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칼럼-김종수 목사] 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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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칼럼-김종수 목사] 나는 길이다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2.10.14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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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 목포산돌교회 담임목사

[목포시민신문] 강아지가 커서 개가 된다. 송아지가 커서 소가 된다, 망아지가 커서 말이 된다, 여기서 퀴즈 하나, 하나님의 아들 딸들은 커서 무엇이 되나? 당연히 하나님이다.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람이다. 그 위대한 사도 바울 역시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3:12)라고 말한다. 그러나 목표점인 하나님을 향한 방향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신앙이다. 이르지 못해도 평생의 과제다. 하나님 자신도 궁극적인 목적을 자신에게 두라고 하였다.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야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19:2)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한 마디로 거룩하게 자라 하나님이 되라는 것이다.

예수가 그의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께로 간다고 하신 것도 단지 죽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에 이르는 것이다. 아들이 자라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10:30)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죽이려고 한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놀랍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적 정체성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인간에게로 확장시킨다. “내가 너희를 신들이라고 하였다”(10:34)는 시편(82:6)을 인용한다. 나만이 아니고 사람 모두가 신이고 하나님과 하나라는 말이다. 죽음을 앞둔 예수의 기도도 우리(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아버지와)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17:11)이다.

하나님 혹은 예수를 믿는다는 말씀의 헬라어 원어를 살펴보라. 목적격이 아니다. 여격으로 쓰고 있다. 헬라어에서 여격은 관계를 나타낸다. 하나 된 관계다. 믿는다는 것은 멀리 높이 계신 분을 바라보며 예배하고 기도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하나 되는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1:17)고 말씀하신다. 그처럼 살라는 말이다. 믿음은 따름이다. 예수 살기다. 그래서 예수 되기다. 예수와 하나 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 혹은 예수를 믿는다는 또 다른 표현이 있다. 전치사구를 동반한 표현이다. ‘피스테오 에이스 쎄온(크리스톤 예순)’이다. ‘피스테오믿는다인데 전치사 에이스는 목적을 나타내는 전치사다. ‘쎄온은 쎄오스의 4격이다. 이것을 직역하면 하나님에 이르도록 믿는다이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을 믿는다고 오역함으로 하나님을 먼 곳, 높은 곳의 존재로 대상화 시켰다. 하나님에 이르러 하나님과 하나 되는 그 소중한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지독한 오역이다.

이 오역은 믿음을 왜곡했다.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을 저 낮은 곳에 있는 인간이 믿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기는커녕 서로 너무 멀다. 권력화된 하나님과 그 권력에 지배당하는 인간만이 서로 멀리 있을 뿐이다. 옛날 왕이 스스로를 신의 아들로 자처한 이유가 바로 자신을 신격화시켜 절대 권력의 자리 매김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타락한 종교의 융성에는 항상 권력과의 야합이 뒤따르고 그래서 종교는 늘 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해왔다. 거짓 종교는 권력에 길들여지는 것으로 그 세력을 과시한다. 여기에는 설득이나 토론이 없다. 질문도 없다. 묻지 마 신앙이다. 믿으시기 바랍니다에 아멘 밖에 없다. 맹목적 믿음과 순종이 미덕이 된다. 강대상에서 이년 저놈을 외쳐도 아멘 할렐루야 한다. 대단한 그루밍이다.

하나님 앞에 붙은 전능하신은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오도된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 샤따이이다. ‘은 하나님이고 샤따이는 두 개의 젖가슴이다. 젖을 물리는 모성을 상징한다. 가장 숭고한 모성적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연결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전능함은 힘의 전능함이 아니라 사랑의 전능함이다. 하나님이 가진 것은 이 전능하신 사랑이다. 자기를 죽여서까지 사랑한 사랑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가운데 세우고 있다.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예수가 처형당한 십자가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본다. 십자가 사랑을 통해 비로소 예수는 하나님에 이르고 하나가 된 것이다; 그 사랑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다. 죽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의 전능함이다. 참 하나님이라면 사랑의 전능함 밖에 없다. 그러니 예수에게 부를 달라고 기도하지 마라. 그는 갖고 있는 것이 없는 나사렛의 가난뱅이다. 그러니 예수에게 건강과 장수를 기도하지 마라. 그는 33살에 죽었다. 그가 갖고 있는 것은 소유, 지위의 전능함이 아니라 죽기까지 한 사랑의 전능함이다.

그리고 그가 왜 죽었는가를 생각하라. 그가 십자가에 죽었을 때 로마의 한 장교는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15:39)고 고백한다. 정치든 종교든 권력의 전능함을 배격한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DNA를 발견한 것이다. 권력이라는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자리에서 이방 로마 장교는 그의 하나님 됨을 발견한 것이다.

이쯤 되면 내가 길이다”(14:6)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힌다. 예수가 내가라고 했으니 그 는 예수인 줄 알았다. 맞다. 예수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순간 우리는 예수 뒤에 숨는다. 그 예수는 멀리 높이 있는 예수다. 내 안에 있지 않다. 높이 대상화된 예수다. 사실상 우상이다. 숭배하는 대상일 뿐, 멀리 있는 권력일 뿐 나와 하나가 아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1:20)고 말한다. 내가 아니라 예수란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힌 내가 그리스도란다. 바울도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이른 것이다. 비로소 길이 된 것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사람들에게서. 특별히 믿는 사람들에게 너무 오랜 오해를 심어 놓은 말이다. 사이비 교주처럼 예수가 나만 길이고 나만 참 진리를 갖고 있고 나만 사람을 살리는 생명을 갖고 있다고 말한 것일까? 바깥 높은 곳 멀리에 길과 진리와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음을 알았다. 내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을 때만 비로소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밖에 있으면. 멀리 높이 있으면 우상이다.

모든 생명을 품는 것, 그것이 내가 길인 이유다. 시천주의 길이다. 그 길은 예수에게서 십자가의 길이다. 예수만의 십자가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자기 십자가아니 모든 생명이 자기 십자가다. 우리 모두가 길이다. 오늘 아침 먹은 밥이 자기 십자가다. 나를 위해 생명의 쌀이 죽어 밥이 되었다. 그 밥이 내게 길이 되어 주었다. 사실 온 생명이 죽어 내가 되었다. 내가 죽어 네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되었다. 우리라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나와 아버지가 하나이듯이 말이다. 생명이 죽어 생명을 살렸다. 생명을 품기 위해 를 죽였다. 자기 십자가다. 이것이 내가 길인 이유다. 길을 잃었는가? 나를 잃은 것이다. 사실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한국 정치가 길을 잃은 지 오래다. 길이 되겠다는 내가 없다. 민주주의가 길을 잃었다. 어떻게 쌓아올린 민주주인데 이렇게 무너지는가? 권력이 목적이었다. 사람을 하늘처럼 품는 길이 된 사람이 없다. 권력이 목적이었으니 남을 밟고 일어서야 한다. 길은 밟아야 길이 아니라 밟혀야 길이다. 한국 정치는 여든 야든 그 어떤 정당이든 길이 되지 못했다. 민을 길 삼아 밟고 일어선 군사 독재가 사라지는가 싶더니 더 교활한 지배가 자리 매김 했다. 진보니 보수니 하는 것은 포장에 불과했다. 오직 짓밟는 권력만이 목적이다. 여야가 적대적 동지로 권력을 나누어 가져 왔다. 거기 길은 없다. 백성을 위한다는 것은 없다. 권력을 위한 이용물만 존재한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열사들의 길을 생각해보라! 그들이 권력을 바래 그랬던가? 그들은 민이 주인 되기 위해, 민을 주인으로 만들기 위해, 민주주의를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길이 되었다. 자기가 하늘이듯 민이 하늘임을, 그래서 민이 주인임을 세우기 위해 그 길이 되었다. 길이 되어 민이 그 길을 제도적으로라도 밟게 했다. 그들은 사람을 품었다. 그들은 내가 길이 되어 길처럼 죽어 낮아졌다.

왜 한국 노동계가 길을 잃었나? 길이 된 사람이 없다. 없는 것이 아니다. 있었다. 그런데 그 되어야 할 길을 보지 못했다. 전태일이 노동 3권의 권리를 얻기 위해 자기를 불태웠나? 그런데 그가 왜 길인가? 그 권리를 찾는 투쟁만 한 것일까? 아니다. 그는 평화 시장의 동료들의 가혹한 노동 현실에 죽기까지 가슴 아팠다. 그에겐 그들이 하늘이었다. 그 하늘을 품었다. 멀리 팔레스틴, 갈릴리 나사렛의 청년 예수가 간 그 길을 그도 길이 되어 갔다. 갈릴리 나사렛과 평화 시장이라는 역사의 장소가 다를 뿐이다. 아름다운 청년 예수와 전태일이 길이 되어 갔다. 노동운동은 권리를 찾기 위한 힘의 규합이 아니다. 노동의 정의는 사람을 품는 것이다. 사람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품는 일이다. 오늘 그 길이 되어준 사람이 없다. 권리와 투쟁의 깃발은 나부끼는데 거기 따뜻한 연대가 보이지 않는다. 길이 없다. 길인 사람이 없다. 길이 되어준 사람이 있는데도 말이다.

왜 교육이 길을 잃었나? 모두가 하늘인데 등급을 매기고 경쟁에 불을 붙인 것이다. 아직도 자사고로 논쟁이다. 벌써 없어져야 할 것들이 더 기승을 부린다. 경쟁의 구조가 우리 아이들을 살해했다. 남을 짓밟아야 내가 사는 것이 교육이 되었다. 길이 되는 것이 교육인데 남을 길 삼아 짓밟는 경쟁이 교육이 되었다. 참교육의 길이 실종되었다. 참 교육에 숨겨진 권리만 있는 것은 아닐까? 혹 이념만 구호화 된 것은 아닐까? 길이 되고자 하는 교사는 있는가? 아이들을 품는 길이 된 교사 말이다. 사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많다. 그런데 세력화, 조직화에 눈이 어두워 길이 된 이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종교의 ()은 종속할 종이 아니다. 마루 종이다. 근본을 찾는 것이다. 근본은 사람됨이다. 사람됨은 사람을 품는 것이다. 기독교의 출발이 그러하다. 찢어지게 가난하고 불온한 갈릴리 나사렛의 별 볼일 없는, 헬 이스라엘의 예수를 주인으로 고백함으로 시작된 종교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주인)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하십시오.”(벧전 3:15) 길이 되어 가신 예수를 맞아 너도 길이 되라는 종교가 기독교다.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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