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상흔…왜곡된 삶의 목포-일본人⓵]목포 광복 8월 15일 일본 헌병은 아직도 치안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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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상흔…왜곡된 삶의 목포-일본人⓵]목포 광복 8월 15일 일본 헌병은 아직도 치안 맡았다
  • 류용철
  • 승인 2022.10.14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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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역에 끌려간 조선인 해방 다음날도 노역장서 일해
일반 일본인 테러와 린치 피해 조선인 부역자에 숨어
해방 후 조선 일본인 절반 귀국 못하고 한반도 남아

목포는 일제강점기 수탈항으로 역할을 하면서 번성했다. 식민지 수탈의 첨병 역할을 하는 일본인들과 신문물을 배우기 위해 몰려는 조선인들로 도시는 매년 몰려드는 인구로 급성장을 했다. 일제강점기 급성장했다 산업화 소외로 쇠퇴한 도시답게 일본 식민지 사회가 남긴 상흔은 도심 곳곳에 남아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가 돼 남아 있다. 이런 영향으로 근대도시 목포는 해방과 패망으로 서로 엇갈린 시각으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다. 해방과 함께 징용에서 귀국한 사람은 일제 침탈과 약탈의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다. 반면 패망으로 한반도에서 태어나 자라고 성장기를 목포에서 보내다 일본으로 돌아가 일본인들의 왜곡된 삶을 살았다. 이들의 삶을 조명함으로써 전쟁의 생채기를 후세에 알리고자 한다. 일제가 벌인 식민지 전쟁으로 왜곡된 삶을 살다 간 일반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근대 도시 목포의 상처를 알아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게재 순서>
혼돈의 목포 1945815
해방 후 목포의 일본인들
일본으로 돌아간 목포 일본인
하이쿠 시인 무라카미 교시
일본서 태어난 조선인의 인생
식민지의 상처 목포 다크 투어

 

[목포시민신문] 1945815. 우리에겐 36년의 일본 제국주의 식민사회에서 행방된 날이자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겐 패망의 날이였다. 이날 12시 라디오을 통해 일본 천황의 패망 선언이 삼천리 금수강산에 울러 퍼졌다.

심훈 시인은 그날이 오면이란 시에서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 종로(鐘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라고 노래했을 정도로 해방을 갈구했다. 막상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패망과 해방의 소식을 듣은 일반인들은 감정이 복받쳐 올랐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일본 식민지사회에서 생업을 위해 평범한 삶을 영유하던 일반인들에게 그 해방의 감정은 그리 크게 전달되지 않았다. 일본 현병대에 징용으로 끌려가 노역을 하던 기대서 옹(목포시 죽교동98)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목포에 남은 일본영사관에 제작된 일제강점기 일본인 거리 조형물.

한참 더운 8, 입대를 앞두고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지만 방공호 공사장에 동원되어야 했다. 공사현장에는 백마를 탄 일본 군인이 점검 차 매일 한 번씩 확인하러 왔다. 그런데 나흘째 되던 날 군인은 오지 않았다. 오전 일을 마치고 쉬는데, 젊은이며 아이들이 몰려와 아저씨들 이제는 일할 필요 없어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서야 유달산 노적봉을 건너 일본인 거리에 나가보니 상황이 바뀌어 있었다. 해방이었다. 그리 가서 본께 틀림없이 일본 놈들이 경찰서 앞마당에 서서 쳐 울고 있는 놈도 있고. 그래서 3일 한나절 일하고 해방을 맞았어.”

기 옹께서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경찰서 앞마당에 서서 울고 있는 일본인들은 어떻게 됐을까? 패망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기지 못한 조선내 일본인들은 전국적으로 0000명이고 일제강점기 주요 도시였던 만큼 목포시에도 상당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총독부가 발행하는 경성신문 목포지국장을 했던 무라카미 교시(村上杏史)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패망이 되던 815일 조선에 있던 고관대작이나 고위 현병대 장교가 아닌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일본으로 돌아갈 기회를 놓쳤다. 우리는 이날부터 밤낮으로 자행되는 테러를 피하기 위해 숨어 들어 피신할 곳을 찾았다. 다행히 하이쿠(俳句) 문학동인을 함께 했던 지인이 사는 해남 황산면 가옥에 숨어 밤낮으로 지속되는 집단 리치를 피했다기록했다.

그리고 징용으로 끌려갔던 자발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갔던 조선인들은 해방된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발부둥을 쳐야 했다. 일본에서 갖은 탄압과 막노동으로 하층민의 삶을 살던 조선인들이 자신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초등학교 6학년까지 일본 야마구치현의 오노다시(小野田市)에서 살던 정한순(90) 할머니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공장에 일 가고 초등학교 6학년 여름 해방을 맞았다. 이듬해 어머니는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면서 아버지의 묘소에서 유골을 수습해 이불로 둘러쌌다. 귀국 여객선은 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작은 어선을 빌려 강진까지 오는데 잦은 고장과 사고로 한 달 이상이 걸렸다고 증언했다.

일본제국주의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이 패망으로 끝났지만 일반 국민들에게 남긴 상처는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고 평생을 그 아픔에 갇혀 살도록 강요하는 결과를 낳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목포역 광장에 세워진 광복 기념 조형물사진(목포문화원 자료사진)

1897년 개항 당시 목포에는 206명에 불과하던 일본인의 숫자는 러일전쟁과 을사조약, 차관정치, 한일강제병합이라는 정치적 격변과 토지가옥저당규칙의 제정(1906)과 외국인 토지소유를 개항장 10리 이내로 제한하는 조치의 철폐(1907) 등의 경제상황 변화의 영향으로 급증하한다. 1916년엔 전국에 32938명 중 4665명의 일본인이 목포에 거주했다. 목포에 거주한 일본인들은 직업은 상업 교통업이 31%, 단순 노무자 27%, 공무원 전문직 17% 순이었다. 단순 노무자인 도시 하층민 출신의 일본인이 많이 거주한 것은 일본의 대외 침략을 근간으로 하는 군국주의 추진 과정에서 확실한 직업이난 자본도 없이 유입된 부류로 분석된다.

여기에 목포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10%내외의 공무원 출신이란 점은 일본인 목포를 경제수탈 창구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무역항으로 개발하기 위해 도시 성장을 일제가 관()주도로 추진하였을 반증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무라카미 교시(村上杏史)도 러일전쟁에 참여한 아버지의 제안으로 목포 인근 해남 황산에 자리를 잡도 살았다. 무라카미 교시는 회고록에서 아버지는 전쟁에 참여한 군인 관료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해방 당시 한국에는 265만명의 일본인 거주했다. 이중 해방이 되기 전 130만명이 귀국했다고 일본측은 기록하고 있다. 135만명의 일본인이 돌아가지 못하고 한국에 남았다. 당시 번성했던 목포에도 상당수의 일본인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965년 한일협정으로 돌아간 일본인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해방 후 전국은 미군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대 혼란의 시기였다. 일본군이 물러났지 목포등 각 지역의 지서에서는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 순사가 버젓이 거리를 활보했다. 목포의 3대 사회주의 운동가 중 한 사람인 조극환 독립운동가는 영암 향토사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 지역의 각 기관도 왜정때 그대로 있었으며, 일본의 패잔병도 물러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서울이나 지방이나 동일 한 보조로 잠정적인 치안 기관인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각기 향토를 수호하게 됨으로써 822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군 행정 사무일체를 인수하였다. 목포 등 영암 읍내에는 일본인 경찰이 경찰서를 지키고 있었다.”

당시 학생 신분이던 법정 스님의 유일한 친구로 알려진 박광순 전남대학교 명예교수는 해방 후에 혼란과 법정과의 학창시절이란 저서에서 해방전 목포의 경제는 목화와 미목의 철저한 모노컬처 식민지형 경제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부는 대부분 일본인들이 차지했고 조선인들은 하역부두노동자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458월 맞은 해방은 단순 지배자의 교체일뿐이다라고 말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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