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팔경(木浦八景)과 심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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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팔경(木浦八景)과 심청전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13.11.15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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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공재명(수필가)

 
목포팔경이 1955년대 하동현 목포시장(1952.4.10~5.7 (27일), 1952.10.24~ 1959. 8.7재임)이 정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유산기암(儒山寄巖), 고도설송(高島雪松), 달사모종(達寺暮鍾), 학도청람(鶴島晴嵐), 금강추월(錦江秋月), 입암반조(笠岩返照), 아산춘우(雅山春雨), 용당귀범(龍糖歸帆)이 그 화제(畵題)들이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전해진 11세기 초 중국 북송대 송적에 의해 그려진 평사낙안(平沙落雁), 강천모설(江天暮雪), 원사만종(遠寺晩鐘), 산시청람(山市晴嵐), 동정추월(洞庭秋月), 어촌석조(漁村夕照), 소상야우(瀟湘夜雨), 원포귀범(遠浦歸帆)인 소상팔경(瀟湘八景)과 거의 비슷하다.

소상팔경도는 소상강(瀟湘江)에 있는데,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라는 호남성 동정호(洞庭湖)의 남쪽 영릉(零陵) 부근 소수(瀟水)와 상수(湘水)가 합류하는 곳의 경치를 여덟 가지 소재로 하여 그린 산수화인데, 강변의 대나무와 안개비를 불러내어 중국의 역사를 그려 후세에 전한 것이다. 이미 고려시대에 이 그림이 전해져 이를 모방하여 송도팔경, 관동팔경, 관서팔경, 관북팔경, 금강팔경 등을 짓고, 이와 유사한 단구들로 지역의 절경을 노래하고 있다. 조선중기에서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판소리에도 이런 소상강의 정서가 스며들었으니 심청전에서 뚜렷하다.

'심청을 배에 싣고 인당수로 떠나는디, 장사長沙를 지내가니 가태부(굴원의넋을 위로하는 부를 남김)는 간 곳 없고, 멱라수를 바라보니 굴삼려 어복충혼漁腹忠魂 무량도 허시든가. 황학루를 당도하니 (중략) 봉황대를 다다르니, 삼산三山은 반락청천외半落靑天外요, 이수중분백로주二水中分白鷺洲는 이태백이 노든데요, 심양강(백낙천 비파행)을 돌아드니 백락천 일거후으 비파성도 끊어졌다. 적벽강(소동파 적벽부)을 그저 가랴. 소동파 노던 풍월 의구히 있다마는, 조맹덕 일세지웅 이금에 안재재安在哉오?(어디에 있는가?) 월락오제月落烏啼 깊은 밤으 고소성(중국소주성)에 배를 매니, 한산사(※장계張繼의 풍교야박楓橋夜泊 월락조제상만천月落鳥啼霜滿天  강풍어화대수안江楓魚火對愁眼  고소성외한산사姑蘇城外寒山寺 야반종성도객선夜半鍾聲到客船) 쇠북소리는 객선으 뎅 뎅 이르는구나.

진회수(운하,술집많음)를 건너가니, 격강의 상녀商女들은 망국한을 모르고서 연룡한수월롱사煙龍寒水月籠沙헌디 후정화(노래)만 부르더라. 소상강을 들어가니, 악양루 높은 집은 호상으 솟았난 듯, 동남을 바라보니 오산은 첩첩, 초수楚水난 만중萬重이라. 반죽班竹(소상반죽, 대나무, 순임금 죽자 두왕비가 피눈물을 흘려 반점이 생겼다함)에 젖인 눈물 이비한二妃恨을 띠어 있고, 무산巫山의 돋는 달은 동정호로 비쳤으니, 상하 천광이 거울속으 푸르렀네. 창오산蒼梧山(순임금이 죽은 산)의 저문 연기는 황릉묘(이비의 사당)에 잠겼어라. 삼협의 잔나비는 자식 찾는 슬픈 소리, 천객遷客 소인騷人(시인,문객)의 눈물을 몇몇이나 빚었든고.

그렁저렁 소상팔경을 지내갈 제, 한 곳을 당도허니, 향풍이 일어나며 옥패소리가 쟁쟁 들리더니, 의희依稀(희미한)헌 죽림사이로 어떠한 두 부인이 선관을 정히 쓰고 신음거려 나오더니,“저기 가는 심소저야! 슬픈 말을 듣고 가라. 우리 성군 유우씨(우씨, 순임금을 말함)가 남순수허시다가 창오산에 붕허시매, 속절없는 이 두 몸이 소상강 대수풀으 피눈물을 뿌렸더니, 가지마다 아롱이 지고 잎잎이 원한이라. 

창오산붕상수절蒼梧山崩湘水絶이라야 죽상지루내가멸竹上之淚乃可滅이라(이태백의 遠別離) 천추의 깊은 한을 호소할 곳 없었더니, 지극한 너의 효성 하례코저 예 왔노라. 요순 후 기천년의 지금은 천자 어느 뉘며, 오현금(순임금상징) 남풍시(순임금 상징)를 이제까지 전하드냐? 수로 먼먼 길 조심허여 다녀오느라.”이난 뉜고허니 요녀순처堯女舜妻(요임금의 딸이자 순임금의 처)만고열녀 이비로다.

“저기 가는 심소저야! 내의 말을 듣고 가라. 슬프다. 우리 오왕(부차) 백비의 참소 듣고, 촉루검 나를 주어 목 찔러 죽은 후어, 가죽으로 몸을 싸서 이 물에 던졌노라. 장부의 원통함이, 월병이 멸오함을 내 역력히 보랴허고 일찍이 눈을 빼어 동문상에 걸었더니, 과연 내가 보았노라, 그러허나 원통한 게 몸에 싸인 이 가죽을 어느 뉘라 벗겨주며, 눈 없는 게 한이 된들 내 눈 누가 찾어주리. 수로 먼먼 길 조심허여 다녀와서, 귀한 몸 되시거든 소인 참소 듣지 말라 황제님전 잘 간하소.”이분은 뉜고허니, 오나라 충신 오자서라.

그곳을 점점 지나 멱라수를 당도허니, 또 한 사람이 나오는디, 안색이 초췌허고 형용이 고고헌디, 글을 읊고 나오면서,“슬프다 심소저야! 어복충혼 굴삼려를 자네 응당 알 터이나, 낭자는 효성으로 죽으러 가고, 나는 충성으로 죽었으니, 충효는 일반이라 호소코저 예 왔노라, 후일 귀히 되시는 날, 황제에 잘 간허여 충신 박대 말게 허면 만세기업을 누리리라.”

목포팔경을 그저 바라보면 이러한 속내를 알 수가 없다. 목포 앞바다로 흘러드는 영산강을 중국의 소상강에 비유하고 싶었던 것은 당시 목포문인들의 애틋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단강이라 자부하고 싶었던 영산강은 하구둑을 막는 순간 강을 강이라 부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두 눈 똑바로 뜨고서도 틀림없는 하수도를 입암천, 죽교천이라 하여 그곳에서 낚시질하려는 꿈을 꾼 자가 있는 목포세상이니 질동의 애처로움을 어찌 알기나 할꼬. ‘학도의 청람’과 ‘금강의 추월’에 숙연하고 ‘입암에 반조’하며 ‘유산기암’과 ‘고도설송’의 자세로 지난날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달사의 모종’을 들으며 ‘용당으로 귀범’하기를 바라는 ‘아산 춘우’속의 나물을 캐는 소녀는 누구일까? 삼학도에 살았던 낭자일까, 인당수에 빠진 심청일까.  

소상팔경은 중국역사의 진수를 집대성한 그림이다. 순(舜)임금의 영혼이 소상강의 대나무 사이의 비가 되어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위로하고, 초회(懷)왕의 넋이 동정호의 밝은 달이 되어 굴평(屈平)의 영혼을 굽어보기 위한다는 사랑과 절조의 역사를 재해석한 것이다. 우리의 남종화에도 도롱이 입은 노옹(老翁)이 빈 배 젓는 그림이 많은 것은 이러한 영향일 것이다. 심청전은 선말의 불우한 선비가 지었을만한 것으로서 중국의 한시를 기반으로 하여 그 정서를 융합시킨 수작이라는 생각이다. 심봉사의 안맹을 오나라의 충신 오자서에 비유한 것은 저자의 선비정신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목포는 일제의 선진 문화의 수입항으로서 번성했다. 일제시대에 번성했던 상점길과 몇 개의 관청, 종교 사찰들만 목포에 남아있을 뿐, 나주나 순천처럼 전통의 고가옥과 문화적인 역사자료가 전무하다. 그나마 목포의 경치를 아름답게 치장하여 목포팔경을 제정한 것도 겨우 근대의 일이다. 목포팔경이 이미 목포팔경이 아니고 여기저기 망가지고 흩어지고 없는데도, 여전히 강태공의 꿈을 꾸고 있는 무리들이 안방을 차지한 현실이 차마 목불인견이다. 그래서 스스로 발안(拔眼)한 오자서가 이해되고 심청이가 찾은 소상강의 정취가 위안이 되는 것이다.  

목포 8경의 심연에는 ‘심청전’의 슬픔과 부활의 정서가 닿아있다. 이제 새로운 목포8경에는 ‘용당귀범’의 만선은 목포의 새로운 발전을 가져올 날을 기다리는 것을 의미할 것이며 ‘유산의 기암’은 유명한 기인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함을 상징하고, ‘고도의 설송’은 고고한 선비의 기질을 표징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굴원과 오자서는 물론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의 기품까지도 목포의 정서와 닿아야 할 것이다. ‘달사모종’은 이미 가버린 목포의 영화를 다시 기다리는 심정으로 울려야 할 것이고, ‘학도청람’의 도화지위에는 왜색의 단풍나무의 그림이 아닌 소상강의 충절을 담은 대나무로 수종을 변경하여 다시 자라야 할 것이다. 이제 ‘금강추월’은 영산강의 맑은 기품을 담기에는 틀렸다. 영산호의 오염된 물에 밝은 추월이 비칠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목포의 환경을 생각하라는 경종이어야 하지 않을까?

목포가 나무포구인지, 나주시대의 목개에 해당되는 것인지, 목화를 심어 목포라고 했는지, 정체성조차 확립되지 않은 안개 같은 도시에 8경을 찾아 붙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려움을 딛고 새로운 시대를 희망차게 불러들이는 심정으로 주위를 사랑의 눈길로 관찰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팔경시대의 도래를 꿈꾼다면, 눈에 보이던 보이지 않던, 무슨 일이던 한 가지씩 생활철학으로 정하여 지금부터 당장 시작하고 볼 일이다. 글을 쓰던, 거리의 휴지를 줍던, 어려운 사람 한 사람을 돕던, 목포를 위하여 금연, 금주를 행하던, 목포를 위하여 조용히 목포를 떠나던, 어찌되었건 목포를 위한 주제 한 가지를 정하고 그 실천을 위해 실제로 행동해야 할 때이다. 이제 압해도의 갯벌 속에 깊숙이 주저앉은 목포가 용을 쓰고 일어나 기지개를 켜야 할 시기이다.   

2013년도 9월 목포시의회 시정 질문 자리에서 목포팔경의 현주소를 짚었던 적이 있었다. 아직 목포에 선비가 살고 있음이 반가웠다. 새로 목포팔경을 제정하는 움직임이 있다 하니, 먼저 그 주소를 확인하고 싶어 느낀 바를 몇 자 적어 본 것이다. 현재 목포시청 홈페이지에 올라있는 목포팔경이 지금의 풍경과 일치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전통은 예전의 것을 굳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과 질서를 만들어 가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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