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목포를 사랑한 사람들 7인의 이야기Ⅴ-목포예총지부장 차재석⑤]예술을 저녁으로 먹자던 ‘항구의 크리에이터’ 하늘의 별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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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목포를 사랑한 사람들 7인의 이야기Ⅴ-목포예총지부장 차재석⑤]예술을 저녁으로 먹자던 ‘항구의 크리에이터’ 하늘의 별이 되다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2.12.22 08:5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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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세 생 마감 역광장서 목포의 문화, 예술인 목포예총장
오거리의 다방들과 목포의 은성 동천주점 목포 문화장으로
차재석의 사적 공간이자 목포의 “예술아카데미하우스”역할

본지는 지역주의타파범국민실천위원회 배종덕 위원장이 집필한 목포 7인의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을 기반으로 ‘7인의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란 주제로 연재한다. 이번 연재는 배 위원장이 출간한 책에서 저자가 직접 작성한 글로서 61일 발행되는 신문부터 독자를 찾아간다. 30회에 걸쳐 보도될 이번 연재는 일곱 분의 인사 중 다섯 번째 순서로 문화예술분야로 차재석 전)목포예총지부장 편이 총 5회에 걸쳐 보도된다. 일곱 분은 종교복지분야 이남규 목사, 행정분야의 하동현 전) 목포시장, 사회복지분야 윤학자 여사, 산업경제분야 임광행 회장, 문화예술분야 차재석 전)목포예총지부장, 사회봉사분야 박길수 씨, 사회봉사분야 김환 전 백년회 이사장 순으로 보도된다.<편집자 주>

7인의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목포예총지부장 차재석

내주부터 사회봉사분야 박수길 씨 편입 연재됩니다.

차 재 석(1926 ~ 1983)

사적공간에서 빛난 사람

인간 차재석을 일컫는 말은 참으로 많다. 그의 호인 다목동에서부터 신분증이 필요 없는 사람”, “얼굴이 명함인 사람”, “오거리 쇠 전봇대”, “차두목”, “목포 바닥쇠등등, 심지어 그의 신체적 결함을 빗대어 라콤파르시타라는 말까지 있다. 때문인지, 차재석이 57년의 생을 마쳤을 때 시인 최일환을 비롯해서 30여명의 문화 예술계 인사들이 조사와 추모사를 통해 차재석 생전의 여러 모습과 활동에 애도를 표했다. 그러나 이들의 조사와 추모사의 공통적인 내용은 차재석과의 사적공간에서 있었던 추억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오거리일대에 산재한 수많은 다방과 주점들이 차재석의 사적공간이었다. 수많은 문화예술인들, 그리고 지망생들이 찻잔과 술잔을 앞에 놓고 그의 얘기를 경청하던, “미네르바”, “밀물그리고 새마을 다방동천주점이 차재석의 대표적 사적공간이자 칠판 없는 강의실이었다. 이당시 차재석의 행태는 BC5세기경에 활동했던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모습과 비슷했다.

일설에 의하면소크라테스는 주로 술집이나 거리(아고라)에서 사색과 담론을 통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같은 제자들을 교육시켰다고 한다.”너 자신을 알라“(그리스델포이의 아폴로 신전 현관 기둥에 새겨졌다는 말)라는 유명한 말도 학교나 강의실이 아닌 술집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아무튼 이 시기를 소설가 윤청광은 이렇게 회고한다.

“1950년대 후반부터 다목동 선생이 세상을 뜨실 때까지 목포에서 자란 예술인들은 다목동 선생의 커피를 안 마신분이 없고...”(윤청광. “잊을 수 없는 다목동, 삼학도로 가는 길”, p.289)

오거리 인근의 다방들이 주간 강의실이었다면 목포의 은성”(문화예술인들이 즐겨찾던 명동 소재의 주점.(최불암씨 모친이 경영))이라고 불리는 동천주점”(문복만 경영)은 야간 강의실이었다. 술과 여흥을 좋아했던 문화예술인들은 밤이 되면 차재석을 중심으로 홍어삼합이 일품이었던 동천주점으로 모여들곤 했다. 술과 함께 듣는 차재석의 얘기는 그 어떤 강연회나 토론회에서도 들을 수 없는 문화예술에 대한 수준 높은 종합강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지갑이 얇은 문화예술인들을 대신하여 술값은 의례 차재석의 몫이었다. 추모사를 쓴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거리의 다방과 동천주점에서 있었던 차재석과의 추억을 회고하는걸 보면 그 시절, 그 시간이 그들에게 얼마나 멋지고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오거리의 다방들과 목포의 은성 동천주점은 차재석의 사적 공간이자 목포의 예술아카데미하우스였다. 차재석은 사적 공간에서 더 빛이 난 사람이었다.

 

차재석의 마지막

목포 문화예술계의 쟁기꾼 차재석이 198326일 하늘의 별이 되었다.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그러나 1970년 후반부터 차재석의 운명의 추는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었다. 예총의 운영관계, 예총회관 이전에 따른 재산증감문제 등이 논란과 시비가 되어 차재석의 자존심을 심히 상하게 하였다. 문화협회시절과 예총지부 내내 거의 차재석의 사비로 운영되다시피한 예총살림이 오히려 구설에 오르자 차재석으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모멸감과 심한 스트레스로 불면의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차재석은 78331일자로 예총 목포지부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특히, 나중에 무혐의로 결론이 났지만 회관문제로 인해 자신이 수사대상이 되었다는 점이 차재석에겐 씻을 수 없는 심한 모욕감을 느끼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이러한 어수선한 상황이 정리되자, 차재석도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얄궂은 운명의 1983년이 차재석을 찾아왔다. 그리고 26일이 되었다. 차재석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예총사무국장 박종길과 오거리곰탕집에 갔다. 곰탕을 들고 나오면서 차재석은 박종길에게 이따 만나세하면서 헤어졌다. 그러나 그 말이 차재석의 마지막이었다.(박종길. “삼학도로 가는 길”, p.256) 차재석은 26일 자정 무렵 의사였던 숙부 차남수 그리고 최진열을 비롯한 예총 임원들과 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차재석이 세상을 뜨자 전국에서 30여명이 넘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조사와 추모사를 통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이들은 한결같이 차재석의 훌륭한 인품과 업적, 그리고 목포사랑에 대해 추모하였다. 시인 권일송의 추모사다.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으레 다목동을 찾았다. 그는 개인의 호주머니를 털어 목포의 모든 것을 대변해야만 했었다. 그는 그림도 좋아하고 시나 음악도 사랑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크고 작은 예술 활동의 뒷바라지에 힘쓴 그의 노고에 대해서는 별다른 보상이 따르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권일송. “삼학도로 가는 길”, p.215)

희곡 작가 김봉호의 추모사다.

경향을 막론하고 문화계에 종사하는 사람치고 목포와 인연을 맺으면서 차재석을 모르는 분이 있던가! 그가 목포라는 한지방의 문화예술창달에 기여한 공로는 목포의 것에 지나지 않고 모든 지방의 귀감이 되었다. 그 모든 지방에 차재석같은 인물이 한 사람씩만 건재 한다면 우리나라 전반의 문화예술 양상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김봉호. “삼학도로 가는 길”, p.223)

시인 김재희(전 광주고교 교사)의 회상기 중 일부다.

진실로 선생이야말로 목포에서 태어나 예술을 위해 살고 목포문화계를 위해 살다간 유일무이한 인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에게 좀 더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더라면 그는 분명 목포 유달산의 큰 바위 얼굴로 새겨질 수 있는 인간이 되어도 좋았을 것이다.”(김재희. “삼학도로 가는 길”, p.225)

화가 살바도르 달리(스페인. 1904~1989)를 좋아했고, 군 출신 시장 김동석(20, 가수 진미령 부친)마저 반하게 했던, 그리고 중고등학생들에게 방학 동안 필독서로 일본인 야나기무네요시(일본인. 1889~1961)조선과 그 예술을 추천하던 다목동 차재석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길로 떠났다. 짜장면을 점심으로 채우고 예술을 저녁으로 먹자던 항구의 크리에이터차재석이 정말로 목포를 떠났다. 사랑했던 오거리, 새마을 다방과 동천주점을 남겨 놓은 채, 그리고 별다른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차재석이 생을 마친 이틀 후인 28일 오전 11, 목포역광장에서 목포의 문화, 예술인들이 마련한 목포예총장이 거행되었다. 평생을 목포의 문화예술을 위해 살다간 차재석에 대한 마지막 예우였다. 영결식장에서 시인이자 한국문협 전남도지회장 최일환이 고 차재석 선생의 영전에라는 장문의 조시를 통해 다목동 차재석의 먼 길을 환송하였다.

<조시> 고 차재석선생의 영전에

목포시민 그 어느 누가

유달산을 사랑하지 않으며

목포시민 그 어느 누가

삼학도를 사랑하지 않으랴만은

그러나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유달산에 흩어진 돌 하나라도

삼학도를 스치는 갯바람 한 줄기라도

가슴에 안고 마음에 담아

목포를 가장 아끼시던 선생님,

님은 가셨습니다.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가시지 않았습니다.

 

우리 목포의 역사속에서

숨을 쉬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 목포의 예술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 고장을 노래한

시 한 구절이라면

굳게 담긴 입술에서라도 아 - 지금

들썩거리며, 읊조리십니다.

 

우리 고장을 그려 놓은

그림 한 폭이라면

굳게 감은 눈에서라도 아 - 지금

들여다 보십니다. 감상하십니다.

 

목포의 옛날을 그 누가 더듬으리오.

우리의 뿌리를 그 누가 찾아가리오.

즐겨 헤매시던 거리 거리 고향의

옛 향기 고이 담고

이젠 우리들에게 향불에 피어나는

그윽한 연기 남기며 지금.

가시렵니까. 가시렵니까.

 

님이 마련한 무안동 예총회관에도

지난 날의 남교동 회관에도

더 지난 날의 오거리 문화협회 회관에도

 

세월은 강물처럼 흘렀지만

님이 뿌려놓은 목포의 예술은

사랑방의 숯불처럼 불러옵니다.

훈훈한 바람처럼 불어옵니다.

 

찢겨 상처난 삼학도이지만

사랑의 처럼 살아 남아서

님의 숨결은 새롭게 피어납니다.

 

유달산 기슭으로 넘어간 조각달이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가시듯

님은 조용히 가셨습니다.

 

그토록 아끼시던 노적봉을 돌아서

뒷개를 돌아서 터진목을 지나서

갓바위도 돌아서 만호동 여염집

임진란의 발자취도 살피고,

없어진 째보선창도 흝어 보시고

마지막 함께 자리하던 목포의 시인들

박순범을 최덕원을 황의돈을 최일환을

한 번 더 쳐다보고

님은 가셨습니다. 선생님은 가셨습니다.

 

그날 오후4

매일 한번 드나들던

우리들의 해태다방에서

유달리도 깨끗한 옷차림

유달리도 말끔한 매무새가

마지막 즐겨하신 선비 모습이었나요

님이 즐겨하신 선비 정신이었나요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은 언제나 풍요로왔던

아무리 연약해도

비굴하지 않았던

- 의로우신 선생님

 

그윽한 산골 설녹차 한 잔.

점잖게 앉아 마시는 모습으로

지금 그렇게 천사들 날개속에

고이 주무시겠지요, 茶木童 선생님

 

남도 도도한 예술에 취해

달밤 학의 날개 접듯, 마음 가다듬고

붓 글씨로

천국에서도 목포를 그리고 계시겠지요.

우리 선생님,

- 목포의 문화재

예술의 터주대감님

개항 80년의 목포시사를

보시기전, 눈을 감으시다니,

시사 편찬실을 떠나시다니.

 

잘도 되뇌이시던

김우진이도 이난영이도 만나시렵니까

백발청춘 백홍기도 만나시렵니까.

 

양지 바른 산골

남농 산수화의 명당속에서

취당선생님도 만나시렵니까.

 

목포문학의 뿌리를 매월 한번씩

나에게 써 주셨는데

이제 또 한 그루

선생님의 뿌리가 생겼습니다 그려.

 

삶과 죽음의 뜻이

우리 천한 인생이 어찌

헤아리리요만,

거룩하신 분의 다른 뜻이

높으신 분의 다른 뜻이

이 짧은 평생 두고 가심에 있으니

 

부디 고이 잠드소서

우리 고향 목포의 문화재 다목동선생님 고이 잠드소서.

198328

목포역 광장 영결식장에서

/연재 마무리

-약력

목포 중.고등학교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 MBC PD / 에스콤 대표이사/ 제일기획(삼성그룹) 기획국장 / 통일민주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목포시지구당위원장 / 지역주의타파 범국민실천위원장 / 저서 나는 일하고 싶다’‘매향노라 불리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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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길 2022-12-28 20:03:26
참' 좋은분 좋은글감사합니다.나년에도 더욱더건강히 목포의좋은글 부탁합니다.유 재길올림

박태윤 2022-12-28 10:47:12
차재석님의 인생길에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목포 현대 산증인의 글을 올리신 고문님의 한땀 한땀이 예술입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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