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목포를 사랑한 사람들 7인의 이야기Ⅶ-오거리 시장 김환④]오거리 누빈 자상한 ‘목포 사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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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목포를 사랑한 사람들 7인의 이야기Ⅶ-오거리 시장 김환④]오거리 누빈 자상한 ‘목포 사나이’였다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3.03.02 09:26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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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넓은 중앙 인맥 목포 발전 위한 인프라구축 국비 확보 동분서주
‘백년회 발전 곧 목포 발전’ 신념 속 20년 이끌며 목포발전에 헌신
젊음과 꿈 열정 묻은 ‘목포 희망 지킴이’ 50여년 활동 2017년 소천

본지는 지역주의타파범국민실천위원회 배종덕 위원장이 집필한 목포 7인의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을 기반으로 ‘7인의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란 주제로 연재한다. 이번 연재는 배 위원장이 출간한 책에서 저자가 직접 작성한 글로서 61일 발행되는 신문부터 독자를 찾아간다. 30회에 걸쳐 보도될 이번 연재는 일곱 분의 인사 중 일곱 번째 순서로 사회봉사분야 김환 전 백년회 이사장 편이 총 4회에 걸쳐 연재된다. 일곱 분은 종교복지분야 이남규 목사, 행정분야의 하동현 전) 목포시장, 사회복지분야 윤학자 여사, 산업경제분야 임광행 회장, 문화예술분야 차재석 전)목포예총지부장, 사회봉사분야 박길수 씨, 사회봉사분야 김환 전 백년회 이사장 순으로 보도된다.<편집자 주>

7인의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오거리 시장 김환

김 환(1935 ~ 2017)

오거리 시장(市長)

목포에는 유달산과 삼학도가 있다. 그리고 오거리가 있다. 유달산은 목포의 얼굴이고, 삼학도는 심장이며, 오거리는 몸이다. 목포시사(市史)(2017.12.31. 발행) 4487쪽에 기록된 오거리는 목포역에서 남쪽으로 와서 목포문화원을 지나 선창으로 가는 길, 기업은행 유달출장소로 가는 길, 유달산 등구로 올라가는 길, 그리고 차 없는 거리로 가는 길 등, 다섯 갈래의 길이 나있다. 여기를 목포 오거리라 한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단순한 지리적 관점에 의한 서술이다. 그러나 오거리는 목포사람들에게 단순히 지리적 위치로만 자리매김되는 그저 그런 곳이 아니다. 시인 권일송은 오거리를 모르고는 목포를 모른다라고 그의 시 오거리샹송에서 노래했다. 그렇다. 권일송의 시처럼 오거리를 모르는 사람은 목포 사람이 아니고, 오거리를 모르고는 목포를 안다고 할 수 없다. 유달산과 삼학도가 이난영의 노래가 되었듯이 오거리도 어느 순간 시인의 노래가 되었다. 오거리는 어떠한 연유로 시인의 노래로까지 불리게 되었을까? 한 마디로 오거리는 목포시민들의 몸이면서 동시에 놀이터였기 때문이다. 당시 목포에는 오거리보다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는 육거리가 두 곳이 있었다. 하나는 이난영의 생가터로 알려진 양동 육거리이고, 또 하나는 죽동 육거리다. 이처럼 양동 육거리와 죽동 육거리가 있었음에도 어떻게 해서 오거리가 육거리들을 제치고 시민들의 제1의 놀이터가 되었을까? 오거리의 생성과정을 통해 그 이유를 알아보자. 오거리는 일제강점기 시절(1920-1930년대) 조선총독부가 일본인 거류지와 조선인 거류지를 연결하기 위해 무안통 도로를 개통하는데, 이 도로가 개통이 되면서 중간 지점인 오거리가 탄생하게 된다. 오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뛰어난 지리적 장점을 지니게 된다. 오거리 주변에는 걸어서 10분 이내에 갈 수 있는 목포의 관문인 목포역을 비롯해서 각종 금융기관, 그리고 시청을 비롯한 법원, 경찰서, 소방서 등 공공기관이 있었으며, 다도해의 수많은 섬들과 왕래할 수 있는 목포의 제2 관문인 앞선창이 지척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사람과 돈이 몰리기 시작하였으며 식당, 주점, 다방 등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이러한 요인들이 상호간에 선순환 하면서 오거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뜨기 시작하였으며, 곧바로 목포의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 “핫 플레이스는 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각양각색의 수많은 사람들의 놀이터가 된다. 놀이터가 된 오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연과 함께 발자취를 남겼다. 그 중에서도 이제는 모두 고인이 되었지만 차재석(전 예총지부장), 강성초(“새마을다방 경영), 정일찬(도선사), 김수호(서양화가), 강방원(체육인), 김환(전 백년회 이사장), 이용환(덕인 식당 경영), 그리고 성명 미상의 땃또”(체육관 운영, 복싱 선수) 등이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오거리 레전드이다. 이상의 여덟 분 중에서도 오거리 백작으로 불린 차재석과 오거리 시장으로 통했던 김환은 레전드 중의 레전드이다. 시장 김환, 백작 차재석의 이야기다.

먼저 김환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김환을 오거리 시장으로 불렀다. 김환에게 오거리는 성장기 시절부터 놀이터였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출입하게 된 시기는 1970년 초부터 2017년 작고하기 전까지였다. 활동 본거지는 오거리 중앙에 위치한 쇠전봇대(철거되었음)를 중심으로 맞은편의 선창 쪽이었다. 김환의 아지트는 낮에는 다방과 다방이었으며 밤에는 궁전식당이었다. 김환은 어떤 연유로 오거리 시장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사연인즉, 시의원을 지낸 ()한중석씨가 부르기 시작하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어느날 김환이 다방의 손님 전원의 찻값을 계산하는 것을 목도한 한중석씨가 시장도 하지 않는 일을 이사장님께서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계산하신다면서 오늘부터 오거리 특별시장님으로 모시겠습니다.”한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오거리 시장김환. 잘 어울리는 별호다.

차재석의 이야기다. “오거리 백작으로 불리운 차재석은 무슨 연유로 오거리 백작으로 통했을까? ()차재석 예총목포지부장은 1950년 중반부터 1980년대 초 작고하기 전까지 오거리의 터줏대감이었다. 차재석은 오거리의 정 중앙이라 할 수 있는 쇠전봇대를 중심으로 동쪽 지역인 새마을다방이 있는 차 안 다니는 거리 쪽을 선호하였다. 낮에는 주로 새마을”, “미로”, “해태다방 등에서 활동하였으며 밤에는 목포의 은성 동천주점에 자리를 폈다.

차재석이 오거리 백작으로 불리게 된 사연은 예총 동료 예술인들이 부르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서양화가 ()양문철씨의 회고에 의하면, 동천주점 술자리에서 시인 누군가가(김희웅?, 최하림?, 권일송?) “서울 명동에는 명동 백작이봉구(1916-1983, 소설가, 대표작 명동’,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가 있고, 목포 오거리에는 오거리 백작차재석이 있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 말에 기분이 좋아진 차재석이 술값을 계산하자 참석자 전원이 백작님 건배!”하였다고 한다. 수십 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쉬지 않고 놀이터 오거리를 지키던 차재석, 김환. 지금은 그 모습 찾을 길이 없고, 오거리는 놀이터의 명성을 잃은지 오래되었다. 오거리는 매일 외로움에 지쳐가고 있다.

마지막 봉사

김환은 생의 마지막을 목포시와 ()목포백년회를 위해 바치기로 하였다. 백년회의 발전이 곧 목포의 발전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때부터 김환은 ()전태홍 목포시장 그리고 상공회의소 ()임광행 회장과 한 팀이 되어 목포를 발전시키는 일에 몰두하였다.

시의 각종 현안은 물론이고, 시 발전에 필요한 인프라구축을 위한 도비와 국비의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대표적인 예다. 16대 국회(2000~2004)때의 일이다. 목포시의 신년도 사업을 위한 국비지원 예산확보를 위해서는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과 국회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시 당국의 요청을 받고 이들과 접촉을 도맡는다. 당시 한나라당 목포시 지구당 위원장 배종덕의 주선으로 당대표인 서청원”, 국회예산결산위원인 심규철의원등과의 면담이 이루어 졌다. 이에 김환은 백년회 주축인사들인 김진호, 박창석, 함로수, 김정기, 문오성 등을 대동하고 한나라당사와 국회를 방문한다. 서청원 대표와 심규철 예결위원을 면담한 김환은 이번에 정부에서 국회에 제출한 예산안은 목포시 발전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예산이므로 삭감 없이 원안대로 통과시켜 줄 것을 간곡하게 요청하였다. 김환 일행의 간곡한 설득이 효과가 있었는지 예산안은 정부에서 제출한 원안대로 수정 없이 통과되었다. 시장이 민주당 소속이었던 목포시로서는 적절한 채널을 활용한 결과였다.

이러한 일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후임시장인 정종득 시장 재임시절에도 김환의 역할은 계속되었다. 김환은 목포문제라면 원근을 가리지 않고, 또 필요한 인물이라면 여.야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할 것 없이 접촉하였다.

김환의 마지막

1) 고생과 수고가 다 지난 후 광명한 천국에 편히 쉴 때

주님을 모시고 나 살리니 영원히 빛나는 영광일세

2) 주님의 한없는 은혜로써 예비한 그 집에 나 이르러

거기서 주님을 뵈옵는 것 영원히 빛나는 영광일세

3) 앞서간 친구를 만나볼 때 기쁨이 내 맘에 차려니와

주께서 날 맞아 주시리니 영원히 빛나는 영광일세

 

(후렴)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

은혜로 주 얼굴 뵈옵나니 지극한 영광 내 영광일세

아멘 -찬송가 610-

 

김환이 목포를 위해 활동한지 5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백년회를 이끈 지도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50여년 동안 목포를 위해 크고 작은 많은 일을 하였다. 사비도 많이 썼다. 병환 중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영국 작가 케서린 메이는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라는 에세이에서 삶은 숲을 통과하는 여정처럼 구불구불해서 한창 울창해지는 계절이 있는가 하면, 잎이 떨어져 나가서 앙상한 뼈를 드러내는 계절도 있다라고 썼다. 김환에게 앙상한 뼈를 드러내는 계절이 왔다.

그러는 사이, 2016년에는 원치 않는 병마가 찾아왔다. 김환은 서울과 목포를 오가면서 투병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병마는 김환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오거리 다방에 나타나면 손님 모두의 커피 값을 대신 내주던 정 많고 호기스러운 목포남자 김환도 병마 앞에서는 그냥 보통 남자였다. 운명의 20171116일이 되었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사랑했던 목포, 그리고 정들었던 오거리와 사랑하는 아내와 22녀를 남겨둔 채 목포지킴이 오거리 시장 김환이 1630, 82세의 나이로 추억의 고향, 이별의 고향 목포를 떠나 영원한 고향인 하나님 나라로 떠났다.

김환이 소천하자 목포시 중에는 이런 말들이 오갔다. “목포의 마지막 어른이 가셨다. 이제 목포에는 어른이 없다.” 또 이런 말도 있었다. “구시대(광복 전) 막내이자 신시대(광복 후) 맏형이 가셨다.” 또 이런 말도 있었다. “학무소용(學無所用), 재무소전(才無所展)의 인물이 갔다.” 학문과 재주가 뛰어났으나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갔다는 말이다. 초등학교 때 월반을 하고 수재만이 다닐 수 있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김환이 동기 동창인 이회창 전 국무총리, 이대순 전 체신부 장관, 조승형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처럼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고향에서 일생을 마친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사람은 어떤 자리에 올랐느냐보다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하다. 김환이 떠나간 날에도 오거리에는 그가 좋아했던 목포는 항구다가 눈물처럼, 추억처럼, 이별처럼 흘렀다.

 

ㅡ 목포는 항구다 ㅡ

1) 영산강 안개 속에 기적이 울고

삼학도 등대아래 갈매기 우는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똑딱선 운다

2) 유달산 잔디위에 놀던 옛날도

동백꽃 쓸어 안고 울던 옛날도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추억의 고향

3) 여수로 떠나갈까 제주로 갈까

비젖은 선창머리 돛대를 달고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이별의 고향

/연재 마무리

 

-약력 : 목포 중.고등학교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 MBC PD / 에스콤 대표이사/ 제일기획(삼성그룹) 기획국장 / 통일민주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목포시지구당위원장 / 지역주의타파 범국민실천위원장 / 저서 나는 일하고 싶다’‘매향노라 불리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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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우 2023-03-16 15:05:01
샬롬~!!
귀한 우리 고향자료를 고마움과 감사함으로 읽었습니다. 주안에서 평강하시고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건행하시기 바랍니다.

김상민 2023-03-13 11:04:34
배위원장 목포의 역사를 연재한기사 보면서 학창시절 매일 오거리를 지나야만 했던 추억속에 잠시 머뭇거렸다네 자네의
연재기사를 보면서 우리가 몰랐던 목포의 역사를 일깨워준 배위원장게 찬사를 보내네

임오성 목사 2023-03-07 14:35:37
목포의 귀한역사의이야기들을 잘챙겨주셔서 감사 합니다

이승우 2023-03-04 12:03:06
형님,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훌륭하신 선배님을 한번도 뵙지 못한 것이 몹시도 아쉽습니다. 오거리 쇠전봇대와 권투 선수였던 따또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형님 덕분에 모처럼 오거리 추억에 잠겼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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