목포개항이래 최대의 토목공사 착공식이 시작되었다. 13만 목포시민들의 식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주 황룡강으로부터 송수해 오는 영산강 상수도 송수관 공사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러한 대역사의 중심에 전 목포시장 고 하동현이 있었다. 하동현의 활동을 증언이라도 하듯이 목포시 대의동 21~12, 7번지 목포근대역사관본관(구 일본영사관, 구 목포시청)앞 뜰에는 하동현시장 공적비가 서 있다. 비문의 내용이다. “전 시장 하동현 선생은 인의로 10년 시정을 펴고 장장 삼백리 영산강수를 이끌어 들이니 물이 넘치는 곳에 덕이 흐르고 만인이 어진이의 뜻을 노래하여 이 비를 세우다.”(하동현시장공적비 건립추진위원회 건립)높이 180cm, 너비 120cm, 두께 47cm 규모로 건립연대는 미상이다. 하동현 시장 공적비 건립추진위원회가 서양화가 강동문에게 의뢰해 디자인을 강동문이 맡고, 비문은 서예가 남정 최정균이 썼다. 만인이 어진이로 인정하고, 그 뜻을 노래하기 위해 비문을 새기고 공적비로 세움을 받은 하동현, 그 하동현은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였으며, 목포시민들에게 무슨 유산을 남겼을까? 고 하동현의 삶의 궤적을 따라 그의 목포사랑을 조망해 본다.

 

출생과 성장

5(관선), 7(민선간선 2), 8(민선직선초대) 목포시장을 지낸 하동현은 진주 하씨로 전남 강진군 병영읍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하도일이고, 어머니는 곽인순이다. 31녀중 장남으로 1903년 출생하였다. 자세한 내용이 알려지지 않아 연유를 알 수 없지만 고향 강진이 아닌 목포의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목포북교초등학교)1918년에 졸업하였다. 이어서 목포간이상업학교(목포상업고 전신)에 진학하여 1920년에 졸업하였다.

공직생활시작

상업학교를 졸업한 하동현은 1922년에 모교인 목포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임명되어 첫 공직 생활을 시작한다. 당시에는 상업학교를 졸업하면 금융계로 진출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하동현은 다른 동기생들과는 달리 특이하게도 교육계로 진출하였다. 하동현이 금융계로 진출하지 않고 교육계로 진출하게 된 정확한 동기를 알 수는 없지만 하동현의 3남인 대의씨는 하동현은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서는 인재육성이 급선무라고 고심한 끝에 동기들과는 달리 교원을 자청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한다. 하동현은 첫 직장인 모교에서의 교원생활을 6년간 지속했다. 그러던 1928년에 돌연 교원을 그만둔다. 잠시 쉬었다 1년 뒤인 1929년에 목포부 학교비사무원에 임명된다. 당시의 학교비사무원이라는 자리가 어떤 일을 하는 자리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요즘으로 치면 학교행정을 지휘 감독하는 교육위원회소속 요원으로 추측이 된다. 아무튼, 하동현은 학교비사무원으로 3년 동안 근무하게 된다.

1932년이 되었다. 이해는 하동현이 전혀 새로운 길을 가게 되며, 하동현의 나머지 인생을 바치게 되는 행정인의 길을 걷게 하는 중요한 해이다. 하동현이 목포부 재무과 서기로 임용된 것이다. 재무과 서기로 첫발을 내딛은 하동현은 1941년에는 재무과 징수계주임, 1943, 재무과 부과계장, 그리고 해방되던 1945년에는 총무과 내무계장, 1946, 총무과 비서계장, 그리고 12월에는 목포부 재무과장이 된다. 이어서 1948년에는 목포부 산업과장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대한민국정부수립 2년 뒤인 19504월에는 목포시 부시장에 임명되었다.

같은해, 11월에는 순천시의 시장에 임명되어 잠시 목포를 떠나게 된다. 2년뒤인 19524월에는 관선 제5대 목포시장으로 임명되어 다시 목포로 돌아온다. 1932년 목포부 재무과 서기로 시작해서 20년 만에 목포시정의 최고 책임자인 시장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숨 가쁘게 달려온 행정인의 길이었다.

5대 시장

하동현은 목포시장을 5(관선), 7(민선간선), 8(민선직선) 3번 역임한다. 재임기간은 모두 74개월이다. 직선으로 3번 선출된 정종득 전시장(36,37,38)외는 하동현이 유일하게 3차례 시장직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첫 번째 시장직이었던 제5대 시장직은 시장이던 하동현 자신이나 목포시민들에게도 별 의미가 없는 시기였다. 시민들의 의사하고는 무관하게 정부에 의해 임명된 관선시장이었으며, 새로운 지방자치법으로 인해 재임기간도 1개월 남짓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동현의 시장으로써의 진면목은 제7대와 제8대 시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7대 시장

하동현은 제7대 시장으로 19521024일에 취임하여 1956710일 이임한다. 38개월 남짓 시장직을 수행한다. 하동현이 제7대 시장직을 맡게 된 계기는 새로운 지방자치법에 의해 민간최초의 시장으로 선출된 제6대 시장 박재우가 5개월 만에 시장직을 사임하고 시의회가 하동현을 새로운 시장으로 선출하였기 때문이다.

하동현이 제7대 시장으로 선출될 수 있었던 저간의 사정을 좀 더 소상하게 파악해 보자.

1949년에 새로 제정된 지방자치법에 의하면 1952년부터는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지방의회에서 선출토록 규정하였다. 간접선거에 의한 민간선출이었다. 따라서 제6대 목포시장은 이 지방자치법에 의해 195257일 목포시 의회에서 선출하였다. 목포시의회는 목포경찰서장출신 박재우를 제6대 목포시장으로 선출한다. 이때 박재우의 나이 35세였다. 박재우는 새로운 지방자치법에 의해 민간 최초의 제6대 목포시장 된 것이다. 그러나 박재우는 시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각종 비행으로 시의회의 불신임안이 제기되는 등, 불신임 분위기가 강해지자 스스로 5개월 만에 시장직을 사임한다. 박재우의 사임으로 시장직이 공석이 되자 시의회는 1024일 시장선출을 위한 의회를 소집하고, 새로운 지방자치법으로 인해 취임 1개월여 만에 시장직을 사임하였던 관선 제5대 시장 하동현을 새로운 시장으로 선출한다. 이로 인해 하동현은 사임 5개월 만에 민선제2기 제7대 목포시장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하동현이 시장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었던 직접적 원인은 제6대시장 박재우 불신임이다.

그러나 하동현은 시장으로 재선출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역량과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20여년에 걸친 풍부한 행정경험과 청렴성, 그리고 불편부당한 처신이 하동현을 다시 시장으로 불러 낸 것이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 하동현의 청렴성과 불편부당성이다. 하동현이 시장으로 취임한 1952년은 6.25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시기였다. 경제는 물론이고 사회가 전반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시민들은 하동현을 청백리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목포백년회 이사장을 지낸 고 김환은 하동현이 고무신을 신고 다닐 정도로 청렴한 시장이었다고 증언한 적이 있다. 사실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하동현이 시민들 사이에 청백리라고 소문이 나돈 것은 사실이었다.

하동현의 3남 대의씨의 회고에 의하면 시청과장 집에도 있는 가전제품도 시장집인 자기네 집에서는 구경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부정과 불의가 판치던 시절에 청백리로 소문이 난다는 것은 하동현의 가장 큰 강점이자 미덕이었다. 그리고 하동현의 불편부당성이 시민들 사이에서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하동현은 집권여당인 자유당과 야당 사이에서 나름대로 소신을 갖고 언제나 시민만을 바라본다는 자세로 시정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하동현은 시장당선때 부터 시장직에 취임하고 난 뒤에도 내내 특정정당의 당적을 갖지 않은 채 무소속으로 일관하였다. 7대 시장직은 임기가 1956710일까지였다. 하동현은 재임기간 내내 6.25 한국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목포시의 복구사업에 몰두하였다. 특히 주택난으로 인해 고통받는 시민들의 주거안정을 위해 주택을 지을 수 있는 택지조성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남해개발 주택단지가 탄생하게 되며, 남해개발 주택단지는 먼 훗날 하당의 신도심 탄생의 효시가 된다.

/다음 호에 이어짐

-약력

목포 중.고등학교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 MBC PD / 제일기획(삼성그룹) 기획국장 / 통일민주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목포시지구당위원장 / 지역주의타파 범국민실천위원장 / 저서 나는 일하고 싶다’‘매향노라 불리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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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원 2022-07-18 13:29:09
배 위원장님!
건강하시고 잘 지내시리라 믿고, 독자들과 저자님과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김종우 2022-07-10 11:20:56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목포를 사랑한 옛 선배님들 사연을 잘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심규철 전 국회의원 2022-07-08 21:23:59
배종덕 형님의 지칠 줄 모르는 애국 활동에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토마스양 2022-07-08 12:45:54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 7인의 이야기 연재
7인의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
잘 보고 있습니다.
목포를 다시 기억하게 하며
목포시민의 자부심과 긍지를 느낍니다.
다음호 인물들이 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
중국 이우공상대학 교수 양태백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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