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일제강점기 상흔…왜곡된 삶의 목포-일본人②]日 귀환선 일제 착취와 차별뿐 국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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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일제강점기 상흔…왜곡된 삶의 목포-일본人②]日 귀환선 일제 착취와 차별뿐 국가는 없었다
  • 류용철
  • 승인 2022.10.20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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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일본인들 순조로운 재산 정리와 귀환 절차 밟아
징용‧일 거주자 풍선 빌려 귀환 한 달 넘은 항해로 생지옥
1946년 귀환자 3만여명 목포로 몰리면서 도시 문제화 잉태
일제강점기 상흔왜곡된 삶의 목포-일본

목포는 일제강점기 수탈항으로 역할을 하면서 번성했다. 식민지 수탈의 첨병 역할을 하는 일본인들과 신문물을 배우기 위해 몰려는 조선인들로 도시는 매년 몰려드는 인구로 급성장을 했다. 일제강점기 급성장했다 산업화 소외로 쇠퇴한 도시답게 일본 식민지 사회가 남긴 상흔은 도심 곳곳에 남아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가 돼 남아 있다. 이런 영향으로 근대도시 목포는 해방과 패망으로 서로 엇갈린 시각으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다. 해방과 함께 징용에서 귀국한 사람은 일제 침탈과 약탈의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다. 반면 패망으로 한반도에서 태어나 자라고 성장기를 목포에서 보내다 일본으로 돌아가 일본인들의 왜곡된 삶을 살았다. 이들의 삶을 조명함으로써 전쟁의 생채기를 후세에 알리고자 한다. 일제가 벌인 식민지 전쟁으로 왜곡된 삶을 살다 간 일반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근대 도시 목포의 상처를 알아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게재 순서>

혼돈의 목포 1945815

해방 후 목포의 일본인들

일본서 태어난 조선인의 인생

일본으로 돌아간 목포 일본인

하이쿠 시인 무라카미 교시

식민지의 상처 목포 다크 투어

목포시 부주산 옛 화장터 인근에 일제 강점기에 징용됐다 숨진 피해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재일교포인 권구용(2003년 작고)옹이 사재를 털어 건립한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목포시민신문] 1945년 해방은 식민도시로 각인되었던 목포에게 대 혼란을 야기했지만 또 일제의 강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자유 목포시의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하지만 1897년 근대적 개항으로 일본인들의 수탈과 착취의 역할을 했던 목포의 혼란은 쉽게 진정돼 않았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자행한 제2차 세계전쟁은 끝났지만 일본인과 36년 식민지 지배를 당한 한반도 민중들에게는 혼돈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는 낌새를 알아 채린 일본제국주의자 군인과 고위관료들은 36년 식민지로 지배했던 한반도를 떠났다. 하지만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반 목포 일본인들은 식민지 사회에서 착취와 탄압을 당했던 민중들을 피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각처로 숨어들어 재산을 처분하고 본국으로 돌아갈 방안을 강구해야 했다. 이와 반대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간 징용인과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갔던 조선인들은 해방과 함께 무정부 상태가 된 한반도로 고향에 돌아가기 위한 귀국길에 올랐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하는 경성신문 목포지국장인 무라카미 교시(村上杏史)는 일본으로 돌아가 패망일 815일 이후 자신에 전개된 당시 목포 상황을 삼천리란 문학지에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태평양 전쟁 패색이 짙으면서 만주에서 부모님의 묘소가 있는 목포까지 왔다. 패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영사관에 갔지만 일본인 고위관료와 군인들은 모두 피신한 상황이었다. 자신과 같은 일반 일본인들은 자력으로 밤 낮으로 전개되는 테러 등 위험을 감수하고 피신처를 찾아야했다. 당시 하이쿠 깔다구시문학 동인을 함께 했던 지인의 도움을 받아 해남 황산 어느 가정집에 숨었다. 그리고 사선을 빌려 고향인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그는 기록을 남겼다.

반대로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까지 졸업하고 해방과 함께 부친의 유골을 안고 모친형제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목포에 이주해 살고 있는 정한순(90목포시 죽교동)여사는 당시 귀국길은 지옥과 같았다고 증언했다.

부친이 사망하고 어머니와 함께 야마구치(山口)시로 이사했다. 히로시마와 시모노세키에 원자폭탄이 투하하고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친은 부친의 유골을 수습해 고향으로 돌아야한다고 했다. 풍선(風船) 선주가 귀국할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돈을 받고 배워 태웠다. 한 달이 넘게 걸려 여수에 도착했다. 언제 난파될 모른 배에 몸을 싣고 와야 했다. 참혹했다.”고 말했다.

전국적으로 해방은 36년 식민지 사회에서 억눌렸던 민중의 봉기 등으로 혼란의 연속이었으며 목포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시가지는 계획의 실현은 고사하고 통제하기도 어려웠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입시직원이었던 오사다 가나코는 사무실에서 넋을 잃고 앉아있는데 한 직원이 불테워! 불태워버려!’하고 외쳐댔으며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니 사람들이 청사 각층 창문에서 내던지 서류 더미에 기름을 부어 불태우고 있었다고 자신의 논문에서 회고했다.

만주와 조선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들은 소련군의 진격을 가장 두려워했다. 패전 당시 일본인들은 북한에 약 50만명, 남한에 약 27만명, 이밖에도 만주에서 빠져나온 피난민 약 12만명이 있었다. 북한에 머물렀던 이들은 피난을 떠났지만 기차를 탈 수 있어 있었던 것은 군인과 경찰관 가족 등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그 외 북한 또는 만주 거주 일본인들은 남한으로 탈출 감했다. 남한을 점령한 소련군과 달리 미군은 일본에 대해 비교적 유화적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은 숨을 죽이고 재산을 정리하여 오로지 귀환될 날만을 기다렸다. 기다리지 못한 사람들은 밀선을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이때 일본인이 가져갈 수 있는 재산은 제한되었다.

일본영사관에서 바라본 일본인 거류지역 전경.

그리고 이들은 부산으로 몰려갔다. 부산은 일본으로 귀환하기에 가장 편리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미군이 진주하기 전에 재산을 처분하고 배를 빌려 귀환한 일본인이 많았다. 목포항운 사장과 목포상공회의소 회장과 목포거류민회 의장이었던 후쿠다 유조우(福田有造), 우찌다니 만베이(內谷萬平)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1945년 말 남한의 일본인은 28천명으로 감소했다. 1947년에 이루러 귀환은 완료되었다. 하지만 부산 일본인 세화회(世話會)19487월까지 활동을 계속했다. 일선(日鮮)결혼에 의한 파탄자의 송환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949년에도 1,041명이 귀국했다. 그 대부분은 내선결혼을 했다 파혼한 여성이었다.

이와 함께 일본으로 강제 노역에 끌려갔던 조선인들의 귀환도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식민지배를 했던 일본처럼 국가적 차원의 본국 소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역에 끌려간 이들은 개별적으로 돈을 주고 배을 빌려 사선을 타고 한반도에 들어야 했다. 일제강점기 수탈항으로 번성했던 목포에는 이들 귀환자들로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면서 도시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해방 전에 72,981면이던 목포인구는 1946년에 103,000명으로 급증하고 1949년에는 111,000명까지 늘어나 12만을 헤아리게 된다. 이때 늘어난 사람들은 일본에서의 귀환자, 남하동포, 교외의 타지방 전입자 등이었다. 1948년에 목포부에서는 식량 미수배자의 통계를 보고용으로 작성하였다. 그 통계를 들여다보면, 4월 현재 미수배자 총수는 23.411명이나 되는데, 이들 중 일본에서의 귀환자가 145세대 671, 남하동포가 145세대 1,482, 교외의 타지방 전입자 412세대 21,254명이었다. 당시 목포에는 이들을 구제하고자 임시 이재민구호소를 19477월경에 개소하였는데 3~4개월 안에 대략 5만명 가량이 입소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당시 목포로의 인구집중이 얼마나 폭발적이었는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에 소학교를 졸업한 정한순 여사도 고향인 강진 병영에 돌아왔지만 생업을 위해 목포로 이주해 거주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렇게 돌아온 사람들도 많았지만 살제 징용에서 살아서 돌아지 못하고 죽은 원혼도 많았다. 강제 징용으로 악명이 높았던 사키토 섬에서 죽어간 원혼들이 목포시 부주산 강제징용위령탑에 처음 모셔졌다. 이곳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이동하면 사키토 섬에 닿는다. 사키토는 본래 어촌이었으나, 1907년 해저 탄층이 발견되면서 규슈탄광기선주식회사 사키토광업소가 설립돼 본격적으로 채광에 나섰다. 이후 이 탄광을 미쓰비시가 이어받아 1939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선인 노동자를 징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에서 많은 사람이 징용에 끌려갔으며 당시 7000여 명의 노동자 중 40%가 조선인·중국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12시간의 가혹한 노동과 매질로 조선인 노동자들이 질병과 낙반사고로 죽어갔고, 유해들은 그대로 내버려졌다. 197311월 재일교포인 권구용(2003년 작고)이 개인 사재를 털어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 강제징용으로 희생되어 일본 각지에 흩어진 유골 240(탄광 등 지용사망자 71, 원폭사망자 169)를 해방 28년 만인 1973년이곳 공동묘지로 모셔와 징용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목포시와 함께 납골당 및 위령탑을 건립했다. 이후 19851010일에 안장된 유골 중 무연고자 233위를 해외동포를 위한 국립묘지인 망향의 동산(충남 천안시 소재)으로 이장하여 현재는 탑 아래 위치한 납골당은 유골이 안장되지 않다. 최근 목포시는 문화적 자료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관리하고 있다.

목포에서 일본을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개발이 비켜간 탓도 있지만 그만큼 목포는 일제식민지의 아픔을 가장 많이 간직한 곳이며 아직도 아픔을 안고 살아온 사람과 후손들이 살고 있어 존치하고 있다. 1920년에 설립되어 조선에서 가장 많은 소작료를 걷어 조선인을 착취하는데 앞장선 석조건물의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이 상존했다. 우달산 노적봉 아로 아래 르내상스식 건물인 옛 일본영사관 건물도 있다. 곳곳에 일본인들이 살다가 남겨 놓고 간 일본식 건물이 곳곳의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채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36년 식민지 근대화론을 펼치며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거부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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