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목포를 사랑한 사람들 7인의 이야기Ⅲ-공생원 윤학자⑤]오직 사랑으로 원생들의 굶주림과 고난을 이겨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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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목포를 사랑한 사람들 7인의 이야기Ⅲ-공생원 윤학자⑤]오직 사랑으로 원생들의 굶주림과 고난을 이겨내다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2.09.08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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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딸 원생과 똑 같이 키우며 차별과 특혜없는 평등사상
원생 차별없이 자부심 갖는 떳떳한 빛의 자녀 자라기 바래

본지는 지역주의타파범국민실천위원회 배종덕 위원장이 집필한 목포 7인의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을 기반으로 ‘7인의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란 주제로 연재한다. 이번 연재는 배 위원장이 출간한 책에서 저자가 직접 작성한 글로서 61일 발행되는 신문부터 독자를 찾아간다. 30회에 걸쳐 보도될 이번 연재는 일곱 분의 인사 중 첫 번째 순서로 종교 정치분야로 이남규 목사 편이 총 4~5회에 보도된다. 두 번째는 행정분야의 하동현 전) 목포시장, 사회복지분야 윤학자 여사, 산업경제분야 임광행 회장, 문화예술분야 차재석 전)목포예총지부장, 사회봉사분야 박길수 씨, 사회봉사분야 김환 전 백년회 이사장 순으로 보도될 예정이다.<편집자 주>

 

7인의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공생원 윤학자 여사

사랑의 역정

'내게 걸으라고 명하신 그 길은 오직 나만을 위해 주님이 예비 하신 것.'

윤치호와의 동역시대가 지나고 무거운 짐을 홀로 져야 하는 고군분투의 시기가 도래하였다. 윤학자의 고군부투는 300여원생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워주는 일부터 시작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시급한 일은 원생들을 굶기지 않고 먹이는 일이다. 사실 공생원은 윤치호가 실종되기 전부터 이미 식량이 바닥이 난 상태였다. 원생들을 굶기지 않고 죽이라도 먹이려면 구원의 손길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윤학자는 평소 공생원에 도움을 주시던 목포시내의 유지들과 교계, 그리고 목포시청에 거의 구걸에 가까운 후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윤학자는 궁리 끝에 재산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윤학자에게는 유일한 재산인 가재도구를 내다 팔기로 하였다.

윤학자는 몇몇 원생에게 어머니께서 결혼혼수품으로 마련해주신 장롱과 윤치호가 직접 만든 가구 몇 점을 팔아 오도록 하였다. 가구를 판돈으로 식량을 구입해서 점심은 굶기더라도 죽이라도 먹일 요량이었다. 가구를 내다 팔고 며칠이 지났다. 식량의 위기가 다시 찾아 왔다. 윤학자는 이번에는 목포시청 후생과를 찾았다. 그러나 윤학자는 귀가 도중에 눈길에 쓰러 저 의식을 잃는 큰 변을 당하였다. 행인의 도움이 없었으면 목숨을 잃을 뻔한 큰 사고였다. 다행히 제중병원을 운영하던 원장 최섭장로의 극진한 진료덕분으로 3일 만에 다시 일어섰다. 윤학자의 목숨을 건 시청방문으로 일시나마 식량위기는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조치들은 근본대책이 없는 미봉책에 불과하였다.

상황은 개선되지 않은 채 윤학자로 하여금 또 다시 임시방편 책을 쓰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다. 이번에는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오르간을 팔기로 하였다. 오르간도 지난번에 판 장롱처럼 결혼식 때 어머니께서 마련해주신 혼수품이었다. 오르간만은 팔고 싶지 않았지만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르간을 내 주기로 한 날이 왔다. 윤학자는 살을 베어내는 슬픔을 참기 위해 원생들을 강당으로 모이게 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두 번 다시 만질 수 없는 정들었던 오르간 위에 손을 얹고 찬송가 82장을 소리 높여 불렀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 뿐 일세...”

그러나 배고픔을 견뎌야 하는 고난의 시간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윤학자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공생원을 해산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윤학자는 심한 갈등에 빠졌다. 그러나 뜻밖에도 갈등에 빠진 윤학자를 바로 잡아 준 것은 원생들이었다. “어머니 저희들도 열심히 일을 할 테니까 제발 해산한다는 말씀만 하지 말아주세요.”“어머니!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돼요,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원생들의 간절한 요구와 큰딸 청미의 눈물 젖은 호소에 흔들리던 윤학자가 용기를 얻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너희들 정말로 고맙다. 나도 힘이 다 할 때까지 열심히 할 테니. 아버지 돌아오실 때 까지 어떠한 일이 닥치더라도 이곳을 지켜 나가자. 너희들, 정말 고맙다, 고마워...”(아름다운 유산”, p.237, 정훈편저)

해가 바뀌어 1953년이 되었다. 6.25 한국전쟁의 정전협상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전쟁은 완전히 종식되지 않고 곳곳에서 전투소식이 들려왔고 사회는 여전히 어수선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공생원과 윤학자에게 기쁜 일이 생겼다. 공생원의 원생 전원이 미국의 기독교 아동복지회(C.C.F(Christans Commision Fellowship))에 가입 된 것이다. C.C.F 가입으로 원생들은 전원이 미국의 가정과 양부모 관계를 맺고, 양부모로부터 매월 일정액의 학비를 보조 받는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기쁜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함태영”(함태영(1872.10.22~1964.10.24). 함경북도 무산. 1952~1956. 2대 대한민국부통령)부통령께서 공생원을 방문하였다. 윤학자를 만난 함부통령은 윤학자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윤여사가 하얀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있는 모습에 한층 감동했습니다. 앞으로도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겠지만 용기를 잃지 말고 힘을 내십시오. 정부로서도 할 수 있는 한 협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몸조심하시고 시련에도 이겨나가십시오.”(아름다운 유산”, p.240, 정훈편저)

윤학자는 함부통령이 두 손을 꼭 잡은 채 아버지가 친딸에게 하듯 진심이 가득 담긴 말을 하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가슴 속에서 뜨겁게 솟구치는 참을수 없는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함부통령이 다녀간 3일 후, 전라남도 구호위원회는 함부통령의 특별 지시에 의해 C레이션이 600개가 들어 있는 2개 트럭분의 구호물자를 보내왔다. 공생원과 윤학자는 일년전인 1952년에 보사부장관으로부터의 표창 받은 일과 두 번 (C.C.F가입, 함부통령의 방문)에 걸친 경사로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윤학자와 공생원의 존재를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하였다.

해가 바뀌어 1953727, 6.25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 되었다. 사회가 차츰 안정을 찾아 가기 시작하였다. 공생원에도 안정이 찾아왔다. 윤학자의 피나는 노력과 사회각계의 관심 덕분에 궁핍으로 얼룩진 고난의 시대가 지나고 안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한숨을 돌리게 된 윤학자는 오래 전부터 꿈꾸어 왔던 원생들에 대한 진정한 양육법에 매달리기 시작하였다.

 

원생들을 빛의 자녀로

 

여러분은 모두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밤에도 속하지 아니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5-

 

공생원이 궁핍했던 고난의 시절 윤학자는 원생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리어카를 끌고 이집 저집 밥 구걸을 다녔다. 리어카를 끌면서도 윤학자의 머릿속에는 우선은 밥이 중요하지만 밥보다 더 중요한 그 무엇으로 꽉 차 있었다. 어떻게 하면 원생들을 빛의 자녀로 키울 것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윤학자가 이러한 목표를 갖게 된 것은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의 기록서인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이러한 추론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차후 윤학자의 원생들에 대한 양육행태가 증명해 주기 때문이다. 윤학자는 원생들을 첫째, 차별하지 않는다. 윤학자는 원생들 간에는 물론이고 자신이 낳은 친자녀와 원생들간에도 차별하지 않았다. 윤학자는 오래 전부터 첫째딸 청미와 장남 를 자신과 떼어 놓은 채 원생들과 똑같이 먹이고, 입히고, 재웠다. 그러나 원생들은 윤학자의 진정성을 쉽게 받아 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원장의 딸과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청미는 크고 작은 상처와 고통을 무수히 감수해야 했다.

장남 기의 회고다. “나는 원장 아들이라고 특별한 대우를 받은 기억이 전혀 없다. 오히려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일본인이라고 해서 쪽발이라고 무수한 놀림과 학대를 원생들에게서 당했다. 뿐만 아니라 원생들에게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어머니는 결코 나에게 특별한 배려나 시선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어머니는 나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건가? 자식은 눈에 보이지 않아 이 고생인데도 어머니는 태평이시구나... 또 이런 생각도 하였다. 그래, 어머니는 내게는 관심도 없단 말이지, 좋아! 상관없어, 난 내 힘으로 살아 갈 테니까, 어머니 도움 따윈 없어도 좋단 말이야, 어머니는 바보야!”(어머니는 바보야”, p.178, 윤기, 윤문지 지음)

그러나 윤학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직 어린향미영화도 원생들과 같은 방식으로 키웠다. 원생들도 차별 받지 않고 자부심을 갖고 떳떳한 빛의 자녀로 자라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둘째, 원생들이 사회에 나갔을 때 자립 할 수 있는 능력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원생들처럼 부모나 사회적 배경이 없는 사람이 자립하기 위해서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기술습득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남자원생들에게는 목공기술, 여자원생들에게는 미용기술을 가르쳤다. 윤학자의 이러한 현실 판단은 원생들이 공생원을 떠난 후에 사회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먼 훗날 얘기지만, 윤학자의 이때의 혜안은 1985, 공생원이 서울의 한남, 암사의 2개의 직업훈련원을 서울시로부터 위탁을 받아 경영 할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공생원이 12년 동안 한남, 암사의 직업훈련원을 통해 배출한 산업역군은 15천명이었다.

셋째, 원생들을 올바른 인성을 갖춘 인간으로 키워야 한다. 윤학자는 인성교육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음악을 통한 교육이 최선이라고 판단하고 원생 전원에게 음악교육을 집중지도하였다. 가창은 물론이고 형편상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재능 있는 원생에게는 피아노를 비롯한 악기연주법도 가르쳤다. 음악교사 출신다운 양육방법이었다. 이때의 교육이 밑거름이 되어 먼 훗날 수선화합창단으로 크게 꽃 피웠으며 ○○같은 걸출한 성악가도 배출하였다.

특히 수선화합창단은 1971년 일본공연과 NHK방송 출연을 통해 일본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으며 공생원과 윤학자의 존재를 일본전역에 깊이 각인 시켰다. 고아들과 같이 살면서 고아들에게 음악교육을 실시한 윤학자, 고아들과 같이 살면서 고아들을 위해 곡을 쓰고, 고아들이 연주토록 한 세계적인 작곡가 사계의 비발디(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 이탈리아 베네치아. 작곡자. 바이올린연주자. 대표작 바이올린협주곡사계”), 두 사람사이에는 300년이라는 시차가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원생들을 빛의 자녀로 키우고 싶었던 윤학자의 꿈은 꿈에 머무르지 않고 2세 윤기, 3세 윤록으로 이어진다.

/다음 호에 이어짐

-약력

목포 중.고등학교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 MBC PD / 에스콤 대표이사/ 제일기획(삼성그룹) 기획국장 / 통일민주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목포시지구당위원장 / 지역주의타파 범국민실천위원장 / 저서 나는 일하고 싶다’‘매향노라 불리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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