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목포를 사랑한 사람들 7인의 이야기Ⅳ-보해 임광행④] 투철한 기업가 능력으로 부 일궈 어둡고 사회 행복 밝은 사회 만들다
상태바
[연재/목포를 사랑한 사람들 7인의 이야기Ⅳ-보해 임광행④] 투철한 기업가 능력으로 부 일궈 어둡고 사회 행복 밝은 사회 만들다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2.11.04 09: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보해양조 직장 새마을금고‧보해장학회 통해 종업원 복지 향상
74세 목포상공회의소 회장 취임 82세까지 지역상공 발전 헌신
신항만건설 도청이전 등 지역 발전 굵직한 현안사업 해결 앞장

본지는 지역주의타파범국민실천위원회 배종덕 위원장이 집필한 목포 7인의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을 기반으로 ‘7인의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란 주제로 연재한다. 이번 연재는 배 위원장이 출간한 책에서 저자가 직접 작성한 글로서 61일 발행되는 신문부터 독자를 찾아간다. 30회에 걸쳐 보도될 이번 연재는 일곱 분의 인사 중 네 번째 순서로 산업경제분야로 임광행 보해 회장 편이 총 6회에 보도된다. 일곱 분은 종교복지분야 이남규 목사, 행정분야의 하동현 전) 목포시장, 사회복지분야 윤학자 여사, 산업경제분야 임광행 회장, 문화예술분야 차재석 전)목포예총지부장, 사회봉사분야 박길수 씨, 사회봉사분야 김환 전 백년회 이사장 순으로 보도된다.<편집자 주>

7인의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보해양조 임광행

임 광 행(1918 ~ 2002)

보해는 술만 팔았을까?

임광행이 제품과 소비자 못지 않게 경영에 중점을 둔 부문이 종업원의 복지향상이었다. 그 구체적인 실현이 보해양조 직장 새마을금고보해장학회의 설립이다. 보해양조 직장 새마을금고는 19757월 정부당국의 승인을 얻어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회원이 500여명이 될 만큼 날로 발전한 보해의 새마을금고는 197834, 전국 직장 새마을금고 지도자 전진대회에서 영예의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인지 보해는 노사분규가 거의 없었으며 장기근속자가 유별나게 많았다. 임광행은 1981124일 늘 꿈꾸어 왔던 보해장학회를 설립한다. “기업은 사회를 위해 존재한다. 재산은 살아 움직일 때 제 가치를 낼 수 있으며 기업은 인재양성을 뒷받침해야 하는 책임도 지고 있다.”는 평소의 신념이 장학회 설립으로 실천된 것이다. 미국의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앤드류 카네기(1835.11.25.~1919.08.11.미국))기업가는 부를 축적할 자유를 갖고 있다. 그러나 부를 사회에 환원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라는 말을 하였다. 임광행의 말, 카네기의 말,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임광행에게서 카네기의 면모를 보는 듯 하다.

현재의 보해장학회는 사세의 위축 때문에 초기처럼 활발하지는 못하지만 202010월 현재 3735명의 장학생을 배출하였으며, 장학금으로 351970만원을 지급하였다.(2020년 년도분은 12월 지급예정) 40년에 걸친 보해의 장학 선행정신은 가난 때문에 마음껏 배우 수 없었던 임광행의 한을 청소년에게 희망의 꿈을 주는 유쾌한 역사로 승화시킨 것이다.

 

임광행의 목포사랑

1996827, 임광행은 국립목포대학교로부터 명예경제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목포대학교 이태근 총장은 학위수여식사에서 투철한 기업가 능력으로 이룩한 성과를 가지고 어렵고 어두운 사회를 행복하고 밝은 사회로 만들고자 오랜 세월에 걸쳐 힘을 쓰신 임광행 회장은 기업활동과 봉사활동을 병행하신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업활동과 봉사활동의 병행가...임광행에게 잘 어울리는 적절한 표현이다. 임광행은 생의 전반기에는 기업을 반석 위에 세워 놓았고, 후반기에는 기업의 토대가 된 목포를 살기 좋은 도시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기 위해 무한 봉사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임광행의 목포사랑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편의상 상공회의소 회장으로써 활동한 공적활동과 그밖에 사적활동으로 나누어서 파악하는 것이 좋다. 이유는 임광행의 활동반경이 너무 넓고 깊기 때문이다.

-공적활동

임광행은 1992년 제14대 목포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취임한다. 74세에 상공회의소 회장직을 시작해서 건강이 악화되기 직전인 82세까지 말년의 대부분을 상공회의소에 바쳤다(14-홍순기회장 잔여임기, 15,16). 공적활동기라 할 수 있는 8년동안의 활동이 너무 많아 다 열거하기가 쉽지 않다. 대표적인 것만 살펴보자.

보해양조(대표이사 유철근)는 2014년 12월 2일 목포 본사에서 광주·전남 지역 학생들을 대상으로 2014년도 장학금 수여식을 진행했다.

1)신외항건설 주도-신외항건설이 절실한 목포시로서는 정부의 예산확보가 큰 문제였다. 그러나 주무부처인 경제기획원에서는 연2년 계속해서 예산을 책정해주지 않았다. 이의 해결을 위해 임광행은 당시 여당이던 민자당 전남도당위원장 정시채, 목포시 지구당위원장 배종덕에게 예산확보를 위해 뛰어 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결국 임광행과 이들의 노력으로 국회예결위원회 최종심의과정에서 조사 용역비 5억원이 책정되어 신외항건설이 이루어지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임광행의 의지와 집념이 없었으면 실현되기 힘든 일이었다.

2)무안국제공항건설의 산파역-1993년 아시아나 항공기 사고가 난 직후, 임광행은 730, 정시채 국회사고 조사위원회 위원장과 목포시 지구당위원장 배종덕의 주선으로 황인성 국무총리와 정재석 경제부총리를 면담하였다. 이 자리에서 황총리와 정부총리에게 목포공항의 활주로 연장과 무안국제공항 신설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임광행의 요구를 받아들인 정부당국은 무안국제공항 건설 타당성 조사작업을 진행토록 관계부처에 지시하였으며, 이로부터 14년이 지난 2007118일 무안국제공항이 개항되게 되었다.

3)전남도청 유치에 대한 주도적 역할-목포시민의 최대의 관심사였던 전라남도 신도청지를 목포시 인근 무안군 삼향읍 남악리로 유치하기 위한 임광행의계획은 매우 담대하고 치밀하였다. 임광행은 안으로는 목포권인사들을 중심으로 전라남도 신도청 목포권 유치 추진 위원회’(1993)를 결성하고, 밖으로는 정관계는 물론 영향력있는 학계인사들까지 접촉을 확대하였다. 임광행은 추진위원회의 활성화를 위해 자신이 직접 추진위원장을 맡고, 주변의 상공인, 기업인, 정관계인사들로 대규모 추진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위원회의 원활한 활동을 위해 필요한 모든 비용을 임광행 자신이 부담하였다. 그리고 영향력 있는 외부 인사들과의 접촉의 일환으로 신도청지 선정을 결정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할 위치에 있던 한국미래학회”(1968년 전경제부총리 이한빈박사의 주도로 창립되었음.)의 회원들과의 유대를 강화하였다. “한국미래학회세미나를 목포로 유치한 인연을 살려서 도청이전에 관한 용역 업무에 참여한 미래학회 회원들에게 거의 무차별적으로 신도청지는 목포 인근의 남악리가 최적지라는 점을 집요하게 역설하였다. 임광행의 이러한 주도면밀한 활동과 정성이 결실을 보았던 것일까? 전라남도 신도청지는 목포시 인근 무안군 삼향읍 남악리로 결정된다.

4)무안반도 대통합추진주도-19956월말, 지자체 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정부는 지역생활권이 시,군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판단된 지자체를 대상으로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이를 통합하는 조치를 실시한다. 이러한 기류에 편승해 목포시에서도 인근 무안군과의 통합을 하자는 주장이 시민들 사이에 거세게 일어났다. 이러한 여론을 배경으로 삼아 목포시에서는 거시적으로 상공회의소 회장인 임광행을 중심으로 무안반도 대통합추진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하지만, 무안군사람들은 목포시민들의 생각과 달리 무안군으로 신도청이 이전되면 무안군은 자연스럽게 시로 승격할 것이라며 통합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에 임광행과 추진위원들은 목포가 당초 무안의 일부였고 도청이 이전하게 되면 함께 광역도시로 비약할 수 있다며 설득하였다. 심지어 통합이 성사되면 도시명도 목포를 포기하고 무안으로 양보하겠다는 안도 제시하였다. 그러나 무안군민들의 반대로 통합찬반 주민투표에서 통합찬성은 연이어 부결되고 말았다. 무안군민들의 보해제품 불매운동까지 벌이겠다는 모욕을 감수하며 통합에 앞장섰던 임광행의 꿈과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임광행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실패의 역사가 쓰여 졌다.

5)목포대학교 의과대학 신설 추진-사업에도 기복이 있듯이, 임광행이 전력투구했던 목포사랑을 위한 지방투자유치활동도 모두 성공하지는 못했다. 무안반도 대통합의 실패에 이어 목포대학교 의과대학 신설추진도 실패 사례 중 하나다. 당시 목포대학교 기성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던 임광행은 우수인재를 모집하려면 의과대학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래학회를 통해 친분을 쌓은 이한빈 경제부총리를 면담 하고 의과대학 신설을 위한 예산배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의과대학신설을 위한 예산확보 실패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국립순천대학교가 존재하고 있는 동부권 지역 주민들의 반대여론이 높았으며, 둘째는 목포 내에서의 경합이 또 하나의 이유였다. 목포권에 위치한 대불대학교(사립)가 의과대학을 신설하겠다고 경합을 벌인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아래서 정부당국이 목포대학교에 의과대학을 신설토록 예산을 배정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찌되었든 임광행의 목포사랑이 결실을 보지 못한 채 또 하나의 실패사례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 노고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6)목포역사 지키기-19927월경 목포시는 중대한 발표를 하였다. 호남선 복선화사업에서 기존 목포역을 없애고 종착역을 임성역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는 발표였다.

이 발표를 들은 목포역 주변의 호남동 주민들은 아무리 철도청과 목포시 합의 하에 이루어진 일이라지만 이대로 좌시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곧바로 목포역사 이전 반대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상공회의소회장이자 역사 주변의 주민이기도 한 임광행도 이 대열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광행은 투쟁위원들의 추대에 의해 수석고문직을 맡게 되었다. 임광행은 목포역사를 제자리에 그대로 지키기 위해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우선 철도청사정에 밝은 목포기관차사무소 소장출신 이종민씨를 목포상공회의소 회장 보좌역으로 영입하였다.

본격적인 대 철도청 설득작업을 위해서는 철도청사정을 잘 아는 인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임광행은 1993년 봄 목포역사 이전문제를 논의하고자 이종민씨를 앞세워 철도청 차장을 면담한다. 철도청차장과 시설국장이 배석한 자리에서 설득력 있는 논리로 역사는 현재 위치에 그대로 있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임광행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차장은 이분들의 말을 들으니까 목포역을 현 위치에 둬야 한다며 그 자리에서 단안을 내려주었다.(매화향기를 맡으며, p.216) 목포역사 이전이 백지화된 것이다. 하마터면 1913515일 영업을 시작하여 100년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목포역사가 사라질 뻔하였다. 1920년대부터 현재까지 남행열차라는 애칭으로 많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온 추억과 낭만이 서린 호남선의 시,종착역인 목포역, 임광행과 목포시민들의 감동어린 열정 덕분으로 지금까지 목포시민들과 함께 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목포시장을 지낸 김흥래씨(29대 목포시장(1991~1992). 행정자치부차관 역임)는 임광행을 개항 이래 목포 발전의 최고의 전도사라고 증언한 바 있다. 계속해서 목포발전의 최고의 전도사 임광행의 잘 알려지지 않은 목포사랑에 대한 사적 활동을 조망해 본다.

/다음 호에 이어짐

-약력

목포 중.고등학교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 MBC PD / 에스콤 대표이사/ 제일기획(삼성그룹) 기획국장 / 통일민주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목포시지구당위원장 / 지역주의타파 범국민실천위원장 / 저서 나는 일하고 싶다’‘매향노라 불리운 사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